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국내 최초의 전문 추리소설가로 인정받는 사람은 김내성(金來成)이다. 와세다 대학에 유학중이던 그는 한때 매일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염세적인 청년이었으나 1934년 가을, 헌책방에서 일본의 탐정소설 전문지 <프로필>을 몇 권 구입해 읽은 뒤 현상 모집 소설에 단편 [타원형 거울]과 [탐정소설가의 살인]을 투고해 당선된다(모두 일본어 작품). 이 작품은 이듬해인 1936년 3월과 12월호에 각각 수록되었으며 같은 해 유불란이라는 필명(이 이름은 그의 작품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으로 잡지 <모던 일본>에 [연문기담](戀文奇談)을 응모해 입선, 작가로서 순조롭게 출발했다.
<위 단편집에 타원형 거울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에 머무르던 시절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와도 교류가 있었던 그는 1936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추리소설 집필을 시작해 [백가면](白假面)(1937), [마인](魔人)(1938), [광상시인](1938) 등을 발표하면서 한국 추리 문학계의 개척자가 되었으나, '통속성과 대중성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1944년부터 순수소설 쪽으로 관심을 돌러 [인생화보](1947), [청춘극장](1952) 등 추리소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을 발표했다. 한때 일곱 개 지면에 소설을 연재할 정도로 많은 집필량에 시달렸던 김내성은 1957년 과로 끝에 48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내성의 존재에 가려지긴 했지만, 그보다 10년 정도 연상이었던 방인근(方仁根)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애정소설 작가로서 유명했지만 일찌감치 추리소설에 대한 매력을 가졌던 듯 해방 이전 외국 작품(르블랑의 [813의 비밀] 등)을 번역했으며 장비호(張飛虎) 탐정 시리즈를 비롯해 1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대개 치정관계로 인한 원한 등 소재가 빈약했고 독창성도 부족한 편이었으나 뛰어난 스토리 전개로 그 약점을 상쇄한 방인근은 50년대 중반까지 띄엄띄엄 작품을 발표했다.
거의 홀로 활약하다시피 한 김내성이 작고한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국내 창작 추리소설계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동면기에 순문학 작가들이 산발적으로 추리소설을 발표했다. 당시 나온 작품으로는 곽학송의 [백색의 공포](1963), 조풍연의 [심연의 안테나](1966), 송상옥의 [죽어서 말하는 여자('환상살인'으로 개제)](1971)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추리소설에 대한 관심은 잠깐의 외도에 그쳤을 뿐 순문학으로 데뷔한 작가 중에는 오직 현재훈만이 김내성에 이어 순문학과 추리소설을 병향해 집필하면서 고군분투했다. 그는 추리 작가로 자부하면서 <현대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며, 1977년에는 그의 장편 [뜨거운 빙하]와 [흐르는 표적]이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하서 추리선서]에 수록되었다.
1960년대에 등장한 허문녕은 길지 않은 동안 전문 추리작가로서 활동했다. 김내성과 일본 추리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1963년 <야담춘추>에 [암행어사 박문수]라는 단편 시리즈를 연재했으며, 역사추리 [백설령], 에로틱한 하드보일드([번개의 철권]), 스릴러([너를 노린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집필을 시도했다. 짧은 기간 동안 왕성한 집필로 약 200편에 이르는 장, 단편소설을 발표했지만 현재 그의 이름을 서점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면상태였던 추리소설을 녹이고 언더그라운드에서 끌어올린 공로자는 김성종이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경찰관]으로 당선된 그는 1974년 민족의 비극 6.25를 배경으로 삼은 [최후의 증인]으로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현상모집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추리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전성기를 맞이한 그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력적인 집필활동을 하며 한국 추리소설의 외로운 선두주자로 달렸으며, 1992년에는 부산에 세계 최초의 추리 문학 전문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추리 문학관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그의 작풍은 김내성이나 현재훈 등 그보다 앞선 추리작가들이 추구해 온 이른바 '정통추리'와는 궤를 달리 하는 국내 스릴러의 개척자로서 [제5열]을 비롯해 [라인X], [Z의 비밀], [한국 국민에게 고함] 등 국제적 모략을 다룬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한편 해외 추리소설에 관심을 가진 대학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1971년 미스터리 클럽을 창설했는데, 이가형 초대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외국 작품을 번역 소개하며 추리소설의 보급에 나섰다. '훗날 한국 추리 작가 협회'의 모태가 되는 '미스터리 클럽'은 1984년 한 차례에 그쳤지만 신인 추리 문학상을 제정, 정건섭의 [덫]을 수상자로 결정했다. 정건섭은 [덫]을 비롯해 초기에는 알리바이 트릭 등 고전적 형태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80년대 후반부터 [죽음의 천사] 등의 스릴러를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