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성공이 가져다 준 오만_2011.04.09.
(창 16:4, 개역)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고대로 갈수록 여자에게 있어 잉태와 생산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임무였다. 그러므로 무자(無子)하다는 것은 여인에게는 수치임과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죄로 인한 징벌로 해석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이는 무자(無子)한 여자에게는 안팎으로 곤혹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사라역시 무자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남편 아브라함과 더불어 살았지만 그녀에게는 희한하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이는 아브라함의 가계(家繼)에서 보자면 단순히 묵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라는 자신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되는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편을 선택했다. 이는 애굽 여종 하갈을 통해 대신 아들을 얻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주효했다. 여러 번의 시도가 필요 없이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들을 잉태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집안의 가계(家繼) 문제는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그것은 다른 문제의 시작이란 것을 이내 알게 해주었다. 하갈이 득남하기 전까지 비록 사라에게 아들은 없었지만 그것이 하갈의 비웃음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갈이 주인의 아들을 얻게 되자 여주인 사라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미묘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엔 여종으로 사라의 수하에서 그저 고분고분히 시키는 일에 순종하고, 굽신거렸던 하갈이 이제는 주인의 아들 젖을 먹여야 한다고 시키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방안에 앉아 젖을 물리며 사라의 부름에 그다지 적극적이고 공손히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틈만 나면 아들 핑계를 대며 사라의 수하에 복종하는 것보다 주인의 귀한 아들을 양육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라고 둘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라는 부애가 나기 시작했고, 차츰 그것은 어느 정도의 히스테리적인 경향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결국 사라는 하갈을 학대함으로 참다 못한 하갈이 사라의 수하에서 도망쳤기 때문이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얻음으로 사라를 멸시했다. ‘주인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아들도 못낳는 여주인이라니... 나 봐. 몇 번 아닌데도 바로 주인님의 아들을 잉태했잖아. 이제 이 하갈을 통해 난 이스마엘이 주인님의 대를 이을 아들이 되는 거라구!’
그러나 그 아들 이스마엘은 그토록 위대한 아들이었을까? 갈라디아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비록 하갈은 아브라함의 첫 아들을 생산했지만 사실 그 아들은 언약의 아들이 아니었으며, 육신에 속한 자를 표상하고, 율법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했다.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 아브라함의 믿음의 혈통을 이을 아들은 여전히 사라의 태를 통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갈은 보다 크고 넓은 하나님의 계획과 자신의 근본적인 처지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고 오만과 방자함에 빠졌던 것이다. 여주인 사라의 태를 통해 얻을 이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지임을 알지 못한 채 얄팍한 성공에 마음이 높아져 여주인을 멸시한 하갈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하갈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교훈하는 바가 크다. 우리 역시 얄팍한 성공에 도취되어 자기를 높이고 오만방자하게 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보다 무엇이라도 하나 좀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재능이든 육신적인 배경이나 조건이든 좀 나은 것이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내 정도 수준이면 이런 이런 정도는 요구할 수 있지. 이런 정도의 밸류는 갖춘 것이 필요하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 말로 하갈의 오만함과 일치한다.
하갈이 아무리 사라를 멸시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라는 여전히 여주인이란 사실이며, 하갈은 여전히 사라의 수하에 있는 여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아무리 하갈이 우선적으로 이스마엘을 잉태했을지라도 여전히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아들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에게는 그 어떤 언약도 약속되어 있지 않다. 단지, 하갈이 오만방자해진 것은 여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아들을 여주인 보다 먼저 임신했다는 그 자부심 하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이 여전히 여주인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 100세 때 얻을 이삭을 통해 예정되어 있음을 하갈이 알았더라면 과연 하갈이 여주인 사라를 멸시할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그렇게 크게 하나님 앞에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육신적으로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보기에 좀 부족해보이는 형제, 자매님이 있다고 그것을 자기 수준에는 안 맞게 생각하고, 멸시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하갈식 오만’에 빠진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