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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평점 :
그닥 책을 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읽는 책은 보통 소설이나 인문과학 서적정도이고 시는 당최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잘 읽지도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책이 한가득 들어 있는 박스를 뒤져보면 그래도 시집 몇권은 나온다.
몇권 안되는 시집중의 한권이 바로 기형도 시인의 잎속에 검은 잎이다.맨날 친구들과 술만 먹고 돌아다니던 시절에 그래도 문학도라고 우리에 맨날 술만 처 먹지 말고 책도 읽으라면서 술에 취하면 시를 읊조리는 주사가 있었는데 그 덕분에 사내 자식이 무슨 시냐고 맨날 구박받던 친구가 있었다.
가끔씩 술에 취해 읊조리던 시는 상당히 우울하면서도 무언가 마음을 후벼파는 느낌을 주었는데 어느날 니가 외우는 시는 누구 작품이냐고 물었더니 기형도 시인의 작품이라고 했다.당시에는 뭐 그런 시인이 있나 보다 하고 아무 생각없이 지나갔었는데 언젠가 헌책방에서 책들을 뒤적이다보니 기형도 시인의 잎속에 검은 잎이란 책이 있어 그 친구 생각이 나서 구입했었다.
<위험한 가계>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대 채 큰 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미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 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엔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이하 중략>
<엄마 생각>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형도의 시들은 대체로 위의 시들처럼 어둠, 외로움, 침묵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런 어둠을 형상화한 시어들인 몇가지 단어들 예를 들면 빗방울,안개 것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기형도의 작품 세계를 그의 문학적 동료였던 평론가 김현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일컬었다.
그의 시들은 현실의 세계를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자주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둡고 고독과 죽음과 연결된 이미지들이 쓰이다보니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고 우울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마치 영화 신씨티의 한장면 처럼 흑백의 대비에 따른 강렬한 느낌을 주는 기형도의 시들은 아마 시인의 내면이 그의 시처럼 어두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은데 중앙일보 신문사 기자이며 시인(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이었던 기형도는 1989년 시집 출간을 준비하던 중 뇌졸중으로 만 스물 아홉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기형도 시인은 어려서부터 매우 가난했다고 알려졌는데 그의 연작 시 <위험한 가계>를 읽어보면 그의 유면 시절이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잘 알수 있는데 60년에 태어난 기형도 시인의 처철한 유년 시절의 가난에 대해 그 가난조차 뛰어난 시로 승화시킨 <위험한 가계>를 읽으면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감탄할 수 있을 지언정 지금처러 풍요로움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 시속에 담겨있는 작가의 심정을 쉽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시는 매우 함축적인 문학이기에 한이 깊을수록 마치 와인이 오랜기간 숙성되야 좋은 술이 되는 것처럼 좋은 시가 나온다.그러기에 기형도 시인의 작품들은 작가의 29년간의 처철한 삶속에소 응축되고 숙성된 사고를 통해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시로 태어나게 되었단 생각이 든다.
기형도 시인의 시들은 그가 살던 시대의 가난과 시대적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면 시 속에 숨겨진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할것이다.하지만 깊은 뜻을 알지못해도 그의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 마음속에 아련함을 준다.시 속의 참뜻을 모른다고 해도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 마음속에 울림을 주는 시가 기형도의 시가 아닌가 싶다.
비록 29살에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이지만 이 시집외에도 소설, 편지, 단상 등이 수록된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과 본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후 발견된 미발표 시 16편과 그 주변 사람들의 글을 담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가 출간되었으니 기형도를 더 알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by cas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