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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가 하류로 전락한다 - 한 일본 지식인이 전하는 양극화의 미래
후지이 겐키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일본 사회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분석들이 우리 사회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좀 더 정리해보고픈 마음이 생겨서 바로 읽어나갔다. 세상의 흐름으로서의 자본의 세계화와 글로벌화는 일본사회든 미국 사회든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선진국에서 기존의 중산층이라고 불리우던 계층의 소멸과 소수의 상류층과 대다수의 하류층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하류가 90%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에서 하류층들은 기존의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인 관계로부터 소외당한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버려진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적으로만 바라본 하류사회이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지구가 가지고 있는 자연조절능력을 무시하고 개발이라는 맹목적인 목적앞에 복종해왔다. 결과 환경은 더이상 인류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고, 자원은 더욱 고갈되고 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얘기했듯이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가?"라는 질문은 "제로성장을 인류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더 이상의 생존은 없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국처럼 세계 5%의 인구가 인류 전체의 에너지 25%를 소비하는 소수의 상류층으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나는 차라리 물질적 소비를 줄이고 의식과 영혼의 성장을 추구하는 자발적 하류층이 되겠다. 90%의 하류층이 왜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하다고 해서 불행해야 하는가? 인간사회는 이미 절대적인 빈곤을 오래전에 극복해왔다. 문제는 상대적인 박탈감이다. 왜 남들의 삶을 늘 비교해서 외부에서 삶의 행복을 찾아야만 하는가?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내가 아니던가?
이 책의 저자는 하류사회의 저자와는 다른 결론을 내린다. 하류사회의 저자는 다시 광범위한 중산층을 사회적, 제도적으로 양산해내는 대안들이 필요하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그 방법은 결국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운 생활을 할 때 인간은 행복하다는 말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양극화를 세계적인 대세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일본의 닫힌 양극화 현상이 아니라 미국식의 열린 양극화 현상을 주장한다. 미국은 일본과 달리 상류층의 부의 사회적 환원과 기부문화가 정착되어 있으며, 빈곤층을 위한 대학 진학을 위한 장학금 제도가 잘 마련되어 상류층으로의 계층이동에 커다란 장애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은 하류층의 상류층으로의 이동이 거의 폐쇄된 양극화라서 더욱 문제가 된다고 한다.
저자의 미국 생활이 미국의 양극화 현상을 보다 좋게 본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제레미 리프킨에 의하면 미국만큼 빈부의 격차가 극대화되고 하류층과 흑인들의 삶이 피폐해진 나라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대부분은 물질적인 조건과 경제적인 조건이 인간의 행복과 사회적 정의를 결정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조건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요인은 물질적인 풍요와 정신적인 황폐함이 아니지 않은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욕구와 욕망을 줄여서 삶의 행복에 도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모색되었다. 아미쉬 공동체,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자연적인 삶, 소로우와 에머슨의 자연적 삶과 영성,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영성과 각종 종교들은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모색의 결과 찾아진 길들이다. 이 길의 모색에서는 기존의 가족관계, 사회 관계, 제도와 법들이 모두 문화적인 산물임을 인정하고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로 인식한다.
상류층이 못 되서 불행한가? 결혼을 못 해서 불행한가? 좋은 집과 차가 없어서 불행한가? 문제는 물질과 조건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이며 내 인생의 가치 추구와 상관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이중성을 동시에 가진다. 그것을 인류 발전의 기회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 대한 적대감에 바탕한 투쟁으로 우리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채울 것인지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나는 상류층이 부럽지 않다. 오히려 불쌍한 사람들이 아닌가? 성과주의에서 돋보인 그들이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좋은 차와 편안한 집을 얻기 위해 일생동안 일에 쫓겨 사는 것이 행복한가?
삶의 마지막 순간 과연 그들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욕구를 줄인 간소한 경제생활과 풍요로운 정신적 생활을 추구하는 자발적인 하류층이 되겠다. 그것이 저자가 바라보는 미래세계와는 다른 내가 꿈꾸는 희망적인 하류사회의 밑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