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모래와 별들 청목 스테디북스 97
생 텍쥐페리 지음, 김채영 옮김 / 청목(청목사) / 2004년 12월
절판


"폭풍우와 짙은 안개, 눈 등은 종종 자네의 비행을 방해할 걸세. 그때는 그저 이런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겪었다고 생각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 이겨냈으니 나도 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이말은 비단 비행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것 같습니다. 인생도 이와 같은거겠죠. 살다보면 폭풍우와 짙은 안개, 눈과 같이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이겨냈고 또 나 자신도 이겨낼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쪽

만약 어떤 비행기가 아무런 이상 없이 비행 중이라 해도 조종사는 항로의 어느 부분의 풍경이라도 단순하게 여기질 않는다. 대지와 하늘의 색깔, 바다 위를 부는 바람, 황금빛 황혼 녘의 모든 구름을 감탄하며 바라보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자기가 관리하는 대지를 돌아보며 여러 가지 징조徵兆로 곧 봄이 올 것이라든가 비가 내릴 것과 땅이 얼지 모른다는 것을 예견하는 농부처럼, 유능한 조종사도 눈이 내릴 조짐이나 안개가 낄 기후 변화 등을 안다. 처음에는 대자연이 오만스럽게 고통을 주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엄격함과 순응할 힘을 주는 것이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하늘이 만든 위대한 재판정에 홀로 남겨진 조종사는 산, 바다, 폭풍우라는 세 가지의 자연의 신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쪽

마침내 조종사로서 종사한지 12년이 되던 어느 날, 다시 한 번 남대서양 상공을 비행하던 중 오른쪽 위에 있는 엔진을 끊어 버린다는 짤막한 통신을 보내 왔다. 그리고는 영원히 침묵하였다.
그때의 엔진 정지 소식은 그렇게 위험하다는 낌새를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침묵이 10분간 계속되자 파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의 모든 비행장과 항로를 지나는 모든 무전국들이 통신기를 개방한 채 가슴을 조이며 신호信號를 기다렸다.
10분이라는 시간이 일상생활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시간이지만 비행 중에 있어서의 10분은 엄청난 시간이었다. 이 침묵의 10분은 큰 불행을 일으킬 충분한 시간으로 이미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아야 했다. 운명의 신이 그의 삶을 심판했을 테고 그는 그 판결에 대해 순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과를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판결의 통보가 오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약해지는 희망과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는 이 침묵 뒤의 결과를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런데도 우리들은 기다렸다. 시간은 가고 그리고 조금씩 늦어졌다. 메르모즈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자신 있게 다니던 남대서양 속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곡식을 모두 걷둔 후 그 밭에 누워 자는 농부처럼 메르모즈는 자기의 길에 숨어 자고 있을 게 분명했다.-.쪽

한 동료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면 그래도 그는 자기의 임무와 직책職責을 다하다 죽었기에 훌륭했다고 위안을 한다. 그는 분명 자기의목적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가 없는 우리의 삶은 빵이 없는 만큼 절실하지는 않다. 우리 같은 직업의 종사자들은 동료들과 다시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리는 버릇이 있다. 조종사는 파리에서 산티아고까지 지구 위의 곳곳에 흩어져 있어 서로 만나 이야기라도 나누려면 그냥 기다려야 했고, 또 동료가 동일 항로를 비행하다 우연히 만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 카사블랑카, 다카르 혹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여러 해만에 만나 잃어버렸던 이야기를 다시 나누며 지나간 일들을 교환交換하고는 다시 각자의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한다. 대지는 이처럼 삭막하기도 하고 동시에 풍요롭기도 하다. 가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언제고 꼭 다시 갈 수 있을 비밀의 정원을 생각하는 것처럼, 직업적인 현실의 부딪침으로 동료들의 생각을 많이하지 못한다. 그러나 친구들이자 동료들은 어딘가에 있다. 그게 어디인지는 모르고 조용하게 잊혀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믿음직하지 않는가! 우연히 서로가 지나치면 아름다운 믿음의 불꽃을 피우며 어깨를 잡아 흔든다! 그렇게 우리는 기다리는 습관이있다.-.쪽

자각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은 진정한 의미로 살고픈 욕망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성취하는데 선택하는 방법이 환각에 불과한 예가 거의 대부분이다. 군복을 입고 전쟁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는 것으로 삶 속에 휘말릴 수도 있다.
인간이 동료들과 함께 빵을 나누어 먹고 자기들이 추구하는 바를 구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자기 성취적인 방법 중 하나라는 주장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빵 때문에 인간은 죽는다.
나무로 만든 우상을 파헤치고 범 게르마니즘이나 로마제국 같은 고대 신화神話를 재현시키기는 쉽다. 게르만인들은 자신이 게르만인이며 베토벤의 한 핏줄이라는 것으로 흥분할 수도 있다. 기차 기관사도 술을 마시면 취하게 된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기관차에서 베토벤을 탄생케하는 일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우상은 장식적 우상이다. 과학의 진보나 병자의 치료를 위해 죽어 가는 인간은 그 죽는 순간까지 인생에 봉사奉仕를 한다. 영토의 확장을 위해서 죽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다. 그러나 현대 전쟁은 그것이 부양코자 하는 것을 파괴하고 있다. 적은 양의 피로서 인생의 진로를 민족의 혼속에 주입시키던 시대는 지났다. 가스와 원자폭탄으로 치러지는 전쟁은 전쟁이 아니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수술과 같은 것이다.
양편이 각각 콘크리트벽 뒤에 숨어서, 밤이면 밤마다 공군 부대로 하여금 상대편의 심장에 폭탄을 투하하고 공장을 파괴하여 그들의 생산 능력과 시장의 기능을 마비시키라는 명령 외엔 할 일이 없는 전쟁에서는 나중에 쓰러지는 편이 승자가 된다. 그러나 최후에는 양쪽 모두 쓰러지는 것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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