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vision, 비전 없는 과녁의 정중앙에 활을 꽂다_2012.03.1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1.)
(룻 1:11, 개역)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계속해서
룻기 1장에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삶의 윤리가 분명하게 대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래의 일에 대해 두려워한다. 현재의 상태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다. 현재의 상태가 곤란하다면 우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미래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엘리멜렉이 그러했다. 현재의 베들레헴의
닥친 흉년이라는 곤란이 계속해서 베들레헴에 머물렀을 때의 미래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근심하던
그는 모압으로 가는 것이 미래에 대한 올바른 비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회사를
선택할 때, 배우자를 선택할 때 등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어떤 중대한 결정을 할 때 반드시 그것이
제시하는 미래의 가능성, 비전에 대해 심도 있게 살펴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룻의 선택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바로 그 점이 엘리멜렉과 룻의 삶의 윤리가 분명히 대조된다는
의미이다.
모압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돌이켜 베들레헴으로 복귀하려고 했다. 그것은 방향을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시키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나오미의 깊은 회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큰 고통을 경험하며, 그들이
나아온 모압이 하나님 앞에 틀린 것임을 알았다. 어쩌면 나오미는 그것을 처음부터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완고했을 것이다.
막상 베들레헴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하고 났을 때, 나오미는 두 며느리가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함께 살아온 가족이기에 두 며느리도 함께 시어머니를 쫓아 베들레헴으로 가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정작 그들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다한들 별다른 대책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아직 젊은 두
며느리, 재기할 기회가 있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비전을 찾아 헤어지는 것이 더 낫겠다는 권유를 하게
되었다. 분명, 그 마음이 쉴사이 없이 아팠을 것이다.
(룻 1:13, 개역)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는
말했다. 너희들도 각자 너희 백성과 너희 신(神)에게로 돌아가라고. 나를
따라와봐야 너희 남편이 되어줄 아들들이 없다고. 나는 여기 모압으로 내려와서 이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모든 것을 잃고 초라하게 돌아가고 있다라고. 즉, 나에겐
아무런 비전도 없으며, 그러므로 너희에게 비전을 줄 수도 없다고.
이는 얼마나
나오미가 낮아진 마음과 순결한 며느리에 대한 긍휼, 안타까움으로 권면해주는 진심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럼으로 해서 오르바는 나오미의 말을
수긍했다. 오르바는 결코 잘못된 며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룻보다 특별히 며느리로써 부족했다든지 순종적이지 않았다고 추측하려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일지 모른다. 다만, 오르바는 보다 현실적이었고, 현재의 비전에 대해 더 밝았다. 또한, 무엇보다 오르바는 여호와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오르바는 적어도 삶의 비전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는 시아버지 엘리멜렉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오르바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현실적인
비전을 앞세우는 삶의 윤리를 가졌는지 반성해볼 때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놀라운 룻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의 윤리를 거스려 NO VISION을 선택했다. 나오미는 늙었고, 그들의 가족은 신앙에서 실패했으며, 징계받았고 모든 것을 잃고 초라한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
어떤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보장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캄캄했다.
그러나 룻은 아무런 비전 없는 그 미래에 자신을 던졌다. 왜냐하면 여호와 신앙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오미가 말리려고 할 때 룻의 대답은 분명 이것이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어머니께서 죽어 장사되는 곳에 나 역시 장사될 것인데, 죽음이 아닌 다른 이유로 어머니와 이별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시길 원합니다.’
신앙에 실패한
엘리멜렉 가정에 이방신을 섬기던 이방여인이 시집을 와서 여호와의 신앙을 확신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어두운 미래에 자신의 삶을 던질 수 있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무엘과 같이 신앙으로 무장한 가정에서도 불신앙으로 죽임을
당하는 아들이 나왔던 것을 생각해볼 때, 룻의 신앙은 사막의 붉은 황무지에서 피어 오른 더 짙은 한
송이 장미였다. 정말 이것은 가능한 일이었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룻의 믿음과 신앙, 그의 삶의 윤리가 가져온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선택을 놓고 생각해볼 때 우리
삶의 윤리에서 차지하는 비전에 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분명 엘리멜렉과 룻을
함께 놓고 비교해보아야 할 것이다. 전적으로 다른 삶의 윤리를 지니 두 사람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화살을
쏘았는지 말이다.
엘리멜렉의
삶의 윤리는 그의 앞날에 대한 비전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현실적이고 육신적인 가치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었다. 그러나
룻의 삶의 윤리는 그의 앞날의 비전을 선택함에 있어서 여호와의 신앙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우리 삶의 윤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한가지
되새겨야 할 교훈이 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미래 비전에 지나치게 비중을 둠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시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학교, 직장, 결혼, 가정 모든 삶의 중대한 영역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 비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함으로 인해 엘리멜렉과 같은 그릇된
선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압으로 갔다. 우리는
룻과 같지 않았다. 보라,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갔지만, 룻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갔던 사람이었음을. 이제
우리의 비전 역시 신앙의 확신과 신앙의 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