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 Dangerous Visions >와 그 편집자인 할란 엘리슨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는데, 이번에는 '제임스 팁트리 쥬니어(James Tiptree, Jr.)'라는 작가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조안나 러스의 단편소설 < When It Changed >와 관련해서 절대로, 무조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빼먹고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할란 엘리슨이라는 작가가 논쟁 덩어리, 싸움꾼이라고 소개했었는데, '제임스 팁트리 쥬니어'는 존재 자체가 논쟁꺼리였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조금 긴 글이 될 거 같습니다.
(왼쪽의 사진은 팁트리의 첫 단편집) 제임스 팁트리는 1967년부터 87년까지 활동했던 SF 작가입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이름은 작가의 본명이 아니고, SF 작가로 데뷔하면서 만든 필명입니다. 당시 SF계에 그의 이름이 본명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팁트리는 한번도 팬들이나, 편집자, 다른 작가들을 만나지 않았고, 대중 앞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1977년까지 약 10여년간 아무도 팁트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SF에서도 본명이 아닌 필명을 가명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작가, 편집자, 독자' 사이가 끈끈하고, 공동체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SF계에서(SF 공동체에 대한 논문이나 책도 여러편이 나와있을 정도입니다) 이토록 '유명한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10여년이 넘도록 아무도 몰랐던 경우는 드문 일이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는 몇살인지, 인종은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팁트리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 주변의 친구들도 자기 친구가 팁트리인지 몰랐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이 독특하고, 완성도가 높아 SF 관련 문학상을 자주 수상하면서 작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물론 팁트리는 수상식에도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SF팬들과 작가들, 평론가들 사이에서 '팁트리'가 도대체 누구냐는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제임스 팁트리'가 혹시 여자가 아닐까 하는 논쟁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논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1975년 역시 유명한 SF 작가인 로버트 실버버그(Robert Silverberg)가 팁트리의 < Warm Worlds and Otherwise >라는 책에 머릿말을 썼는데, < 팁트리는 누구이며,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Who Is Tiptree, What Is He?)> 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실버버그는 그 글에서 <오만과 편견>, <센스 앤 센서빌리티> 등의 여성 작가인 '제인 오스틴'과 남성 작가인 '헤밍웨이'를 비교하면서 남자는 절대로 제인 오스틴 같은 글을 쓸 수 없고, 여성이 헤밍웨이 같은 글을 쓸 수 없듯이, 여성은 절대로 팁트리 같은 글을 쓸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당시에 실버버그 역시 팁트리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10여년간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있던 팁트리는 1977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우연하게 존재를 드러내게 됩니다. 팁트리는 한번도 대중적인 공간에 나오지 않고, 누구와도 대면해서 만나지는 않았지만, 팬들이나 다른 작가들과 끊임없이 편지 교환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한동안 그런 편지 교환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팬잡지(SF에는 팬들이 운영하는 팬잡지가 상당히 다양하게 많습니다)에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글을 보냈는데, 그 편집자가 팁트리가 살고 있는 신문의 '부고란'을 뒤져보고 나서 작가가 누구인지 눈치를 채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의 친구가 전화해서 '네가 팁트리였냐?'고 묻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때서야 팁트리는 이제 자신을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솔직히 털어놓는 편지를 보내는데,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밝힌 상대가 바로 '어슐러 K 르귄' 이었습니다. 팁트리는 스스로 작가이면서도 어슐러 K 르 귄을 흠모하는 팬이었는데, 1971년 르 귄의 < The Lathe of Heaven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안 된 거 같습니다)을 읽은 후 정중한 팬레터를 보냈고, 이에 르 귄이 '농담'으로 답장을 하면서 친해져서 계속 편지를 주고 받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 지난달, < Fantasy & Science Fiction > 이라는 잡지에 둘이 주고받은 편지가 실렸는데, 팁트리의 전기 발간을 앞두고 '예고편' 처럼 실어놓은 편지들을 보면 너무 재미있습니다. ㅎㅎ
참고로, 이 < Fantasy & Science Fiction >이라는 잡지는 1949년부터 지금까지 발간되고 있는 SF 잡지인데, 한때 일본에서 < 공상 과학 > 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발간되면서, 그 이름이 한국으로 넘어와서 SF를 '공상 과학'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썰'을 제공하고 있는 잡지입니다. '과학 소설'을 왜 한국에서는 '공상 과학'으로 부르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지만, 가장 유력한 근거를 가진 '썰'입니다.
저도 그 전에는 한번도 'SF 잡지'를 사보지는 않았는데, 지난달 잡지 표지 머리에 '팁트리와 르 귄의 편지들'이라고 실려있어서 냉큼 사봤지요. 왼쪽이 둘 간의 편지를 실은 지난달 잡지 표지입니다.
르 귄 역시도 팁트리의 책들은 좋아했지만, 그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팁트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편지 내용을 보면 르 귄은 처음 팁트리의 책을 읽었을 때 28살쯤 된 총각이라고 생각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번은 팁트리가 편지에서 '어릴 적 1차 대전 때'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르귄은 놀라면서 도대체 몇살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고 답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둘은 마치 연애라도 하듯이 서로를 찬양하고, 격려하고, 농담을 주고 받고,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도 하고(둘 다 '필립 K 딕'의 광적인 팬이었습니다), 작품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르 귄은 '팁트리의 사생활'을 존중했기 때문에 단 한번도 '당신이 누구냐'고 물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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