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녀는 순수하다_2012.03.1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2.)
(룻 3:5, 개역)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룻기의 매력은
시적이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와 더불어 분명하고 충분한 교리적 뼈대를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는 것일게다. 2장부터는 룻의 러브스토리가 싹트게 되며, 신앙의 비전을 따라간
룻의 정직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우리의
백마 타신 보아스 왕자님은 백마 타신 예수님의 정확한 모형이다. 모압여인이면서 이방여자로서 은혜와는
멀어져 있는 그녀가 믿음으로 보아스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 자체가 은혜에서 멀었던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잘 보여준다. 룻은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던가. 그녀는 이방여인이지만 믿음으로
다윗의 조모요, 그리스도의 직계 혈통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하게 되었다.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큰 일을 이룰 수 있는가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제 그녀의
러브스토리를 조금 감상해보자. 무엇보다 우리는 한때 결혼까지 했던 젊은 룻이란 여인의 순박함에 매료될
것이다. (좀 차갑게 표현하면 그녀는 과부이지만…쩝)
늙은 시모를
쫓아 낯선 이방의 땅 베들레헴으로 이주해온 모압여인. 남편까지 읽은 과부의 신세요, 늙은 시모를 모셔야 하는 처량함. 조금이라도 세상을 안다라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울만 했다. 초라하고, 불쌍하고 자기 신세가
안타까웠을 것이다. 더구나 이방여인이기에 사람들의 숨은 천대와 무시는 더 클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절박한 환경이었다. 솔직히 나는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코.
그러나 룻은
말했다. ‘어머니 저로 밭으로 나가서 이삭을 줍게 허락해주세요. 누군가가
은혜를 베푼다면 제가 이삭을 주울 수 있을 거예요.’(룻2:2) 충격이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부두막에 앉아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여리지만 강인한 그녀의 순수한 삶에 대한 열정과 애착은 스스로를 밭으로 나가게 종용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순박한 여자였다.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초라하게 보이고, 보잘 것 없이 보여지든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믿음을 가지고 시어머니와 신앙의 땅으로 왔으며, 이제 베들레헴이 그녀가 정착하고 늙은 시모와 재기해야 할 땅이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특별히 모질고 독한 마음을 품은 것 같지도 않다. 그저 덤덤히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나씩 해나가기로 했을 뿐이다. 그만큼 룻, 그녀는 순박하고 꿋꿋하고 겸손했다. 결국 그녀는 영악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세대가 주는 서글픔이 무엇일까? 우리가 너무 약았고, 영악해졌다는
사실이다. 철저한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 현실적인 비전에
대한 많은 비중,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양식. 똑똑하고
유능한가 아닌가의 판단,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의미부여. 그러므로
늘 우리를 싸고 있는 위선의 포장. 최종 잃어버린 순수함과 순박함. 아마,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가식의 문제는 그 옛날 바리새인의 위선의 문제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해보았는가. 그것 역시 마찬가지.
룻은 종용하며, 소박하며, 순박하고, 겸손하며, 꿋꿋한 여자였다. 나오미가 그녀에게 은혜를 입도록 돕기 위해 보아스의
곁에 머물도록 조언했다. 심지어 보아스가 근족이자 유력한 자로써 잃어버린 자기 기업을 되사서 무를 수
있는 사람임을 생각했을 때, 나오미는 적극적으로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에게 다가서야 될 것을 가르쳤다. 그때도 룻은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그 어느
날, 나오미는 룻에게 말했다. 오늘 밤 보아스가 눕는 자리를
보아둬서 그곳에 가서 함께 누우라고 말이다.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발라 깨끗이 단장을 한채로 그의 눕는
자리에 같이 누우라고 말이다. 그때도 룻은 순종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나오미의 요구는 룻에게 매우 곤란한 요구임이 틀림없었다. 결코 쉬운 요구는 아니었다. 룻은 모압여자였다. 이방여자이면서 동시에 한때 결혼해서 남편을 둔
유부녀였다. 현재는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의 신세이다. 고작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 밑바닥에 있는 처지였다. 모든 정황을 고려해볼 때 나오미의
요구는 자칫 일이 그릇될 경우 룻으로 하여금 심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방여인 주제에 부정을
시도한 죄로 몰릴 수 있고, 생계의 유일한 수단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물론, 보아스의 룻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이고 친절을 베풀었으며, 그가 기업을
무를 자격이 있음을 감안할 때 용기를 얻었겠지만 그렇다할찌라도 용기를 내기 쉽지는 않을만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녀는 여러 말이 필요 없이 그저 종용한 목소리로 단 한 마디를 내뱉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그녀의 종용함과
소박한 성품, 믿음이 반짝반짝 빛나지 않을 수 없는 한마디. 그렇게
그녀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며, 겸손하고 순박하게 살았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말했다. ‘이 성읍 사람들 모두가 너의 현숙함을 안다.’라고 말이다. 그녀는 빛나는 보석이었다. 또한, 보아스는 말한다. ‘네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젊은 남자를 찾아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룻3:10) 그러한 사실과 생활 속에 보여진 룻의 단아함은 모든 성읍사람들의 마음 적셨다.
분명, 룻은 성경에서 말하는 현숙한 여인의 가장 실제적인 모형일 것이다. 그녀가
이방여인이란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녀는
가장 순수한 성품과 고결함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순박함이 우리의 마음마저도 들뜨게 한다. 그리고 분명 우리 역시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룻의
소박하고 순박한 믿음과 겸손은 필요한 것임을. 그리스도인면서도 너무나 이기적이었고, 영악하고 계산적이었던 많은 모습들을 부끄럽게 한다. 위선의 많은
가면들을 불편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