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_2011.10.02
어릴 적 종종 TV에서 볼 수 있었던 영화가 ‘삼손과 들릴라’였다. 삼손은 성경의 유명한 인물이자 사사로서 한 시대를 이끈 영웅이었다. 그의 독특한 힘과 에너지, 여성편력과 드라마틱한 영웅담은 충분히 재미있는 스토리를 엮어낸다.
그러나 나는 사사기를 읽을 때, 그리고 삼손을 만날 때마다 그가 지닌 독특한 개성과 그 라이프 스타일에 의구심을 품게 되곤 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주관이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삼손은 어떤 측면에서 돌연변이 같이 비춰진다. 솔직히 이러한 표현이 너무 과격하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그럼에도 어찌하였든 삼손이란 인물은 결코 내가 알던 성경의 모든 인물과는 전혀 차별화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정상적인 궤도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내 변론을 들어보라.
삼손은 성경 사사기에서 만날 수 있는 성경위인이다. 사사기에는 총 12명의 사사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거의 그 행적이 묘사되지 않고 이름만 등재되다시피 되어있다. 반면, 기드온이나 입다, 삼손과 같이 그 주요 행적이 소개되는 사사들도 있다. 벌써 여기서부터 삼손은 다른 사사들과는 차별화된다. 사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삼손은 그 탄생의 비화부터 소개된다. 특별히 그 탄생비화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삼손이 나면서부터 나실인의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나 사무엘처럼 삼손도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 아이러니하게도 세례 요한이나 사무엘과는 전혀 다르게 삼손은 조금도 나실인답게 살아가지 않았다. 사사기의 삼손에 대한 기록을 다 훑어봐도 그가 나실인의 신분으로써 자신의 위치와 자격에 걸맞게 행동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전혀 나실인 답지 않게 삶을 살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이자 돌연변이적인 면모의 첫 부분이다.
삼손의 기록을 읽어보면 삼손이 딤나의 블레셋 여인을 사랑하므로 딤나로 내려가던 길의 도중에 어린 사자를 만났다고 했다. 삼손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그 사자를 찢어 죽인다. 얼마 후 삼손이 다시 딤나로 내려갈 때 그는 그 어린 사자의 주검에 벌떼와 꿀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낼름 먹고는 자신의 부모님께도 그 꿀을 드린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바로 삼손이 나실인이란 사실이다. 나실인은 원칙적으로 주검을 가까이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사자의 주검에 고인 꿀을 취하는 삼손의 태도에는 조금도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조금도 꺼리낌 없이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취해 먹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부모님께까지 드렸다. 그러므로 삼손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부모님 마저도 부정케 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회개했다거나 그릇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음을 암시하는 요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바쳐졌지만 조금도 나실인답지 않게 살아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삼손은 여성편력이 심했다. 딤나의 여인을 사랑했고, 훗날엔 자신을 파멸로 인도한 들릴라를 깊이 연애했다. 심지어 그는 이방인만을 사랑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블레셋 여인들에게 특별한 이성적 호감을 느꼈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방인인 여자를 부모님께 승낙을 구할 정도로 적극적이기까지 했다. 역시 그가 나실인다운 양심과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사실들자체가 놀랍지 않은가.
삼손의 모습은 말한다. 나는 비록 나실인으로 태어났지만 나는 내가 나실인이란 사실을 신중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으며, 내게 나실인이란 정체성은 매우 희미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더 의아하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구절이다.
(삿 13:24-25, 개역) 『[2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삿 14:6, 개역)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기드온은 큰 용사였고, 입다도 걸출한 장군이었지만 사사기를 통틀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고 묘사된 사사는 삼손이 유일하다.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전혀 나실인답지 않게 살아가는 여성 편력가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삼손에게 어울리는가.
더불어 여기서 또 하나의 예외적인 궤도를 발견하게 된다. 정말 삼손은 모든 것에서 새로운 변이들을 발견시켜주는 독보적인 캐릭터다. 삼손에게 묘사된 감동은 지극히 돌발적이고 일시적이며, 비규칙적이고 산발적이었다. 쉽게 말해 삼손이 경험한 신적 감동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감동은 삼손이 특별한 육체적인 에너지와 스테미너를 발휘하는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다시 말해, 이는 나실인 사무엘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위대한 설교와 회중을 이끄는 리더십으로 실현되었던 것과 반대이다. 나실인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양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모습으로 감동되었던 것과 반대이다. 삼손이 경험한 신적 감동은 오직 육체적인 스테미너를 발휘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블레셋 민족을 쳐죽이는 용사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동은 매우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동시에 산발적이기까지 해서 삼손의 대부분의 일상들은 그냥 육적인 충동과 기질을 따라 행동하는 것에 별다른 감흥과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이 모든 것 속에서 바로 우리는 사사 삼손이자 나실인 삼손이 성경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경위인의 돌연변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사기 13~16장 까지의 삼손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혼란에 빠지는 느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독특한 인물에 대해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삼손을 볼 때마다 이렇게 묻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나는 이 삼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아직도 그것을 다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하는데 전혀 접근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몇몇의 구절을 통해 삼손이라는 이 독특한 캐릭터로부터 교훈을 받을 수 있는 단서들은 찾을 수가 있다.
(삿 14:4, 개역)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덩치만 컸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떼를 쓰는 철없는 망나니 삼손을 뜯어 말리는 부모님의 모습.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것은 삼손의 그릇된 의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치고자 하시는 어떤 계획과 목적을 부합시키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분명, 삼손은 그릇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삼손의 그릇된 인격과 그릇된 면면 속에서도 자신의 섭리를 이루고자 하시는 적용점을 두고 있으셨다. 놀랍지 않은가. 어찌 우리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개입하지 않음이 있을 것인가. 상상할 수 없다. 잠언에는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히 하셨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여기서 잠깐 삼손의 라이프 스타일을 요약해보고 싶다. 삼손은 비록 나실인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에게 나실인이란 정체성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그는 육신적인 인물로서 특별한 신앙심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육신적이고 정욕적이며 여성편력까지 갖고 있어서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결혼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그는 사사로 부르심을 입었고, 산발적으로 즉흥적인 신적 감동과 감화를 받았는데 그러한 감동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전혀 영적인 에너지로 발휘된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을 떼로 죽이고, 사나운 짐승을 맨손으로 잡는 등의 괴력이나 유체적인 에너지로 발휘하는 것으로만 실현되었다. 그는 불완전했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궤도에서 볼 때 전혀 다른 궤도를 도는 돌연변이적인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분명 그를 사사로 부르셨고, 그 나름의 독특한 인격과 기질과 성향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뤄가시는 도구로 적절히 활용하셨다.
한편, 훗날 들릴라를 사랑한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이 머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머리털이 밀리우고 힘을 잃고 만다. 결과 두 눈은 빠지고 맷돌을 돌리며 조롱거리가 된다. 분명, 하나님은 불완전한 삼손을 사용하실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릇된 삼손을 두둔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삼손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분명 응분의 대가를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민수기는 이렇게 말한다.
(민 14:18, 개역)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다 실현하시는 분이시다. 삼손은 하나님의 긍휼로 사사로 부름을 입고, 필요에 따라 능력을 발휘해 블레셋을 쳤지만 그 그릇됨에 대해서는 보응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삼손은 죽음. 죄로 인해 조롱거리가 된 삼손은 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힘을 구하고 블레셋 사람 수천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게 된다. 그는 회개함으로써 마지막 하나님 앞에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함께 죽음으로써 그는 분명 용서와 긍휼을 얻긴 했지만 결코 명예로운 죽음이 되지는 못했다. 의미심장한 구절은 오히려 이것이다.
(삿 16:22, 개역)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머리털은 잘라도 다시 자라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힘의 원천이 머리의 머리털에 묘사하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을 까발림으로써 그 힘을 잃어버리는 수모와 곤란에 처했다. 그러나 다시 머리털이 자라는 것처럼 삼손은 회개함으로써 다시 그 힘의 근원을 되찾아 마지막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힘의 근원을 머리털에 묘사한 것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나실인 삼손에게 힘의 근원은 영원히 궤멸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회개했음으로 마지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또한,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랄 수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시사하는 바는 더욱 클 것이다. 그의 머리털이 다시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의 회개도 무용했는지 모른다. 역사의 마지막에 성령께서 승천하시면 지상에 있는 성경책도 회개하는 시도도 무용하다.
하나님은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엄연한 사실과 그것이 힘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통해 삼손이 다시 회개할 때 재기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록 나실인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도 종종 돌연변이 삼손처럼 살아간다. 때로는 성령 안에서 봉사하고, 기도하며 찬양한다. 주의 일에 힘쓴다. 그라나 종종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라이프 스타일과 패턴에 젖어있기도 하다. 우리는 삼손처럼 머리털이 밀리우고 성령의 능력과 힘을 잃어버린 것처럼 무기력하고 패배하고 침체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머리털이 다시 자라듯 다시 성령의 회복과 능력을 회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즉흥적이다. 많은 순간 육체적으로 살면서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다. 그러면서 또, 성령 안에서 즉흥적이고 충동적일 때도 있다. 어쩌면 저 삼손은 여전히 죄성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과 어떤 의미에서 돌연변이적인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궤도의 실물 모형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삼손을 다 모르겠다. 그를 통해 무엇을 교훈받고 무엇을 정말 깨닫게 될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분명 그는 내게 있어 만나면 만날 때마다 다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캐릭터이며, 왠지 내 뒷통수를 한 대 치면서 새로운 이해력과 시각의 문을 열어줄 어떤 비장한 의미를 감추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삼손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