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 이어령 라이브러리 8
이어령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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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책을 읽는 중 작은 마을 도서관을 찾았다가 우연히 손에 잡힌 책이다. 이어령 선생님은 글을 어떤 식으로 쓰는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고 바로 읽어나갔다. 언어의 대가답게 테마를 잡는 것에서부터 그 말의 어원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말을 뒤집어보고 반대되는 상황에서의 예를 들어보고  이것 저것을 건드리면서도 글이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선명한 궤적을 내고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짧은 글 하나가 치밀하게 구성된 하지만 전혀 인위적이지 않은 하나의 작품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글을 쓰는 데에도 이런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구나! 글의 천재, 언어의 천재라고 불리우는 이어령 선생님도 그 말 뒤에 보이지 않는 이토록 많은 자료 조사와 꼼꼼한 구성과 노력들이 있었구나! 글의 구석구석에서 그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 타고난 작가는 없구나. 비록 적성과 재능을 타고났다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노력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글쓰기의 재능과 기법을 떠나 그의 글에 대한 정성과 마음을 먼저 배워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말 중에는 우리가 잘못 알고 쓰는 말도 있고, 그 말이 변하고 변해 처음 쓰이던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말도 있다. 이런 말들을 그 말의 어원과 국어에 대한 바른 의미를 통해서 보다 깊은 의미를 도출해내고 우리들에게 삶의 교훈을 주도록 지혜를 이끌어내는 방법이 그토록 탁월하나니...두 세장 분량의 글을 쓰기 위해 선생님이 조사하고 정리하였을 많은 자료들과 그것을 구성해서 어떤 체계를 만들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마음이 절절이 느껴진다. 그 동안 내가 너무 함부로 써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낱말 하나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정확한 의미와 그 사용법을 익혀서 쓰는 선생님의 자세를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선생님처럼 정확히 또 깊이 이해하지는 몰라도 조금씩이라도 노력은 하고 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것이 이렇게 빈틈없이 그리고 잘 된 글을 사용하는 분을 글을 통해서나마 알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 글을 읽고 감동하는 독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말의 의미에 따른 사용에서 보여지는 상반되고 이중적인 해석은 우리들이 존재에 대한 깊은 의문을 가지게 한다. 선생님이 스스로 말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어머니의 부재에 대해 영원한 모성을 꿈꾸게 하였고 그것을 생물학적인 의미를 넘어서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어머니란 꿈과 이상으로 승화시켰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존재의 빈탕같은 탯줄의 언어로써 말 속에서 존재의 진실을 찾고자 했던 그의 의문이 삶을 더욱 깊게 하였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선생님의 책을 좀 더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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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이후 빨랫감 - 깨달음, 그 뒤의 이야기들
잭 콘필드 지음, 이균형 옮김 / 한문화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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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특정한 종교가 없든지. 그것을 영성이라 하든지, 아니면 삶의 의미와 전체적인 삶의 성숙을 원한다는 사람들은 결국 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형식적으로 수행이라든지 기도라든지 믿음을 가진다라던지 하는 모습은 달라도 말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의 성숙도와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긋나버린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얘기조차 하지 못한다면 미숙한 우리들은 과연 어느 곳으로 가야할 것인가? 하고 방황으로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깨달음 전과 이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과 신비체험이나 유체이탈, 트랜스, 접신과는 어떻게 다른가? 사실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한 각 종교의 차이와 심리학적인 또는 미신적인 또는 비과학적인 현상들은 제각각 다르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의 같은 경험으로 묶어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이런 체험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방향이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생의 특별한 경험과 체험을 통하여 삶의 의미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도 이런 관점에서 다양하게 접근해가고 있다.

깨달음은 내가 자아라는 것으로 구성되었다는 관념이 타파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자아라고 부르는 내가 있다는 환상이 깨지고 내가 전 우주적 존재와 일치되는 체험들을 말한다. 그것을 무아의 경험이라고도 하고 본성으로의 회귀라고도 하며 도니 신의 은총이니 등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지금 여기'로 아주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이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우선 그것은 깨달음의 과정이 일시적이거나 외부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내적 수련 과정을 거친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깨달음 이후라고 캔필드가 말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영적 지도자들은 최초의 견성 이후에도 여전히 두려움, 혼란, 영적 태도의 상실, 서투른 행위 등이 한동안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고 캔필드는 적고 있다. 물론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깨달은 것에도 과정이 있었고,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을 보면 90도 180도 270도 360도 수준의 깨달음이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깨달음은 천차만별의 차이이며 오로지 완전하고도 흠없는 깨달음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보면 온 종교와 영성을 뭉뚱그려 놓은 이 책은 그 점을 간과했다. 한 명상지도자의 말을 인용해보자.

"카톨릭과 불교 사원에서 여러 해를 지내고 나서 혼자서 장기간 흔거 수행을 하던 중에 설명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나는 신께서 나 자신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것을 보았다. 신은 광활한 대양과 같았고, 나 자신으로 익히 경험해온 모든 것은 한갓 얇은 막에 불과했다. 그것은 실체도 없이 수면에 떠다니다가는 사라져버렸다....... 이와 같은 깨달음과 함께 온 지복과 성스러운 열림이 몇 달 후에 지나가버리고 나자, 나는 깊은 무기력감과 두려움에 빠져버렸다. 그것은 지옥기간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곳을 떠나 청소부 일을 했다. 나는 후두염과 천식을 앓았다. 끝없는 내면의 고통과 상실감이 나를 절망감에 빠뜨려 놓아서, 나는 겉으로는 정상인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거의 자살 충동을 느끼거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한 라마승의 회고도 들어보자

"집으로 돌아오자 인도와 티베트에서 보낸 12년의 경험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서구의 가족과 일터로 돌아와서 겪는 문화적 충격 속에서 그 초월적인 경험들의 기억과 가치는 가물가물한 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낡은 습관들이 놀라울 정도로 빨리 돌아왔다. 나는 짜증이 나고 혼란스러워졌다. 몸을 돌보지 않고, 돈과 애인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상태가 나쁠 때는 내가 배운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 아닌가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지나간 깨달음의 기억 속에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영적 수행이란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그것임이 분명했다. 그밖의 모든 것은 환상이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도 옛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분노가 일때가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빨랫감들은 겉모습과는 달리 아주 다른 차원의 것이다. 명상지도자의 체험은 자신이 아마 처음 체험한 영적인 경험이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체화된 경험들이 없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라마승의 이야기는 자신의 12년의 수행이라고 하더라도 달라진 현실에서 바로 적응할 힘을 갖추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육화된 깨달음이 되지 못한 것은 그의  내적인 수행의 문제일수도 있다. 하지만 달라이라마의 분노는 ,물론 금방 자비와 연민으로 바뀌었지만, 자아에서 비롯된 분노가 아니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민족과 동포의 고통에 대한 연민에서 나온 분노...

물론 궁극적인 깨달음이 있는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모든 수행자와 종교지도자들 역시 깨달음의 길을 가고 있는 자인지도 모른다. 깨달은 자가 이르는 곳은 "지금 이 곳"이다.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 모두가 지켜야 하는 자리도 바로 여기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어떠한가? 머리를 굴리는가? 모를뿐인 마음으로 돌아가는가?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사는 것인가? 이 말에 대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다른 마음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외부의 완전성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내부로 돌아가라는 의미이다. 나는 이것이 외도와 정도를 구분하게 하는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믿음과 공부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서 자신의 본모습을 보게 만드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스승의 조언이나 도움도 값매길 수 없는 은혜이지만 자신 스스로의 탐색과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모습으로 권위로 맹목적 믿음으로 가면 스승도 필요하고 종교적 형식도 필요하고 그러다보면 의존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얻을 것이 없다. 바로 그런 생각이 자신의 공부를 그르치게 만든다. 따라서 이 책도 빨랫감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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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7-30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가에 놓고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는 책이지만
달팽이님이 이리 성찰 깊게 써 주시니 읽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책이 주인을 잘 만난것 같아 안심입니다^^

달팽이 2006-07-31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을 인연으로 만났던 책이 그래도 더운 여름날을
마냥 더위 속에 허덕이지 않게 해줍니다.
고맙습니다.

어둔이 2006-07-3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달음이후의 빨랫감은 다림질을 해야하고
다림질을 한 옷은 멋나게 입어야죠. 입고나서 더러워지면
또 빨아야하고 계절바뀌면 바꿔입어야죠. 근데 그옷을 누가 빨고 다리고 누가 입죠?

하루입어난땀냄새
벗어빨기잦은여름
손수비벼세탁한옷
햇살내음말려보네
새날되면입으려나
 
절, 그 언저리 - 김지하 수묵시화첩
김지하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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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 그가 먹을 간다. 독재 정권에 저항하면서 가슴끓는 분노와 열정을 젊은 피로써 써내던 펜을 놓고서 그가 먹을 간다. 민중운동의 밑불을 지피기 위해 분신했던 열사를 향해 생명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외쳤던 그가 이젠 인적 없는 어느 산중에서 댓잎에 바람스치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먹을 간다. 60인생을 훌쩍 넘기고서 다채롭고 치열했던 그의 삶을 단순화시켜 흑과 백 속에 자신을 담아내려고 그가 먹을 간다.


도덕경에 보면 玄은 ‘玄牝之門’이란 말에서 모든 만물이 생겨나는 암컷의 문이란 뜻으로 쓰인다. 만물이 생겨나는 자궁의 의미를 가진다. 자궁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나오고 다시 입 속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그 생명을 다하고 들어간다. 다석 류영모 선생님은 이를 ‘가물하다’라고 해서 해지고 어두워질 무렵의 어둑한 상황을 표현하였다. 가물가물한 그 곳에서 만물이 태동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호인 다석(많은 밤)에도 그런 의미가 들어있다고 한다.

 

그 현은 하얀 종이 위에 세상의 만물을 그려낸다. 눈 쌓인 초봄의 추위를 뚫고 매화를 피우기도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난초를 자라게도 한다. 또한 그런 자연 속에서 살아있는 생명의 빛을 드러내는 선사들을 빚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예전에 정열을 바쳤던 그런 세상은 찾을 수가 없다. 번잡하고 치열했던 그의 저항과 투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젠 그 일들을 후학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스스로의 생명 공부를 하고 싶은 것일까?


평화로운 듯 때로는 무표정한 듯 앉아 있는 승려의 마음은 고요하지 않다. 마음에선 시퍼런 칼날들이 서로 부딪히며 불꽃을 터뜨리고 있다. 달조차도 날카로워 첩첩의 산등성이를 베어내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찾기 위한 구도의 치열한 과정이 그의 마음에서 손끝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치열한 전장을 지나서 비로소 다다른 고향집에 핀 매화꽃이 아닌가?


그 매화 꽃 위로 한 점 봄나비되어 그는 나풀거리고 있다. 환상같은 인생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의 낮을 지나 차가운 바람이는 들녘의 저녁을 지나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칠흑같은 밤을 꼬박 새우고서야 다다른 또 다른 새벽에서 그는 몸의 무게를 잊어버린 듯 가볍게 이 꽃잎에서 저 꽃잎으로 훨~훨 날아다닌다. 그렇게 놀다가 다시 해질 무렵이 되면 빈 하늘 속으로 멀어져 한 점 되었다가 사라질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절 언저리에서 무엇을 찾고자 했을까? 산으로 난 숲길을 따라 그를 뒤밟아본다. 산의 푸르른 신록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콸콸하는 계곡 물소리가 눈 앞을 가로막고 선다.


꽃 禪院


추사가 썼다는

世界日花 祖宗六葉

낮은 문 좌우에


영산홍 한 그루

자산홍 또 한 그루

선원 마당에 맞절하네


내 왼쪽 분홍빛 뺨과

네 오른쪽 자줏빛 볼이


서로 웃음지어

맞부비어

山紅參禪 내리 하는 곳


육백년 古梅와

곁에 선 매화자손들 줄줄이

寒梅參禪하는 그 자리


호남 제일

꽃 선원


미소

꽃드는

자리,


오오

花史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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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7-29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도, 달팽이님의 리뷰 제목도 마음을 두드립니다.
玄의 먹이라니!^^

달팽이 2006-07-29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나쁜 의도가 뻔히 드러나는 FTA에서도 아마 긍정적인 면이 있을 것입니다.
님의 마음 속에 그것을 수용할 그릇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죽음을 그리다 -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주영 옮김 / 아고라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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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들고서 처음 눈에 띈 것은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이 기분 좋은 그림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과 삶을 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로 책을 펴들었다. 하지만 서양의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단상은 별로 재미가 없었고, 죽음의 몇 일간의 과정을 담은 얘기는 그들의 삶과 유리되어 펼쳐져서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책을 놓고 이렇게 혹평을 해서야 되겠냐만 적어도 죽음의 순간에 그들이 가졌던 생각들이 우리들의 삶에 어떤 메세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대하고는 너무 어긋나버린 이 책을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표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알맹이를 담지 못한 이 책을 그냥 넘겨버릴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조금의 단견이 있어 적어보기로 한다. 우선 이 책을 쓸 때 죽음의 과정 몇일간을 그릴 생각이었다면 그 죽음의 과정이 우리들에게 무언가 교훈과 메세지를 주는 죽음을 선택했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죽음의 순간은 생리학적으로 보면 심장의 박동이 영구히 정지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죽음을 놓고 사자가 내뱉는 마지막 언어는 그의 삶의 농축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삶이 지향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죽음에 대한 작가의 생각들만 이어진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엿볼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죽음에 대한 다른 문화를 가진 동양 작가들을 배제한 채 서양 작가들의 죽음만을 모아놓은 이 책이 상실한 균형감이 아쉽다.

  그들의 삶과는 유리되어 한 토막의 일반적인 죽음의 이야기로 전락해버린 이 책에서 쓸데없는 죽음의 몇 일을 그리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죽음의 목소리에 그들의 삶과 사상과 영혼을 불러들여서 그것을 죽음의 의미있는 말들과 연결시켰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그들의 삶을 찾게 하고 그들의 작품을 찾게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대부분 의미없는 말로 구성된 그들의 죽음에서 그들의 마음이 지향했던 바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작가의 몫은 그 양자를 이어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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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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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까지의 나의 글쓰기는 책을 덮은 직후 책을 읽은 느낌이나 생각의 흐름을 적어낸 것이었다. 글을 쓰고 난 후 다시 제대로 교정을 본다든지 내용을 다시 구성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글쓰기의 계획을 세운다든지 결론을 어떻게 낼 것인가에 대한 준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서 나의 리뷰를 글쓰기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나에게 있어 글쓰기는 읽은 책의 내용이나 느낌을 다시 정리해보는 계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바깥에서는 어떤 배움의 길도 없다.”고 했다. 사실 이제까지의 내 생각도 그러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가다듬어지는 생각들과 늘어가는 표현력이 스스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골드버그의 말은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던 어느 날, 리뷰를 쓰기 위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은 나는 멍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책을 방금 덮었지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리뷰를 써야지 하고 생각하며 좀 더 자리를 지켰지만 결국은 다른 책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미 글쓰기는 의무감이 되어 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짜내게 하는 강제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집을 지을 때 우리는 설계도가 필요함을 안다. 그리고 필요한 재료도 구입해야 하고 그 재료를 집의 구조에 맞게 제작해야 할 때도 있음을 안다. 필요한 인부를 고용해야 하고 될 수 있으면 숙련자를 구하는 것도 유념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의 테마가 정해지면 필요한 정보와 가공된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 글의 구성이 서론, 본론, 결론으로 짜여져 있어야 한다. 나아가 서론은 어떤 형식으로 구성하며, 본론은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계획해야 한다. 결론은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두어야 한다.

 

  이렇게 준비된 글쓰기는 아무 계획 없이 쓰는 글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집짓기에도 꼼꼼한 계획과 좋은 설계도와 뛰어난 기술이 편안하고 좋은 집을 만들어내듯이 잘 구성된 계획은 이미 좋은 글쓰기의 바탕을 마련한 것이 된다. 이 책은 이러한 글쓰기의 이론과 전략에 대해 우리가 좋은 준비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제까지의 나의 글쓰기를 둘러볼 때 가장 큰 반성이 바로 글쓰기의 전략 없이 즉흥적으로 써내려갔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준비 없이 지은 집으로 거친 비바람에 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집짓기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집짓는 날의 날씨와 인부의 수와 컨디션, 숙련도의 정도, 집짓는 기간도 많은 변수가 된다. 마찬가지로 글쓰는 사람의 심리적 요소(원고제출 마감기간), 그 날의 기분, 날씨, 글쓰는 이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 등이 변수가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글쓰는 순간의 그의 생각의 흐름과 마음의 흐름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우면 글도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듬는 것은 차후의 일이 된다.


  따라서 나는 다시 골드버그의 말로 돌아가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깊이 담아내고 책을 읽고 난 후 생긴 마음의 흐름을 잘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글로 옮기는 데에 구성력도 아이디어도 문장력도 필요하다. 글의 형식을 보다 문맥에 맞게 고치고 문단을 보다 적절하게 나누고 문장 간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하며 글 전체가 쉽고 재미있게 읽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책에 깊이 몰입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글은 항상 글쓴이의 마음에 그 비결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글쓴이가 세상을 보는 특별한 눈이며 세상을 담아내는 아름다운 가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쓰기의 기법과 방법이 그 가슴과 만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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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2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보는 특별한 눈, 세상을 담아내는 아름다운 가슴... 맘에 새기고 갑니다.^^ 거기에 잘 된 설계도 한 장을 가지고 말이죠..

파란여우 2006-07-2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하여 튀면 사치스럽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님의 글은 중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조율성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종종해요

달팽이 2006-07-25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께 도움될지 모르겠군요...
여우님의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는 달팽이 집 속으로 숨고만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