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
로테 퀸 지음, 조경수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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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둔 부모치고 아이들의 감정곡선을 타고 울렁거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는 둥, 사는게 정말 싫다는 둥 절망적인 말들을 뱉어낼 때에 부모의 가슴이 미어지고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일지도 모른다. 사회가 더더욱 학력서열화되고 점점 더 저학년의 아이들이 지나친 학습과 과외에 내몰리면서 우리는 이러한 교육의 구조적이고 전반적인 문제들에 대해 분노가 솟아오르면서도 그 방향을 어디로 분출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독일의 한 학부모로서의 그녀의 비판을 읽는 내내 교사라는 신분의 옷을 입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공감과 동정과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쏟아지는 교사에 대한 불신과 거침없는 비판의 일부분은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스스로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음도 고백한다. 그것은 그녀의 비판 한 가운데에는 아이들의 관심과 이 땅의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특히 교실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교사의 지배적 권리와 그 권리의 남용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교사의 양심과 상식에 맡겨지는 현실을 제외하고는 외부의 다른 견제나 조정의 역할이 부재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인정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은 교육 현장을 먼저 둘러보게 되었고,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하는 마음과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마음이 우선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미성숙한 아동을 가르치고 성장시키는 일에 보람을 가진 성인들의 선택에 의해 그리고 많은 준비기간과 엄청난 경쟁의 과정을 거친 결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아이들의 인지수준에 맞춘 수업과 노력, 새롭게 변화하는 아이들의 의식의 변화를 포착하고 수용하여 교육에 적극 활용하려는 노력이 교육전문가로서 요구되는 자질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그리고 그녀가 상처받은 깊은 문제는 한 사람으로서의 교사의 인격과 됨됨이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어떤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든지간에 도덕적인 인격과 마음 씀씀이가 제대로 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심각하다. 특히 전인적인 성장을 위해 부모들로부터 그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부모의 권리를 위임받은 학교일 경우에는 그것이 더 심각해진다. 사실 그 중요성을 모든 사람이 인식하는 것처럼 그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다. 나의 경우도 헛점 투성이인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날의 기분이나 사적으로 있었던 안 좋은 일을 타인에게 특히 약자에게 전가시키지 않는 것은 교사나 부모로서나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도 인격의 닦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교사는 자신의 아침에 있었던 기분나쁜 일을 아이들에게 풀어내고 정신적 상처를 갖게 된 아이들은 동급생에게 하급생에게 하교 후에는 동생에게 또는 부모에게 풀어내고 그렇게 전가된 화는 부부간의 다툼으로 가족 갈등으로 나아가 여러 사회문제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우리 마음 속에 다스려지지 않고 표출된 화는 그렇게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어낸다. 우선 내 마음의 화가 다스려지면 나에게서 시작되는 우주의 불화가 멈춤을 의미한다.

  교사라는 지위에서 특수하게 요구되는 인내심과 특수한 전문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신뢰는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능력을 전제로서 요구한다. 교육현장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생각과 주장이 때로는 지나치고 이처럼 '발칙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선은 강자(학교와 교육에서의 권리를 많이 가진 자로서...)의 여유로서 포용하고 철저히 자신을 반성하면서 고쳐야 할 것은 고치는 것이 순리이다.

  나아가 더 큰 관점에서 과연 아이들에게 요구되는 참된 교육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서로의 관점을 공유하고 합의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경쟁지상주의 교육이 우리 미래세대들 전체에게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저자같은 부모들에게 문제의 원인을 때로는 부분적으로 보아 미시적인 교육주체가 스스로 반성하고 행동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때로는 제도적인 장치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아가서는 거시적으로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안정성을 가지지 못하고 몸이 아프거나 정신적 방황을 겪고 있어 일의 능률이 없다는 이유로 바로 해고되어야 하는 현실이 인간적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때로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혼란과 좌절 속에서도 한 사람의 성장과정으로서 존중해주고 다시 일에 복귀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적인 배려도 필요하다.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더욱 많은 생산성을 가져올 지 누가 알겠는가?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몇 번의 실수로 낙인찍히지 않고 그 아이가 가진 잠재능력에 대한 신뢰로 언젠가 제 적성에 맞는 것을 찾으면 놀라운 정열과 노력으로 많은 성취감을 보일 수 있다는 인간적 신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어떤 삶이 우리들에게 있어 행복한 삶인가?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학부모에게나...우리는 서로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전장의 적이 아니라 한 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도록 노를 Š고 지도를 살피고 먹을 것을 구하는, 단지 역할이 다른,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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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10-0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알라딘을 들락거리며 좋은 점은 이렇게 좋은 책을 소개받을 수 있는 일인 듯.
달팽이님, 연휴 잘 보내셨나요?

달팽이 2007-01-26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관심에 감사합니다.

공자모 2007-07-2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원더풀
울라 카린 린드크비스트 지음, 유정화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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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라 카린 린드크비스트. 스웨덴의 방송국에서 인기있는 뉴스 앵커로서의 바쁜 삶을 살아온 그녀가 2003년 루게릭 병이라는 불치의 병 진단을 받고 2004년 봄 그가 숨지기까지의 1년의 병상의 생활을 스스로의 기록으로 남긴 감동적인 글이 이 책이다. Wonderful은 그녀가 죽음의 순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다. "너무나 이상하다. 이제 나는 내 삶에서 지금처럼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기에 내 존재가 값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내게 남겨진 시간은 아주 짧다. 하지만 내 생애 처음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나를 느낀다.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만끽하고 있다. 죽음이 나를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자신의 불치병을 부정하고 분노해가다가 그 병과 화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자 지금의 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야말로 인간존재의 한계점에서 자신의 가치를 되묻게 되고 삶의 바른 가치를 물어가는 과정에서 진실한 삶의 의미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그러니 정신없이 달려왔던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삶을 마감했더라면 얼마나 상실감이 더 컸을 것인가? 불치의 병에 걸려 남은 생을 정리하는 시간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자 남겨진 삶에 대한 진실을 보다 깊게 파내는 과정이다.

  썰물처럼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간 생명의 기운은 마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듯이, 여름이 지나고 온갖 빛깔로 세상을 채우는 가을이 오듯이, 그 모든 변화 뒤에 자신의 잎을 떨구고 온통 벗어버린 뒤의 생명의 자리를 생각하는 겨울이 오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그녀가 죽음의 과정에서 회복한 가족관계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깊어짐은 죽음에 이르는 그 짧은 시간을 더욱 의미있게 하였을 것이다.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더욱 슬픈 사실은 죽음에 이르는 그 소중한 시간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고통에 허덕이다가 그 영혼을 다 소진해버리는 일이 아닐까?

  아버지가 입원을 하셔서 당분간 병원을 아침저녁으로 다녔다. 옆에 계신 할아버지는 당뇨수치가 너무 높아 폐렴증상이 심각한대도 치료를 할 수 없다. 오로지 당뇨 수치를 잡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수많은 인슐린과 약물들을 여윈 몸 속으로 쏟아 붓고 계시다. 그 대각선 맞은 편으로는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남은 6개월의 시간을 기다리는 50대의 환자다. 이미 몸의 반쪽을 쓰지 못하는 그는 목으로 전이된 암세포를 절단하고 싶어 수술을 요구한다. 하지만 의사와 가족은 이미 생명연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수술이 오히려 환자에게 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고 설득한다.

  몸이 아프면 영혼이 온통 몸에 쏠려 살고, 몸이 좀 건강하면 오만하고 함부로 사는 우리의 모습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타인의 죽음은 단지 타인의 죽음만이 아니다. 멀지 않은 앞날 너와 내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닌가? 그렇지만 삶과 죽음은 없다는 깨달음도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금 이 순간 순간의 삶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요 죽음이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빼앗긴 뒤에도 남는 삶의 행복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도 내가 웃을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아는 존재가 있음은 나란 존재가 이미 이 자아를 초월한 존재임을 이야기한다. 나를 초월한 존재와 일대 일로 대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인생은 순간 순간 완전하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마지막 순간에 Wonderful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늘

Wonderf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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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일기 - 잠든 나를 깨우는 100일간의 마음 공부
김홍근 지음 / 교양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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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협심증에 당뇨가 있는 아버지가 감기를 앓은 것은 2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냥 감기려니 생각하고 집안 식구들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급기야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계시게 되었고, 식구들은 병원에 모시고 가려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러다 낫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 도무지 나아질 기세가 보이지 않자 다시 종용했으나, 고집은 그대로였다. 급기야 사흘째가 되어 자신도 이것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대학병원으로 바로 가셨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폐의 한 쪽은 완전히 하얗게 찍혔고, 다른 한 쪽도 드문 드문 보이는 흰 점들이 상태가 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다가 협심증에 당뇨수치도 높아서 의사의 말로는 당분간이 위독한 상황이라고 하였다. 온몸이 흔들릴 정도의 기침에다가 손과 얼굴을 비롯한 온몸 근육이 심하게 떨리고 첫날을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의 마음까지 공포 속에 갇히게 만들었던 합병증은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죽음'이라는 말을 가까이 던져 놓았다.

  우선 우리 부부에게는 아이가 큰 문제였다. 어머니가 봐주시던 아이를 이리 저리 맡길 곳을 찾아 헤매이어야 했다. 그래도 장인 장모님이 가까운 곳에 있어 다행히 아이들 문제도 당분간 쉽게 해결이 되었다. 아이들이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녀석들까지 신경쓸 겨를이 우리에게 없었다.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가장 앞에서 우리들의 벽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그간에 공부게을리했던 것이 많은 후회가 되었다. 정작 가까운 이의 죽음이 와서야 정신이 든다면 늦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죽음이 오기까지는 열심히 닦을 일이다.

  그런 중에 이 책이 잡혀졌다. 당장 사람이 위태로운데 무슨 책인가 하겠지만 그럴수록 내면의 의지처를 찾는데에는 마음을 잡아주는 책이 필요하다. 나보다 나이가 열네 살이나 많은 저자도 이렇듯 열심히 공부하며 사는데 젊은 나는 게으름을 있는 대로 피우며 사는 생활이 반성되었다. 좋은 스승의 지도를 통해 하루 하루 수행하며 적은 100일의 참선일기는 때로는 밝아지는 마음의 눈을 떠가는 즐거움과 보람을 알게 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짧은 깨우침의 순간을 버리지 못하여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경험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처님의 자비는 언제나 온누리에 가득한데 '자아'라고 하는 것이 그 앞을 막고서서 우리들의 참된 진리의 인식을 방해한다. '배고플 때 배고픈 것을 아는 자'라는 현웅 스님의 말씀도 우리가 에고의 작용을 하기 전에 배고픈 줄 알고 숨쉬는 줄 알고 보고 느끼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생각하는 그 자체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시선을 돌리면서도 어떤 생각을 하면서도 이 생각과 시선과 읽는 행위가 인지되는 그 무엇에 마음을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아직은 자아라는 너무나도 큰 벽이 나의 앞에 드리워져 있음을 알기 때문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다.

  글을 이해하려고만 하면 책장은 잘 넘어간다. 하지만 한 단어 한 단어 그 말의 뜻이 떨어지는 곳을 마음으로 짚어가다보면 막히는 곳 투성이다. 한 장도 그냥 넘기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의문을 들고 또 다음 장으로 넘어가서 또 의문을 보태고 이런 식으로 책을 넘기다 보니 의문에 의문을 보태어져서 또 한편으로는 희석화되어 버린 의문의 찌꺼기들만이 남아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위험한 고비를 넘긴 아버지는 조금씩 회복되어 간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과 생활과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남은 생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번 계기를 통해 아버지와 마음이 맞지 않았던 내가 아버지를 연민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번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가 인생의 끝에 서서 삶의 진실을 끝내 마주하지 못하고서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더욱 많이 공부하고 기도해야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우리가 움켜쥐려고 하는 삶이란 사실 너무 연약한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그만 조건만 변해도 우리들의 삶은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영원한 것인양 잡고 움켜쥐고 욕심을 부린다. 밖으로 주어진 억만금의 보물이 아무리 많다하더라도 마음 속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 불행한 사람일 것이다. 이번 기회가 다시 나에게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발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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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6-10-02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의 죽음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부모님도 시부모님도 건강하게 사시다가 고요하고 편안하게 가셨으면 하는 것이 매일 아침 108배에서 빠뜨리지 않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이번 일을 계기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석 잘 보내세요._()_

달팽이 2006-10-02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혜덕화님..
둥글고 둥근 마음 나누는 한가위 되길 바랍니다.

비자림 2006-10-0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좋은 일이 있으셨군요. 고비는 넘기셨다고 하셨지만 많이 걱정되네요.
님, 힘 내시길! 아버님 손 많이 잡아 드리시길!

이누아 2006-10-02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 관세음보살 _()_

파란여우 2006-10-03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란게 내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지요.
그럼에도 결국엔 마음을 다잡아 먹는 일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고통이 중심을 잃지 않는 나침반이 될 수 있기를 멀리서 철없는 누나 기원합니다.

달팽이 2006-10-0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그렇게 하지요..고맙습니다.
이누아님, _()_
여우님, 마음만 다 잡아 먹으면 달리 할 일이 없겠지요..
공부해야겠습니다. 고마워요.
 
세상 끝의 사랑
마이클 커닝햄 지음, 김승욱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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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의 미국 사회에서 새로운 사랑과 가족의 형태를 그린 마이클 커닝햄의 작품이다. 사실 형태로만 본다면 새로운 가족에 대한 형성과 기존 가족 관계의 급격한 파괴와 변화는 지금의 트렌드이다. 40년 후의 미래사회의 모습이 그의 상상력속에서 되살아난 것일까? 그는 한 여자가 두 남자와 동거생활을 하는 이상한 가족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의 삼각관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관계이다. 육체적 관계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이 없어도 무방하다. 그저 세 사람은 각각이 서로에게 사랑과 연민을 품고 있고 그것은 아무런 꺼리낌이나 금기없이 서로간에 표현된다.

  커닝햄은 자신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동성애자이다. 동성남자와 한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그는 세상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자신의 삶의 형태가 비록 남과 모습만 다를 뿐,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가족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자보다 남자에게서 더욱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그는 이 소설 속에서 바비나 조나단을 통해서 자신의 성장과정과 내면적인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레이첼이 아기를 가졌다. 바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두고서 네 사람은 이상한 가족형태를 계속해나간다. 바비와 조나단은 식당을 운영하고 레이첼은 딸을 양육하면서 그들은 이상한 공존을 계속해나간다. 조나단은 레이첼의 딸을 마치 자신이 낳은 딸로서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가족에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담아간다. 바비는 이런 관계를 수용하면서 아내와 딸의 공유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끝은 레이첼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자신이 심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두 남자에게 자신의 딸을 평생 짐처럼 지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과 딸이 그들의 곁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연극같이 이별의 장면을 준비한 그녀에게서 두 사람은 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비록 그녀가 지금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지라도 그녀의 딸 레베카만은 언제나 그 둘의 딸임을 잊지 않는다. 이 집과 그들의 유산이 모두 그녀에게 상속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소설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주제는 죽음이 된다. 인간관계의 영원하고도 되돌릴 수 없는 상실, 죽음 앞에서 그들은 남겨진 삶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단순하게도 모든 삶은 죽음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죽은 자들이 하나같이 삶을 꿈꾸었다는 사실과도 중첩된다. 위성같이 더 떨어지지도 않고 더 가까워지지도 않는 우리들이 살면서 맺는 가족관계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꿈꾸는 하나의 환상이다.

  새로운 가족을 꿈꾸는 것은 단지 인간의 욕망이 변용된 형태의 새로운 모습이 아니다. 내겐.

그것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서 떠나는 일련의 우주적 작용으로 주어진 새로운 만남과 관계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가족관계가 떨쳐버리지 못한 족쇠가 아니라 필연처럼 때로는 우연처럼 우주가 빚어낸 고맙고 감사해야 할 내 생의 과제이다.

주어진 가족 관계 그 자체에서 내 마음의 작용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하는 삶이 나에게 메세지를 준다.

너는 행복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삶을 살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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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즐거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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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생 글쓰기에 이어 이 책도 손에 잡았다. 하지만 뭔가 더 마음을 끄는 글쓰기의 특별한 스킬같은 것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글쓰기가 늘 어렵지만 막상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놓으면 막 써내려가는 나의 글쓰기의 가벼움을 좀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때로는 날리는 듯한 글로써 일관성도 논리성도 결여된 빈약한 문장을 보면서 그래도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인데 최소한의 사회과학적 글쓰기에 부끄러움이 적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책을 덮는 순간 바로 컴퓨터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습관부터 고쳐야 한다. 최소한 필기구로 하얀 종이에 이 책의 리뷰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간단한 전략적 사고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냥 자리에 앉은 나는 아무래도 시행착오를 더 거쳐야 하는 업을 가졌나보다. 글을 쓸 때 자신의 사고만으로 글을 이어갈 수 없는 글에는 반드시 책이나 자료, 또는 정보를 인용해야 한다. 그 인용할 자료를 어떻게 수집하여 고르고 정리하여 글의 어떤 부분에 인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끝나면 사실 글쓰기의 절반이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은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과정과도 함께 한다.

  심리적 유혹이나 감정적 통제에 관한 오류도 흔히 범한다. 흑백논리에서 한 쪽에 몰입해야 한다는 유혹, 거대담론에 대한 결론의 유혹, 도식주의의 편리성이 주는 유혹과 과장, 몰입에서 오는 처리하기 힘든 감정 문제. 때로는 어느 한 쪽의 견해로 미끄러져버리는 나를 본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가에 따라 50%의 결론이 정해져버린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거리두고 바라보기'가 필요하다.

  수사학과 국어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는 꼭 필요하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써 국어에 대한 애정은 물론이거니와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담긴 원리와 의미에 대한 이해도 요구된다. 다석 선생님은 그 한글의 깊은 의미를 되살린 사람 중 하나다. 물론 한글학자 중에서도 그 의견이 분분한 것들도 많지만 이럴 경우에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바를 취하면 되겠지만 적어도 명백한 오기나 중요한 오류는 고쳐가며 쓰는 것이 필요하다. 짬짬이 우리말 바로 보고 쓰는 공부도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시사 논쟁의 이해는 바로 내가 글쓰기에서 배워야 할 부분을 현실적으로 적용한 실전학습란이다. 고등교육을 받는 대학생이나 일반인들은 이런 글쓰기에 좀 더 훈련되어야 한다. 물론 실전 글쓰기에 앞서 실전 글읽기와 균형잡힌 인식이 필요하다. 양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이다. 논쟁적인 문제에 있어 상반되는 양자의 입장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이해하는 것과 그 논쟁을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의 입장과 주장을 마음을 열어놓고 이해하는 것은 그 상충되는 의견의 합의를 이루어내는 민주적 절차를 거치는 데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담아내는 마음의 그릇을 넓혀야 비로소 전체적인 시각과 대안이 도출될 수 있다. 나를 넘어서 타인에게로 마음이 열려야 하고 또 나와 상반되는 타인에게도 그 마음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열려야 한다. 비로소 나의 입장과 그의 입장이 나의 마음에서 서로 맞물리고 감아들어 내 입장만도 그의 입장만도 극단적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은 더 나아가 서로를 고려하면서도 전체적인 흐름과 구조를 놓치지 않게 되어야 한다. 사회와 세계의 흐름과 그것이 바른 방향인가에 대한 물음은 인간 사회와 지구 그리고 우주의 관계에서 되묻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비로소 그 속에서 나의 길이 보이게 되고 세상의 모든 갈등이 관계한 인드라망을 본 후에 내가 제시하는 결론과 대안은 아무런 사심없이 마음에서 일어난다.

  너무 말도 안되는 결론인가? 그가 얘기하듯이 단순한 이념적 관점과 입장적 관점에서 벗어나 거리두기를 하면서 보다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관점과 사회적 구조와 흐름을 둘러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한 쪽으로 치우친 글쓰기가 되지 않고 상대방의 비판과 입장을 뻔히 알면서도 쓰는 글을 피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려면 결국 마음이 열리지 않고서야 어찌 말의 논리만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합의를 유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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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9-1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읽으시는군요.^^ 저는 글 쓰기를 좋아하지만 자주 안 쓰고 진지하게 안 임해서 그런지 아직까지 이런 종류의 책을 일부러 읽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다만, 이 세상에 여러 종류의 글이 있고, 사람들 모두 나름대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추측하고 산답니다. 장르를 벗어나서 그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은 가장 많이 생각해 보았고 가장 잘 알고, 가장 말하고 싶은 분야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해요.


달팽이 2006-09-11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본적으로 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다만 저의 글쓰기가 너무 엉망인 탓에 사람들이 읽기에 불편함이 많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과 더불어 아이들의 논쟁문에에 대한 수행평가를 지도하면서 그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도움이 되더군요..

비자림 2006-09-1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쓰기가 엉망이라뇨? 당치 않으십니다. 근데 수행평가 지도상 책을 읽는다는 말씀에 감동이 이는군요. 좋은 선생님들이 많은 세상이에요.
저는 실업계에 있어 술러덩술러덩 넘어가며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반성해야 하는데..^^ 되려 현실을 잊기 위해 장편소설들을 읽고 사는 시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