희망의 밥상
제인 구달 외 지음, 김은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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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뜨거워진 햇살아래서 모처럼 구포시장을 걷는다. 한줄기 바람이 일어나면 순간 몸의 상쾌함이 함께 일어난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며 할머니가 앉아서 대야 가득히 담긴 묵을 파는 모습을 보다가 지나가는 바람이 나의 마음을 태워서 아련한 옛 시골집으로 데려가버렸다. 마음을 잃어버린 나는 껍데기만 남은 채 그곳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향집 마루에선 할머니가 시장에 팔기 위해 만든 도토리묵이 대야 가득 담겨 있었고, 산에서 놀다가 온 몸에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나는 배고프다고 할머니를 보채고 있었다. 할머니는 무엇이 그리 할 일이 많은지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고, 기다림을 참지 못해 화가 난 나는 대야에 담긴 도토리묵을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버렸다. 나의 심술에 화가 난 할머니는 점심 밥상 위에 내 손가락에 뭉개진 묵을 내놓았고, 나는 투덜거리며 밥을 달라고 숟가락으로 밥상을 탁탁 두드렸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재래시장의 한 좌판에서나 길가에 앉아 도토리묵을 파는 할머니를 보면 묵맛을 보고서 도토리묵을 조금씩 사서 집에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 때는 그렇게 먹기 싫었던 그 묵이 이젠 그 옛날의 넓었던 고향집과 할머니의 기억과 함께 어우러져 나에겐 잊을 수 없는 맛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침팬지 연구에 평생을 바쳤던 제인 구달 박사가 왜 밥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녀의 평생의 연구결과가 왜 우리들의 밥상 위로 올라오게 되었는지 처음엔 궁금했다. 하지만 책을 넘겨가면서 이런 나의 궁금증은 아침에 컵에 넣은 커피가 뜨거운 물에 풀리듯 소리도없이 그렇게 풀려버렸다. 서열이 엄격한 침팬지에게 있어서조차 가끔씩 구한 육류 앞에서는 그 서열도 무너져버린다. 어렵게 구한 동물의 살을 두고서는 두목이라 할지라도 사생결단으로 덤비는 침팬지 앞에 두목은 슬며시 남는 것을 던져주기를 기다린다. 사회적 서열과 위계에 앞서 우선 입의 욕망이 동물에게 얼마나 강한 것인지 보여준다. 인간에게도 이러한 사실은 예외가 되지 않는다. 입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식탐이 지구상의 많은 동물들(소, 돼지, 오리, 닭, 양, 칠면조 등)을 얼마나 잔인하게 양육하고 도륙하는지 나아가서 우리 지구생태계를 얼마나 급속하고 회복불가능하게 파괴하는지 보여준다.

  영리한 돼지가 도축장에서 마취주사를 빠뜨린 채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가면서 앞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커다란 칼날 앞에서 얼마나 떨어대는지, 얼마나 공포에 사로잡힌채 울부짖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가혹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에 고기맛이 뚝 떨어진다. 원래 체질적으로 육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우리가 식용하는 소나 돼지를 비롯한 동물들의 양육과정(성장호르몬제, 유전자 변형 주사, 화학 비료에 과도한 항생제 주사까지)을 보기만 해도 인간의 입이 가진 죄가 너무 무겁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 속에 나온 오리의 입을 강제로 벌려 위로 화학 사료를 밀어넣는 사진을 보다가 마치 내가 오리가 된 것처럼 너무 서러워졌다.

  이러한 육식을 위한 숨겨진 비용과 생태계 파괴가 너무나도 크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모른다. 정부보조에 의한 무수한 항생제와 주사 사용, 불결한 양육과정에서 나오는 악취와 오염물질, 토지와 하천의 오염, 생태계의 파괴와 먹이사슬의 최종소비자인 인간에게 그 화와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제가 쌓이고 축적된다는 사실, 그래서 신경질적이고 화를 잘 내는 우리들의 심리상태로 연결된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동물들만 이렇게 비생명적이고 위험하게 키워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몸에 좋다고 생각하는 각종 채소와 과일, 곡물들도 유전자 변형과 화학 비료의 과다 사용과 항생제의 과다 사용으로 위험한 상태에 와 있다. 더구나 뇌가 어느 정도 성장을 완성하는 12세 이하의 아동들에게 이러한 음식이 가져다주는 위험성은 아주 크다는 사실을 빠뜨릴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집 아이에게 주기 위해 받아먹는 우유를 더 이상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유기농 우유를 먹이기로 했다. 또한 우리가 먹는 식품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로 했다.

  수질 오염과 바다 오염도 심각하다. 수많은 양식장과 그로부터 나오는 오염물질들은 연근해를 오염시켜 죽음의 바다로 만든다. 이 곳에서 잡은 물고기와 채취한 먹을거리가 위험한 것은 물론이다. 이미 우리들은 횟집에 가더라도 대부분 양식 고기를 먹게 된다. 나아가 오염된 어패류와 오염된 바다에서 기르는 굴과 김 바지락 등의 양식먹을거리에 대부분 노출되어 있다.

  인간의 숫자가 많아졌다고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대량생산이 필요해졌다고 해서 이런 위험한 음식이 우리들의 밥상위에 오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다국적기업들이 우리들의 먹거리에 투자해서 오로지 보다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의 악순환구조가 우리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밥상을 제공하고 지구에게는 생태계를 파괴하는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실천은 나에게서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에서부터 시작된다. 동래 메가마트에 몇 일전에 갔다. 우연히 걷다가 유기농 식품코너를 발견했다. 아이가 먹을 과자와 사탕을 몇 개 샀다. 그리고 이 코너가 더욱 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대형할인점에서도 이젠 소비자가 요구하면 유기농 코너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소비자로서 우리들의 권리를 유기농 제품을 요구하는 투표로서 행사하는 일이 희망이 된다. 사랑과 생명을 배반했던 입이 다시 희망의 노래를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제인 구달 박사가 전하는 메세지이다.

  내 마음을 싣고 갔던 바람 한 점이 다시 나를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나는 묵을 파는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래된 과거의 희미하지만 따뜻한 기억 속에 우리 희망의 미래가 놓여져 있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생명을 파괴하지 않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그리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우리의 미래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손을 잡고 따라온 시윤이의 해맑은 웃음과 그의 아장걸음에서 나는 이 세대에게 우리들이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 무엇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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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6-01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제일 못 믿을 것이 인간이겠지요.
인간의 밥상에서 울부짖는 울음을 반성하잔 뜻이겠습니다.
이책 읽어봐아겠군요.

달팽이 2006-06-0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밥상위의 울부짖음..

파란여우 2006-06-02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한 책 내용이라 구독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뻔한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삶이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 문제에 단골출연자인 거대 자본의 폭력.
그런데 소비자가 행할 수 있는 대안말고 좀 더 적극적인 그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이나 결의 같은 것으로 그치는 것 말고
견제하고 극복하는 적극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여겨요
이 책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식의 정보로 얻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이 무엇일까...다시 숙제가 되는군요

달팽이 2007-04-05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시원한 대안이 있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서로의 인과관계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지고 있어 쉽게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시원하게 내린 대안일수록 머리속의 공상일 경우가 많고
적극적이고 결단적인 정치적인 대안은 그것을 가로막는 사람들의 욕망들로 저지되고요...
우리 마음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길이 느리지만 확실하고도 되돌려지지 않는 길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제가 너무 개인적이어서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무위당 선생님은 이 경우 어떻게 답했을까요?
한살림운동을 하시는 무위당 선생님 자신은 유기농 식품을 가려서 드시지 않고
주어지는 대로 잡수셨는데요...
주위 사람들이 왜 이런 걸 잡수시느냐고 묻자, 세상천지가 다 오염되었는데..
나만 좋은 것 먹어서야 되겠나? 하고 말씀하셨거든요...
물론 세상을 친환경적, 친생명적으로 바꾸어내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내가 음식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삼으셨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해월 선생님이 밥 한 알의 의미를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공부로 삼았던 것처럼요..

어둔이님은 저에게 이 책과 관련하여 사찰에서 식사 때 하는 오관게를 들려주었습니다.

1, 이 음식이 어디서 왔읍니까?

2, 제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습니다.

3,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4,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아

5, 진리를 실현하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비자림 2006-06-0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저도 오래전부터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에요. 그래서 생협을 이용하고 가능하면 인스턴트 식품을 안 사먹고 과자나 아이스크림은 웬만해선 안 사주고..하지만 거대 기업, 거대 자본의 영향 아래 자유롭기가 힘든 세상인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의 음식문화로 인한 유혹도 많구요..

달팽이 2006-06-0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군요. 비자림님..
저도 물론 예전에 이런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지만...
내 삶에서 실천하려는 의지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힘이 약해서...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조금은 가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철저하게 실천할 수 없을 듯 합니다.

2006-06-13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6-1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님의 서재는 들락거렸는데요..
우리 아이가 좀 더 크면 선생님의 서재를 유용하게 들락거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두 분 다 배꽃같은 님이군요..
어제 달빛이 아주 좋더군요...

징검다리 2007-01-2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음식은 몸집을 만드는 벽돌과 같습니다.
잘 지어진 집은 유지 보수가 쉽지만 한 번 잘못 지어진 집은 고치기가 너무나 힘들지요.
우리 아이들의 몸집을 키우고 만들어 가는데 잘못된 벽돌을 쓸 수는 없지요.
불량 벽돌과 같은 농약과 비료(성장호몬제)로 만들어진(?) 먹거리로 지어진 우리 아이들의 몸집이 걱정되는 세태입니다.
유기농을 선택하는 나의 손길이 희망의 미래를 투표하는 소비자의 힘이라는 것에 동의를 보냅니다.
 
브레인 스토리 - 뇌는 어떻게 감정과 의식을 만들어낼까?
수전 그린필드 지음, 정병선 옮김, 김종성 감수 / 지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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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의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힌다. 이 때 통각과 시각에 의해 처리된 정보들이 혈관을 타고 뇌로 들어간다. 들어간 뇌에서 뉴런들은 수상돌기를 통해 세포체로 다시 세포체에서 수상돌기를 통해 다음 표적 뉴런으로 전달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아야'하고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들은 순식간에 일어나게 되고 우리는 아픔을 느끼는 것이 뇌인지 마음인지 구분할 수도 없을 정도의 실시간의 상황에서 무릎을 비벼되게 된다. 하지만 통증을 느끼는 그 부위는 시간이 몇 초 흐르면 서서히 고통이 걷히고 다시 일상의 평온한 시간들로 돌아가게 된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을 보고 느끼고 희노애락을 처리하는 인간존재의 압축판인 '뇌'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존재의 비밀의 문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 비밀의 문을 지나 뇌의 제국을 모두 답사하고 출구를 통해서 나온 우리들은 더욱 큰 의문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런데 도대체 인간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뇌의 자극과 반응에 따라서 우리들의 의식은 결정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표면의식 아래 자리한 잠재의식에 따라 뇌는 반응하는 것인가? 수많은 의문들을 간직한 채 적어도 우리들은 이전의 잘못된 몇 가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사고와 감정 그리고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어떤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전두엽이 손상된 사람에게서 종합적이고 창조력이 사라지고, 해마가 손실된 사람에게서는 기억력의 장애를 볼 수 있다. 시상하부가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서는 정서적인 이상반응이 나타나고 도파민이 문제가 되어 알츠하이머와 파킨슨 병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런 이상반응의 원인을 특정 뇌의 한 부분으로 원인지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기관이고 드러나는 결과일 뿐,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뇌활동은 늘 뇌의 여러 기관들이 통합적으로 사용되면서 나타나고 때로는 손실된 부분의 기능을 다른 영역이 수행하고 있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우울증이라든지 운동기능의 저하와 평형감각의 상실 등과 같은 어떤 문제들은 '치료제'를 사용함으로써 눈에 띄는 효과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문제행동의 결과 드러난 뇌구성 및 호르몬의 이상상태를 사후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일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의 문제행동과 이상증세에 대한 뇌의 비밀은 풀리지 않고 있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쉽게 그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탐구과정을 통해 인간존재의 비밀에 대한 새로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물질적이고 세포적인 분석과 이해는 늘 원인을 묻게 하고 그 원인을 만드는 또 다른 원인을 묻게 한다. 이런 과정은 끊임없는 의문의 행렬들만은 무수하게 만들어낼런지도 모른다. 왜 인간은 다른 어떤 생명체와도 다른 뇌구조와 기능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유전자였을까? "나방은 수킬로미터 떨어진 암컷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천적이 존재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가야 하는 나방의 의지와 마음이 그런 코를 만들게 된 이유가 아닐까?"

  이러한 뇌의 구조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인간은 이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우연적이면서도 가벼이 흘려보낼 수 없는 우리의 인생 앞에서 우리들은 삶의 의미와 이유를 묻는다. 어제와도 똑같은 해가 뜨고 어제와도 같은 사람들의 얼굴을 대하면서도 우리들의 마음은 미세하고도 수많은 색채와 빛깔을 드러내고 이 모든 밀물처럼 생겼다가 썰물처럼 사라지는 감정과 생각들을 통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왜 뇌의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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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5-28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물과 썰물같은 감정...
제가 읽은 어느 책에서는 심장이 감정의 80%이상을 지배한다고 하더군요
역시 그 대목에 동의를 합니다.
뇌보다 심장의 지배를 받지만 뇌로 먼저 움직이는 현실,
저 오늘 누군가를 열심히 욕해줬답니다.
저녁에는 심장이 묵직해져오더군요
잘못된 뇌의 활동으로 심장에 부담을 느끼다니...
에이, 이 말이 아니고요.
달팽이 한 마리 살포시 두고 간다고요^^



 

 

 

 

 

 

 

사진을 클릭하면 커져요^^


달팽이 2006-05-27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랫만에 여우님의 저 파란 빛깔을 보니
가슴이 환해지는군요..
어디 다니시는건지...아님 염소들 보는 일에 몰두하신건지...,
비오는 주말에..
지렁이도 달팽이도 기쁜 하루입니다.
 
90%가 하류로 전락한다 - 한 일본 지식인이 전하는 양극화의 미래
후지이 겐키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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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회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분석들이 우리 사회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좀 더 정리해보고픈 마음이 생겨서 바로 읽어나갔다. 세상의 흐름으로서의 자본의 세계화와 글로벌화는 일본사회든 미국 사회든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선진국에서 기존의 중산층이라고 불리우던 계층의 소멸과 소수의 상류층과 대다수의 하류층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하류가 90%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에서 하류층들은 기존의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인 관계로부터 소외당한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버려진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적으로만 바라본 하류사회이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지구가 가지고 있는 자연조절능력을 무시하고 개발이라는 맹목적인 목적앞에 복종해왔다. 결과 환경은 더이상 인류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고, 자원은 더욱 고갈되고 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얘기했듯이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가?"라는 질문은 "제로성장을 인류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더 이상의 생존은 없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국처럼 세계 5%의 인구가 인류 전체의 에너지 25%를 소비하는 소수의 상류층으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나는 차라리 물질적 소비를 줄이고 의식과 영혼의 성장을 추구하는 자발적 하류층이 되겠다. 90%의 하류층이 왜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하다고 해서 불행해야 하는가? 인간사회는 이미 절대적인 빈곤을 오래전에 극복해왔다. 문제는 상대적인 박탈감이다. 왜 남들의 삶을 늘 비교해서 외부에서 삶의 행복을 찾아야만 하는가?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내가 아니던가?

  이 책의 저자는 하류사회의 저자와는 다른 결론을 내린다. 하류사회의 저자는 다시 광범위한 중산층을 사회적, 제도적으로 양산해내는 대안들이 필요하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그 방법은 결국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운 생활을 할 때 인간은 행복하다는 말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양극화를 세계적인 대세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일본의 닫힌 양극화 현상이 아니라 미국식의 열린 양극화 현상을 주장한다. 미국은 일본과 달리 상류층의 부의 사회적 환원과 기부문화가 정착되어 있으며, 빈곤층을 위한 대학 진학을 위한 장학금 제도가 잘 마련되어 상류층으로의 계층이동에 커다란 장애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은 하류층의 상류층으로의 이동이 거의 폐쇄된 양극화라서 더욱 문제가 된다고 한다.

  저자의 미국 생활이 미국의 양극화 현상을 보다 좋게 본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제레미 리프킨에 의하면 미국만큼 빈부의 격차가 극대화되고 하류층과 흑인들의 삶이 피폐해진 나라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대부분은 물질적인 조건과 경제적인 조건이 인간의 행복과 사회적 정의를 결정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조건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요인은 물질적인 풍요와 정신적인 황폐함이 아니지 않은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욕구와 욕망을 줄여서 삶의 행복에 도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모색되었다. 아미쉬 공동체,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자연적인 삶, 소로우와 에머슨의 자연적 삶과 영성,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영성과 각종 종교들은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모색의 결과 찾아진 길들이다. 이 길의 모색에서는 기존의 가족관계, 사회 관계, 제도와 법들이 모두 문화적인 산물임을 인정하고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로 인식한다.

  상류층이 못 되서 불행한가? 결혼을 못 해서 불행한가? 좋은 집과 차가 없어서 불행한가? 문제는 물질과 조건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이며 내 인생의 가치 추구와 상관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이중성을 동시에 가진다. 그것을 인류 발전의 기회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 대한 적대감에 바탕한 투쟁으로 우리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채울 것인지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나는 상류층이 부럽지 않다. 오히려 불쌍한 사람들이 아닌가? 성과주의에서 돋보인 그들이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좋은 차와 편안한 집을 얻기 위해 일생동안 일에 쫓겨 사는 것이 행복한가?

  삶의 마지막 순간 과연 그들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욕구를 줄인 간소한 경제생활과 풍요로운 정신적 생활을 추구하는 자발적인 하류층이 되겠다. 그것이 저자가 바라보는 미래세계와는 다른 내가 꿈꾸는 희망적인 하류사회의 밑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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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6-05-19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_()_

달팽이 2006-05-19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내리는 오늘 좋군요..

2006-05-19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5-1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알고 있는 책이었습니다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던 책입니다.
감사히 받아보겠습니다.

시베리아도서관 2006-05-2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한 신념을 갖고 끝까지 살아가면 좋겠죠. 상대적인 박탈감이라는 게 있는 것 또한 현실이 아닐까요? 하류사회에 나온 바, 스스로 하류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왠지 개성있고 즐거워 보이지만,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다른 계층에 비해 가장 낮은 이유는 뭘까요? 마냥 '하류가 좋아'라는 식이 사고는 계층의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할 것이고, 사회문제를 낳을 것입니다. 나아가 자발적 하류라 해도 그들을 역으로 상업적으로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게 자본주의의 현실이 아닌지. 문제는 늘어만 가는 하류계층이 난 '이대로가 좋아'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류계층의 부를 축적해주는 수단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무인도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지 않는 이상, 이른바 '자발적 하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거나 사회에 무책임한 건 아닌지. 그렇다고 모두가 중류, 상류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는 없죠. 정말 극소수의 신념을 갖고 로하스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층 사회에서 추락한 대부분의 하류는 더욱 추락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나름대로 먹고 살만 하지만 나중에는 가난에 허덕일 때가 오지요. 돈을 벌어 중류가 되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적어도 하류를 즐길 만한 능력의 하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유지하는 것만해도 쉽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진정한 하류가 아니죠. 그들에겐 의욕이 있으니까. 이른바 '하류사회'가 문제 삼는 하류는 의욕상실자입니다. 그들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 중언부언했지만 '하류'를 조금 긍정적으로 보셔서 제 생각을 올렸습니다. 결론은 책에서 말하는 '하류'는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점입니다.

달팽이 2006-05-24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인간의 역사는 늘 계급사회로 점철된 역사였습니다.
인간사회가 조직과 국가를 구성한 후에, 잉여생산물이 생기면서 비노동계급이 존재하면서부터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지향한 국가에서도 당 고위간부와 하류계급간의 생활격차는 심했습니다.
앞으로도 완전하게 평등한 사회는 힘들것입니다. 물론 노력은 해야겠죠..
하지만 무엇보다 우선 저의 문제의식은 지금처럼의 미국식 자본주의로의 필요이상의 소비와 새로운 필요의 창출이라고 하는 경제구조로서는 지속가능한 삶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던질때 결국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된 의지가 씨앗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류사회에서 저자가 의도한 밑그림을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책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읽어야 하고 스스로의 실천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왜? 읽는 사람 모두의 생각이 같아야 합니까? 정해져야 합니까?
그렇게 추락하는 하류사회의 깊은 고뇌와 그늘을 제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경제체제가 바뀌어야 하지요...
하지만 지금의 경제체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우리들의 내면의 욕망과 이기심입니다.
바로 나의 그리고 당신의 욕망과 이기심 말이죠...
나는 좀 풍요롭고 잘 살고 싶다는 이기심과 욕망 말이죠...
그것은 우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할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제도를 바꾸어놓아도 결국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을 착취하여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망을 우리들의 똑같은 이기심과 욕망이 받쳐주기 때문입니다.
화폐(자본으로서의 화폐)란 실체하는 것이라기 보다 우리들의 이기심과 욕망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환상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이미지와 환상에 아무런 욕망과 이기심을 싣지 않게 될 때
화폐는 그저 유통 수단에 불과한 존재일 것입니다.
아니 다른 유통 수단으로 바뀌겠죠...
님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상대적 박탈감이 과연 우리 내면의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먼저 들여다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분배의 평등이란 우리 마음 속에 남과 더불어 나누고 함께 행복하려는 순수한 마음이 지배적일 때 그리고 그 마음의 빈탕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류사회 - 새로운 계층집단의 출현
미우라 아츠시 지음, 이화성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서양에서 시작된 포디즘의 도입과 인간의 기계화와 도구화로 단순작업의 형태는 보다 널리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뒤이은 세계화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으로 부의 편중 및 소득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서양에서도 양극화의 진행에 대한 대안으로 일본식의 종신고용제나 사주제 등의 기업 형태가 제시되기도 한 것이 겨우 2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일본 역시 양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조사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1억 인구가 중산층이라 불리우던 일본사회, 그 사회를 안정감있게 받쳐주던 중산층의 급속한 몰락과 하류화 현상은 자본의 세계화로부터 인류가 갈 수 있는 미래상이 어떤지 그려준다.

  계층화로 인해 처음 드러나게 되는 것은 소비층의 분열이다.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상품을 팔려고 했던 기업들은 하나같이 매출의 감소에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그것은 소비층에 맞는 새로운 상품의 개발과 소비전략이 부재한 탓이다. 보다 상류층에게는 더욱 차별화되고 고급화된 상품을 하류층으로 몰락한 사람들에겐 더욱 저렴하고 실속있는 상품을 개발해서 팔아야 하는 양극화 상품시대가 된 것이다. 다음은 독신자 수의 증가이다.  몰락하는 중산층들에게 있어 결혼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일본에서는 300만엔 이상을 벌지않으면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경제력을 갖지 못한다. 또한 남녀가 만날 기회도 부족해졌다. 가상세계의 활동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현실 공간에서의 만남은 더욱 협소해지고 고착화되어버린다. 그래서 2-30대 여성과 남성의 결혼율은 50 이내로 떨어지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여성들의 사회진출도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다. 이젠 여성도 능력과 실력에 따라 전문적인 고소득 직종에 종사할 수 있게 되고, 전문직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나머지 여성들의 하류화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젠 남자를 잘 만나 자신의 행복을 찾는 여성들의 비중이 더욱 줄어들고 있고, 전문직 고소득 여성들이 그와같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는 신세대 상류층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간에 누리는 문화가 비슷하고, 사고와 대화가 동질적이며, 서로간에 대한 이해도 높다. 주로 30대에 들어서서 결혼하여 아이들을 가지게 되고, 여행과 골프, 스포츠와 독서 등 광범위한 취미활동과 자아실현을 위한 투자에 적극적이다.

  하지만 빛이 밝으면 어둠도 더욱 짙어지는 법! 그들의 그늘에 서 있는 대다수의 여성들의 삶은 피곤하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나와 슬럼가에서 같은 계층의 남자를 만나 덜컥 임신을 해서 결혼을 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은 카마야츠나 가류계 여성들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중산층으로의 삶을 꿈꾸기는 하지만 이젠 자신들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와 노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면서 300만엔 이하의 연봉으로서는 결혼을 꿈꾸지도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으며 혼자있는 시간을 즐겨하고 컴퓨터나 오락게임을 즐겨하며 소일한다. 나만의 개성을 찾으려고 하는 데에는 사교적인 만남이나 교류를 하기엔 그들이 가진 것이 너무 없다는 이유로해서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비정규직에 종사하며 간단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의 진정한 문제는 그들이 하류층으로 전락했다는 사실보다는 더 이상 그들이 중산층으로 진입하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짓는 것은 의지의 부족여부이다. 상류층은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자신감에 넘쳐 있으며 의욕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의 차이는 다시 양극화현상을 더욱 심화된 형태로 재생산해낸다.

  그렇다면 급속화되고 있는 양극화과정에서 90%에 달하는 하류층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구조개혁의 의지를 가지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이러한 의지도 부족한 것이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그것을 주어진 한도에서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가족관계에 매이지 않는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삶, 직장에 평생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관심과 직장을 옮길 수 있는 유목적인 삶, 삶의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동적인 측면도 동시에 가지는 것일까?

  미우라 아츠시는 이러한 하류층이 꿈을 가지고 사는 것은 이전처럼 보다 많은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국가는 이를 위해 필요한 제도적 장치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경대나 교토대에 하류층 자녀의 일정수를 배정하는 것이라든지 가산점 제도를 마련한다든지, 지방 학생의 대도시 대학 진학시 학비와 생활비를 제공해야 한다든지, 인터넷 수업화를 통해 지방대생이 좋은 강좌를 수강할 수 있게 한다든지 등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 중산층으로의 편입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보여주고 있듯이 하류층을 대량 양산해내는 원인이 의식의 하류화에서 비롯되었듯이 하류층의 생활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세계는 너무나도 물질적인 삶에 치우쳐있다. 그래서 부가 없거나 소득이 적으면 행복한 삶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최소한의 물질적인 조건의 충족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도 중요하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마음에 있다. 물질적 삶의 과소를 떠나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행복한 삶으로 바꾸어낼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이 책이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 바로 그 부분이 아닐까?

  90%의 사람들이 하류층이 된다면 주어진 형식적인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가 그 사회를 유지시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류층에게 보이듯이 그것이 어느 정도의 자발성을 갖추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속도의 삶과 소유의 삶을 자발적으로 버린 삶을 가진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화가 가능하다면 말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전의 획일적이고 형식적인 삶에 찌들린 경험들을 회피하는지도 모른다. 영혼은 그런 이전의 경험에서부터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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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5-17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질적 토대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물론 전적이지는 않겠지만 말이죠.하류층이 하류의식에 젖어서 하류인생을 산다는 말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왜 그들이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에 대한.. 사회구조적 장벽에 대해 생각해야만 합니다.비정규직의 단 1%만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사회입니다.비정규직은 하류인생을 살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아이들 교육에도 영향을 미칩니다.가난이 대를 이어가지요.마음만 편하게 먹고 다 잊으라...후..우리 삶이 물질 중심주의적이므로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다 접고 행복을 마음 안에서 찾으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결국 마음 공부는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은 접고 마음속으로 행복을 찾는 거로 끝나고 마는군요.미우라 아츠시는 왜 하류층이 꿈꾸기를 포기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보입니다.그저 개인적인 능력부족 의지 부족으로 처리하는것은 절망적일 만큼 미우라씨의 빈약한 공부때문입니다.또한 마음 공부가 현실에 발을 딛지 않고 이어온 것이라면 사상누각일 뿐입니다.....후.....그렇게 얻는 진리라면 그게 견성이든 하늘의 도이든 버려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달팽이 2006-05-17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질적 삶의 개선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물질적 삶의 개선이 완전히 이루어지기 위한 노력만으로 나에게 주어진 세상의 의미가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님처럼 사회적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일에 종사하면 되지요.
아니면 의식적으로라도 정치적인 지향점을 가지면 되지요..
저도 그런 정치의식을 가지는 것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사회구조나 사회의 변화가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수용하며 살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자본의 횡포인줄 알면서도 자동차도 타야하고 할인마트도 가야하고
대기업이 제공하는 아파트에서도 살아야 하고...
삶의 힘이 있어 그것을 모두 거부하는 자연적이고 평등한 삶이 있다면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개인적인 삶이지만 대안적 삶의 본보기가 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사회적 평등이 단순히 가진 자들의 것을 빼앗아 내가 잘 살려고 하는 이기심이나 집단 이기주의에서 기반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공부도 필요하고요...
님이 제 글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나로서는 가슴아픈 일입니다.

2006-05-18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love 2006-05-1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는 어린사람입니다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하류의 본질은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아직은 적용하기가 이른 것 같아요. "일본의 베이비붐 열풍을 타고 풍요 속에 자라난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 이라는 책의 설명으로 봐서는 풍요 속에서 하류인생이 되길 선택-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한 사람들의 이야기 인것 같습니다. 드팀전님 말씀대로 우리나라는 하류층의 형성을 개개인의 하류의식으로만 돌리기에는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구조적인 문제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도 얼마 있지 않아 곧 저런 젊은이들이 속출하고 하류의식이 하류인생을 이끌에 낼 것이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 주변만 봐도 단순히 공부하기가 싫다고 대학교를 자퇴하거나, 정말 인터넷만 벗삼아 지내고, 아무것도 하지않고 부모님 돈으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달팽이 2006-05-18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님의 공감이 힘이 되네요..
미니러브님, 우리나라도 그 추세로 본다면 이미 진행되었고(비정규직화와 노동유연성으로 그리고 젊은 층의 대량 실업문제로), 앞으로 10년 정도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회현상이나 경제현상을 설명할 때 우리는 앞으로의 방향이나 추세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이 현실을 더욱 크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현실보다 현실인식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하류인생을 지향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것이 단순히 개인으로 내던져진 외톨이로서가 아니라 같은 문화와 같은 의식을 지향하는 공동체로서 우리 세계적 삶의 흐름의 대안을 생각해보는 노력도 필요하겠지요...
누군가가 말하는 부족공동체라는 개념을 끌어들일 수도 있겠구요...
그럴 때 도래하는 하류사회는 나에게서 새로운 삶으로 펼쳐지겠지요...
내 마음이 펼쳐져서 이루어지는 나의 세상이 되죠..
세상의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되며 그 나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제겐...
 
아홉 마당으로 풀어 쓴 선
심재룡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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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서 붓다가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다음 그가 설했던 초기의 설법들은 원시불교의 내용을 이루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원시불교는 중국으로 티벳으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산스크리트어로서 된 경전으로 전래되면서 새로운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미 도교나 유교 등의 제자백가에 의한 깨달음과 수행을 일상화시킨 문화가 존재해왔고, 이러한 문화적 배경하에서 달마에 의해서 새롭게 부흥된 깨달음의 길인 선불교가 혁명적으로 제시되었다. 경전과 학문 공부에서부터 비롯된 불교공부가 '선'이라고 하는 활발자재하고도 직접적인 방법으로서 사람들에게 제시되었던 것이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바위 틈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풀 한포기를 완전히 알게 되면 이 세상과 나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전체 속에 부분이 들어있고, 부분 속에도 전체가 들어 있다는 불교적 세계관 속에서는 참된 진리가 현현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참된 진리가 현현해 있는 어떤 대상 속에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선사들의 불교의 핵심을 묻는 대답도 천차만별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 막대기" "손가락을 치켜 드는 행동"이라든지 "할"하는 소리나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 "신발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는 것"이라든지 "세계일화" 등 등 상식과 언어적이고 논리적인 세계를 떠난 펄펄 살아 있는 선의 언어가 보여진다.

  어떤 말을 하든지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참된 진리의 마음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 속에서 우리는 밤을 새워야 한다. 세상은 그대로 여여한 진리인데, 그러면 세상 그대로 의문이 필요없는 답만이 있는 세상인데 미혹한 우리들은 스스로 의문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어찌하겠나? 스스로 만든 의문을 스스로 없애는 수밖에...그것은 의문을 언어적 논리적으로 다루어본 다음에 더 이상 이런 방법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방향을 바꾸게 되고 선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이다.

  선은 옛날에는 근기있고 재능이 있는 제자들을 선사가 알아보고 그들을 지도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또한 선사들은 매우 엄격하고 냉정하게 그들을 대했다. 따라서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자신의 본바탕을 보아내고 그들은 대담하고 파격적이고 힘있는 선을 토했다. 그만큼 선은 자신의 깨달음을 이루는데 절실했고, 또한 스승의 귀함도 알았기 때문에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 빨리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선불교가 대중화되면서 예전과 같은 파격적이고 천지를 가르는 힘은 줄어들었다. 그만큼 부드럽고 쉽게 일반화된 선적인 이해가 보다 근기낮고 우둔한 대중들을 대상으로 자상하게 제시되고 있다. 덕분에 근기 낮고 어둔 내가 선의 자세한 가르침에 따라 조금씩 마음을 닦아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하근기의 내가 더디게 더디게 하는 공부에 큰 진전이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요즈음 요구되고 있는 선의 대중화에 따라 사람들이 예전에는 그저 자신의 복덕을 위한 불교에의 귀의나 시주, 믿음을 가졌던 것이 이젠 직접 부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좌선과 명상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불교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위해서 '공안'을 주로 사용한다. 선사가 그의 제자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선의 도구로 상식을 초월하고 논리를 초월한 화두로서 제자의 마음 속에 큰 의문을 일으켜서 마음이 일어나는 에너지를 한 곳에 모아서 깊은 빈탕의 체험을 유도한다. 공안을 마음으로 녹혀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그 공안 앞에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마음없는 한 점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무르익었을 때 그 한 점의 마음조차 타파되고 공안은 풀리는 것이다.

  이제 언어적으로 이러한 선에 대한 이해가 되고 있는 나를 알게 된다. 따라서 공부의 방향이 지식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 속의 체험이다. 지식적 이해가 때로는 나의 참된 공부를 방해한다는 느낌도 들게 된다. 책을 들 때 그 책을 관통하여 내 마음의 상태를 짚어 보고 그 저자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계속 마음을 놓치 않고 매진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선의 나침반을 돌아서 세상에 다시 태어난 날이 나에게도 반드시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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