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작은 충성
보이는 큰 행위보다 숨은 사소한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참된 동기를 알 수 있습니다.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하다고 반드시 큰 것에도 불의한 것일까요? 일상의 현상을 관찰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 신문구독료를 떼먹는다 해서 그가 은행대출이자마저 떼먹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장이 아내를 폭행한다고 그가 밖에서도 폭행을 일삼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업가가 자기 종업원의 임금은 착취하면서도 자선사업에 기부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처럼 작은 것에 불의하다 해서 꼭 큰 것에 불의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틀린 것일까요? 이 말씀은 사람의 행동 속에 한 가지의 일관된 동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큰 것에 정직하다 해서 그가 반드시 정직한 동기를 갖고 있는 것만은 아니란 것입니다.
신문구독료를 차일피일 미루는 것은 당장 자신의 신뢰에 타격을 입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소홀합니다. 그러나 은행대출이자를 미루면 그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그래서 그는 정직하게 갚아나갑니다. 아내를 폭행하지만 밖에서는 신사처럼 굽니다. 그가 정말 신사여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작은 것을 무시하면서 큰 것에 충성하는 이유는 종종 자기의 명성과 평판을 유지하려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목에 신경을 쓰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릇된 동기로부터 얼마든지 큰 것에는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작은 것에 정직할 때 진정으로 큰 것에도 정직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작은 것에 불의하면서 큰 것에 충성되게 보이는 사람의 충성은 실상 참된 정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했다면 이를 우리의 헌금생활에 적용해봅시다.(무엇보다 이 말씀이 불의한 재물을 놓고 한 말씀임을 감안할 때 이 적용은 더욱 타당합니다.) 누군가 소속된 여러 봉사에서 헌신을 보여주면서 꾸준히 회비도 잘 냅니다. 청년회비, 교사회비, 구역회비 등등 그럼에도 십일조는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 그의 정기적인 회비 납부가 정말 정직한 동기(하나님을 섬김)에서 비롯된 것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요? 회비는 드러나지고, 안 낸 사람은 다니면서 내라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십일조는 모든 헌금의 근본이며, 기초입니다. 십일조가 공개된다면 교회에는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만 나오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회비는 정기적으로 내면서도 십일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지 형제자매들의 평판과 판단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이기심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를 섬기는 행위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무지입니다.
종종 이런 사람들은 기타의 회비 내는 것으로 십일조 내지 않는 잘못을 어느 정도 무마시키려 듭니다. 그것은 옳은 일일까요?
어떤 선한 삶을 살던 불신자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행을 들어가며 그것을 참고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였느냐?’ 그것만을 말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타의 회비보다 십일조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모든 회비는 성경이 말하는 연보라는 개념 안에 포함된 것이지만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친히 단도직입적으로 짚어서 요구하신 헌금입니다.(은밀히 말하면 헌금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표시입니다. 십일조는 다른 그 어떤 헌금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헌금의 본질입니다. 그럼에도 십일조를 외면하고 기타의 회비 내는 것으로 거짓 위안을 삼는 사람의 동기가 참으로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상 이는 바리새인의 life style입니다. 죄는 고백하지 않으면서 예배적 행위를 위안 삼아 이를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돋보이는 예배적 행위가 있었지 사랑과 경외는 없었습니다.(그들은 경외한다고 착각했지만.) 그들의 섬김의 동기는 사람들로부터 명성과 섬김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은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진 않았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작은 것에 참된 동기와 정직함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큰 것에는 정직하게 보일 때 사람들은 그를 정직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불의하다고 하십니다. 그 숨은 동기의 거짓과 위선을 알기 때문입니다. 드러나는 큰 일은 얼마든지 자신의 평판과 명성을 위한 이기적인 발로에서 거짓된 정직으로 행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된 정직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동기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그의 드러나는 정직을 참된 정직이라고 인정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