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채의 이 책 시리즈는 가벼워서 좋다. 어제의 헤세의 글을 다 읽고 깜빡 잠이 들어 출근할 때 들고 갈 책을 잊어버리고 선택하지 않은 바람에, 아침에 부랴부랴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잠깐 망설였다. 그냥 가져가지마? 흠... 그러나 책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 급하니까 가장 가벼운 걸로 나온다는 게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가벼운 만큼 내용도 가벼워서 오늘 오고가는 길에 끝나지 않을까 싶다.

 

 

생각컨대, 인간이란 본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자, 오늘부터 달라지자!' 하고 굳게 결심하지만, 그 어떤 것이 없어져버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형상기억합금처럼, 혹은 뒷걸음질쳐서 구멍 속으로 숨어버리는 거북이처럼 어물어물 원래 스타일로 돌아가버린다. 결심 따위는 어차피 인생의 에너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옷장을 열고 팔도 제대로 끼어보지 않은 슈트와 주름 하나 없는 넥타이를 보면서 그런 사실을 통감했다. 그러나 반대로 '딱히 달라지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희한하게 사람은 달라진다. 이상한 얘기지만.

 

 

역시나 하루키. 일상의 작은 틈새에서 어쩜 이렇게 마음을 잘 읽어내는 것이냐. 특히 저 표현 '어물어물'에서 팟 웃어버렸다. 정말 모양새가 그런거다. 확 안 하지도 않고 뺄까 말까 뺼까 말까 망설이면서 점점 뒤로 물러나는 꼴이라니. 그러면서 온갖 변명을 다 대는 것이지. 이러쿵저러쿵.

 

올해만 해도 내가 굳게 결심한 게 몇 건이더냐. 물론 건강상의 문제나 회사의 일복이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수첩 한귀퉁이에 적혀진 그 '결심'이란 것들 때문에 무지하게 가끔 무거운 기분이 된다는 거, 부인할 수가 없다. 어쩌면 난, 할 수 없는 일 내키지 않는 일을 결심이라는 항목에 밀어넣어 자기에게 강제하고 있는 거 아닐까.. (라고 또 변명..ㅜ)

 

 

우리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 아직 밤이 되기는 일렀고 손님은 우리와 그 사람들뿐이었다. 아마 남자는 이십대 후반 여자는 이십대 중반쯤. 둘 다 인물도 괜챦고 도회적이면서도 깔끔한 옷차림에 굉장히 스마트한 분위기의 커플이었다...(중략)...남자는 '슬슬 꼬셔볼까' 생각하고 있고, 여자도 '그냥 넘어가줄까' 궁리중이다. 잘되면 식사 후 어딘가의 침대로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페로몬을 머금은 안개가 자욱히 떠있는 것이 보인다...(중략)...

 

그러나 그런 약속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분위기도 프리모 피아토가 나오자 운산무소, 문자 그대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쪽 남자가 '츠르릅 츠르릅!' 하고 엄청난 소리를 내며 파스타를 입안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정말로 압도적인 소리였다. 계절이 바뀔 때 지옥의 문이 한번 열렸다 닫히면서 나는 것 같은 소리. 그 소리에 나도 얼어붙었고, 내 아내도 얼어붙었고, 웨이터도, 소믈리에도 얼어붙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도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숨을 삼키고 모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남자만은 무심하게 츠르릅 츠르릅 하고 너무도 행복하게 파스타를 먹었다.

 

이 대목에서 완전히 빵 터져서.. 통근 버스 안에서 소리를 죽이고 웃어야 했다. 멋진 남녀. 무르익은 분위기. 아름다운 레스토랑... 그리고 급작스러운 소음. ㅎㅎㅎㅎ 당사자의 무심함이 더 웃긴. 그러고보면, 가끔 이런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절대 내지 않을 것 같은 소리를 내는 멋진 사람들. 트림이라든가, 방귀라든가... 먹을 때 후루룩 짭짭이라든가. 그런 일련의 경험들이 떠오르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지더라는. 아침 출근길이 참 유쾌(?)해졌지 뭔가.

 

아 일해야지. 점심시간이 길었네...하루키의 에세이가 소소하게 즐거워서 말이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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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3-08-0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결심의 재발견'을 노리고 있는거죠. 사람은 변한다고 생각해요. 일단 생각만말고 움직이며 몸과 뇌와 마음을 잔뜩 써주는거죠.

비연 2013-08-09 16: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생각보다 움직임이 중요한 듯... 다시한번 해볼까봐요 그렇게 결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