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럴 때가 있는 거다. 같은 책을 가지고 페이퍼 두 개 정도는 쓰고 싶어질 때. 그런 책을 만나면 그냥 즐겁고 함께 나누고 싶고 그래서 자꾸자꾸 얘기하고 싶어지고 그런다. 그게 뭐 특별난 책이라서는 아니고 유독 아름다운 문체나 멋들어진 문장이나 대단히 고상한 내용을 담아서도 아니다. 그저 내 맘의 주파수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며칠 전에 후다닥 유쾌하다고 쓰고 나갔던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이란 책은, 유쾌를 넘어선 그 무엇인가가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몇 줄 꼭 더 써야지..라는 마음으로 8월 마지막날 토요일,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노트북을 열고야 말았다.

 

 

 

 

 

 

 

 

 

 

 

 

 

 

 

 

 


 

누가 봐서는 정신 나갔다고 보기 딱 알맞는 잭과 웬디라는 부부가 미국 버지니아주 한 귀퉁이에 다 스러져 가는, 인구라봐야 고작 몇 천명 남짓한 시골구석의 옛 탄광촌 빅스톤갭에 헌책방을 떡하니 여는 사고를 치고나서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책 이야기이다. 그러나 읽다보면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마음을 울린다.

 

 

잭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생각에 잠긴 말투로 던졌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꽤 오래 머문다고 가정하면 근처에 당신이 가르칠 많한 대학이 하나 있긴 하던데... 아, 그렇다고 지금 당장 장기계획을 세우자는 건 아니고."

갑자기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그렇죠, 지금 무슨 장기 계획이에요."

"언젠가 책방을 내면 되지." "흠. 언젠가는요."

우리는 조용히 콘칩을 씹었다. 다음 순간, 잭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 언젠가가 오늘이라면?"

 

이렇게 호흡이 잘 맞는 부부라니. 갑자기 부부라는 연을 맺어보는 것도 괜챦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잭과 웬디는 정말 착착 맞는다. 20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도대체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부부이자 친구사이 같아서 책 읽는 내내 질투까지 났더랬다. 이런 사람 만난 웬디라는 여자, 운이 너무 좋은 거 아냐? 나에게도 그런 운이... (쩜쩜쩜..)

 

 

솔직히 말하면, 열정이 도움이 되긴 한다. 그러나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노동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행복을 좇으라"는 말에는 숨은 뜻이 있다. 알고 보면 그 말은 "행복을 좇으면,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뜻이다. 가끔씩 자기도 언젠가는 책방을 열고 싶다고 말하는 손님을 볼 때면, 그 사람의 열정에서 과거 우리 자신의 순진함을 발견한다. 그들도 긴 노동시간과 적은 수입을 어느 정도 짐작하겠지만, 끔찍한 화재라든가 고약한 게릴라 흥정꾼, 사별한 일들의 아픔, 교도소와 맺게 될 인연에 대해선 까맣게 모를 것이다. 우리도 그랬다. 처음에는 까맣게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잘 안다. 알고 보면, 책방에서 만나는 가장 무섭고 가장 힘들고 가장 슬프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은 책이 아니라 손님들 안에 담겨 있다.

 

 

뭐든 꿈과 현실은 다르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고 파고 들었을 때 그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산적해 있을 거라고 실제적으로 예상하기는 쉽지 않은 게다. 아마 어렵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과 그러나 잘 해낼 수 있을거야 라는 더 막연한 결의? 정도로 꿈을 좇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 많겠지. 나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헌책방을 운영하는 잭과 웬디는 헌책을 찾아 혹은 기부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 속에서 인생을 본다고 했다. 그들의 속사정이 여과없이 드러날 수 있는 곳. 그 속에서 헌책방 주인은 중심을 잡고 들어주고 말없이 차 한잔을 따라주며 그들의 위안이 되어주는 것. 그런 것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들고 의미있는 일인가를 누누이 말하고 있다.

 

 

당황해서 말이 막 쏟아져 나왔다. "물론 아버님께서 모은 웨스턴 소설들을 소장하고 싶지 않으시다는 전제하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개인적인 애착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버님이 그걸 정말 좋아하셨거든요. 알고 계시겠지만요. 아니, 알고 계셨겠지만. 아니, 알고 계시겠지만. 죄송해요." (...중략...)

"분명 좋아하셨어요." 그녀의 말투가 다소 거칠어졌다.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해주면 꼭 챙겨 보셨죠. 그런데 모르고 계셨군요. 아마 아버지가 절대 말 안하셨을테니까요. 당신들 같은 친구를 둔 걸 자랑스러워하셨으니까요. 배운 사람들 말이에요. 교육을 항상 강조하셨거든요. 저를 보세요. 아빠가 기를 쓰고 대학까지 마치게 해줬쟎아요."

저게 웃음일까, 아니면 흐느낌일까? "아빠는 읽을 줄 모르셨어요. 여기서 사 가신 건 전부 다 재향군인회에 갖다줄 책들이었어요. 아마 다 합쳐서 수백 권은 기증하셨을 거예요." (...중략...)

하지만 손님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다정하게 꼭 쥐었다. "이미 많은 걸 해주셨어요. 두 분께서 지난 몇 년간 아빠한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느끼게 해주셨쟎아요. 그래서 아빠가 여기 오는 걸 그렇게 좋아혔던 거예요. 신의 은총은 두 분이 받으셔야지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가장 가슴이 찡했던 에피소드였다. 어쩌면 '사람'이 파는 '종이책'이 줄 수 있는 큰 은혜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글자를 못 읽는 수다쟁이 땅꼬마 윌리는 와서 쉴새없이 떠들면서 책 속에서 위안을 얻고 그 책을 파는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존엄성을 느끼며 마지막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는 거. 책 이야기 아니고는 이런 얘기가 감동을 줄 수 있겠나 싶다...

 

 

잭은 당장 테이블에 앉아 꾸러미를 풀어보았다. 안에 든 것은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저지대에서 생산되는 최상급 싱글몰트 위스키였다. 잭이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로 특별 주문을 해야 구할 수 있는 상품이었고, 우리 주머니 사정으로는 왠만해선 맛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선물에는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친애하는 잭과 웬디, 당신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우리가 뭘 하고 지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마을에서 제일 귀한 보물을 위해 보물 사냥 좀 해봤어요. 맛있게 드세요!"

우리는 정말 정말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다.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진심으로 오랜만에 부러운 사람들이 생겼음을 알았다. 수억만금을 가졌거나 세상을 호령하며 지내거나 상당한 지위에서 명예를 누리거나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은 그냥 아무 느낌없는 부러움이다. 저런 위치면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던가 저 정도 되면 사람들에게 떳떳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속물적 근성이 결부된 부러움일 뿐이다.

 

하지만 잭과 웬디에 대한 부러움은 다르다.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부러움.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사람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전심을 다해 사는 사람들. 함께 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즐겁게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책이 늘 함께 하는 사람들. 부럽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 이 즈음, 따뜻한 부러움으로 마음이 괜스레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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