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그 언저리 - 김지하 수묵시화첩
김지하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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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 그가 먹을 간다. 독재 정권에 저항하면서 가슴끓는 분노와 열정을 젊은 피로써 써내던 펜을 놓고서 그가 먹을 간다. 민중운동의 밑불을 지피기 위해 분신했던 열사를 향해 생명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외쳤던 그가 이젠 인적 없는 어느 산중에서 댓잎에 바람스치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먹을 간다. 60인생을 훌쩍 넘기고서 다채롭고 치열했던 그의 삶을 단순화시켜 흑과 백 속에 자신을 담아내려고 그가 먹을 간다.


도덕경에 보면 玄은 ‘玄牝之門’이란 말에서 모든 만물이 생겨나는 암컷의 문이란 뜻으로 쓰인다. 만물이 생겨나는 자궁의 의미를 가진다. 자궁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나오고 다시 입 속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그 생명을 다하고 들어간다. 다석 류영모 선생님은 이를 ‘가물하다’라고 해서 해지고 어두워질 무렵의 어둑한 상황을 표현하였다. 가물가물한 그 곳에서 만물이 태동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호인 다석(많은 밤)에도 그런 의미가 들어있다고 한다.

 

그 현은 하얀 종이 위에 세상의 만물을 그려낸다. 눈 쌓인 초봄의 추위를 뚫고 매화를 피우기도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난초를 자라게도 한다. 또한 그런 자연 속에서 살아있는 생명의 빛을 드러내는 선사들을 빚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예전에 정열을 바쳤던 그런 세상은 찾을 수가 없다. 번잡하고 치열했던 그의 저항과 투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젠 그 일들을 후학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스스로의 생명 공부를 하고 싶은 것일까?


평화로운 듯 때로는 무표정한 듯 앉아 있는 승려의 마음은 고요하지 않다. 마음에선 시퍼런 칼날들이 서로 부딪히며 불꽃을 터뜨리고 있다. 달조차도 날카로워 첩첩의 산등성이를 베어내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찾기 위한 구도의 치열한 과정이 그의 마음에서 손끝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치열한 전장을 지나서 비로소 다다른 고향집에 핀 매화꽃이 아닌가?


그 매화 꽃 위로 한 점 봄나비되어 그는 나풀거리고 있다. 환상같은 인생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의 낮을 지나 차가운 바람이는 들녘의 저녁을 지나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칠흑같은 밤을 꼬박 새우고서야 다다른 또 다른 새벽에서 그는 몸의 무게를 잊어버린 듯 가볍게 이 꽃잎에서 저 꽃잎으로 훨~훨 날아다닌다. 그렇게 놀다가 다시 해질 무렵이 되면 빈 하늘 속으로 멀어져 한 점 되었다가 사라질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절 언저리에서 무엇을 찾고자 했을까? 산으로 난 숲길을 따라 그를 뒤밟아본다. 산의 푸르른 신록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콸콸하는 계곡 물소리가 눈 앞을 가로막고 선다.


꽃 禪院


추사가 썼다는

世界日花 祖宗六葉

낮은 문 좌우에


영산홍 한 그루

자산홍 또 한 그루

선원 마당에 맞절하네


내 왼쪽 분홍빛 뺨과

네 오른쪽 자줏빛 볼이


서로 웃음지어

맞부비어

山紅參禪 내리 하는 곳


육백년 古梅와

곁에 선 매화자손들 줄줄이

寒梅參禪하는 그 자리


호남 제일

꽃 선원


미소

꽃드는

자리,


오오

花史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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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7-29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도, 달팽이님의 리뷰 제목도 마음을 두드립니다.
玄의 먹이라니!^^

달팽이 2006-07-29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나쁜 의도가 뻔히 드러나는 FTA에서도 아마 긍정적인 면이 있을 것입니다.
님의 마음 속에 그것을 수용할 그릇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