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후 빨랫감 - 깨달음, 그 뒤의 이야기들
잭 콘필드 지음, 이균형 옮김 / 한문화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특정한 종교가 없든지. 그것을 영성이라 하든지, 아니면 삶의 의미와 전체적인 삶의 성숙을 원한다는 사람들은 결국 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형식적으로 수행이라든지 기도라든지 믿음을 가진다라던지 하는 모습은 달라도 말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의 성숙도와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긋나버린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얘기조차 하지 못한다면 미숙한 우리들은 과연 어느 곳으로 가야할 것인가? 하고 방황으로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깨달음 전과 이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과 신비체험이나 유체이탈, 트랜스, 접신과는 어떻게 다른가? 사실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한 각 종교의 차이와 심리학적인 또는 미신적인 또는 비과학적인 현상들은 제각각 다르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의 같은 경험으로 묶어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이런 체험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방향이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생의 특별한 경험과 체험을 통하여 삶의 의미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도 이런 관점에서 다양하게 접근해가고 있다.

깨달음은 내가 자아라는 것으로 구성되었다는 관념이 타파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자아라고 부르는 내가 있다는 환상이 깨지고 내가 전 우주적 존재와 일치되는 체험들을 말한다. 그것을 무아의 경험이라고도 하고 본성으로의 회귀라고도 하며 도니 신의 은총이니 등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지금 여기'로 아주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이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우선 그것은 깨달음의 과정이 일시적이거나 외부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내적 수련 과정을 거친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깨달음 이후라고 캔필드가 말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영적 지도자들은 최초의 견성 이후에도 여전히 두려움, 혼란, 영적 태도의 상실, 서투른 행위 등이 한동안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고 캔필드는 적고 있다. 물론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깨달은 것에도 과정이 있었고,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을 보면 90도 180도 270도 360도 수준의 깨달음이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깨달음은 천차만별의 차이이며 오로지 완전하고도 흠없는 깨달음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보면 온 종교와 영성을 뭉뚱그려 놓은 이 책은 그 점을 간과했다. 한 명상지도자의 말을 인용해보자.

"카톨릭과 불교 사원에서 여러 해를 지내고 나서 혼자서 장기간 흔거 수행을 하던 중에 설명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나는 신께서 나 자신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것을 보았다. 신은 광활한 대양과 같았고, 나 자신으로 익히 경험해온 모든 것은 한갓 얇은 막에 불과했다. 그것은 실체도 없이 수면에 떠다니다가는 사라져버렸다....... 이와 같은 깨달음과 함께 온 지복과 성스러운 열림이 몇 달 후에 지나가버리고 나자, 나는 깊은 무기력감과 두려움에 빠져버렸다. 그것은 지옥기간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곳을 떠나 청소부 일을 했다. 나는 후두염과 천식을 앓았다. 끝없는 내면의 고통과 상실감이 나를 절망감에 빠뜨려 놓아서, 나는 겉으로는 정상인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거의 자살 충동을 느끼거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한 라마승의 회고도 들어보자

"집으로 돌아오자 인도와 티베트에서 보낸 12년의 경험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서구의 가족과 일터로 돌아와서 겪는 문화적 충격 속에서 그 초월적인 경험들의 기억과 가치는 가물가물한 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낡은 습관들이 놀라울 정도로 빨리 돌아왔다. 나는 짜증이 나고 혼란스러워졌다. 몸을 돌보지 않고, 돈과 애인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상태가 나쁠 때는 내가 배운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 아닌가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지나간 깨달음의 기억 속에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영적 수행이란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그것임이 분명했다. 그밖의 모든 것은 환상이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도 옛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분노가 일때가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빨랫감들은 겉모습과는 달리 아주 다른 차원의 것이다. 명상지도자의 체험은 자신이 아마 처음 체험한 영적인 경험이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체화된 경험들이 없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라마승의 이야기는 자신의 12년의 수행이라고 하더라도 달라진 현실에서 바로 적응할 힘을 갖추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육화된 깨달음이 되지 못한 것은 그의  내적인 수행의 문제일수도 있다. 하지만 달라이라마의 분노는 ,물론 금방 자비와 연민으로 바뀌었지만, 자아에서 비롯된 분노가 아니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민족과 동포의 고통에 대한 연민에서 나온 분노...

물론 궁극적인 깨달음이 있는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모든 수행자와 종교지도자들 역시 깨달음의 길을 가고 있는 자인지도 모른다. 깨달은 자가 이르는 곳은 "지금 이 곳"이다.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 모두가 지켜야 하는 자리도 바로 여기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어떠한가? 머리를 굴리는가? 모를뿐인 마음으로 돌아가는가?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사는 것인가? 이 말에 대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다른 마음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외부의 완전성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내부로 돌아가라는 의미이다. 나는 이것이 외도와 정도를 구분하게 하는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믿음과 공부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서 자신의 본모습을 보게 만드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스승의 조언이나 도움도 값매길 수 없는 은혜이지만 자신 스스로의 탐색과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모습으로 권위로 맹목적 믿음으로 가면 스승도 필요하고 종교적 형식도 필요하고 그러다보면 의존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얻을 것이 없다. 바로 그런 생각이 자신의 공부를 그르치게 만든다. 따라서 이 책도 빨랫감에 불과할 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6-07-30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가에 놓고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는 책이지만
달팽이님이 이리 성찰 깊게 써 주시니 읽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책이 주인을 잘 만난것 같아 안심입니다^^

달팽이 2006-07-31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을 인연으로 만났던 책이 그래도 더운 여름날을
마냥 더위 속에 허덕이지 않게 해줍니다.
고맙습니다.

어둔이 2006-07-3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달음이후의 빨랫감은 다림질을 해야하고
다림질을 한 옷은 멋나게 입어야죠. 입고나서 더러워지면
또 빨아야하고 계절바뀌면 바꿔입어야죠. 근데 그옷을 누가 빨고 다리고 누가 입죠?

하루입어난땀냄새
벗어빨기잦은여름
손수비벼세탁한옷
햇살내음말려보네
새날되면입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