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러브 노섹스 2
윤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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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나 사람들이 왜 아이를 낳는지 알 것 같아요. 관습이나 인생의 계획, 욕망 같은 것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냐. 물론 본능적인 이유도 있죠. 죽는 것,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서 무언가를 남겨두고 싶다는……. 그러나 그것만은 아녜요. 아이에 대한 욕망은 사랑 자체의 욕망이 아닐까요? 사람들에게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듯이 사랑도, 사랑의 결정물도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해요. 이렇게 미친 듯이 사랑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것, 그것만은 참을 수 없다고!"
그녀는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그가 그녀의 몸 속에 쏟아놓은 정액이 그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을 한창 받아들이고 있을 때, 그러니까 절정이 닥쳐오려 할 때 난 생각해요. 당신이 아직 내 속에 있을 때 나의 두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가 맺혔으면 좋겠다고. 그 동그랗고 탄탄하고 생생한 것이 우리가 서로 끔찍이 사랑했다는 걸 증명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임신은 사랑의 증명사진 같은 건가요?"-.쪽

사실 임신한 여자들이 풍기는 성적 매력은 독특하다. 보통 임신한 여자들은 섹시하지 않다고 얘기되지만 그건 일종의 터부다. 사회가 그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만든. 누군가 임신한 여자들을 보며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나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이데올로기다. 학생이 학교를 잘 다녀야 한다거나 가장이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와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혼해본 적이 있는 남자여서 임산부들에게서 날렵한 여자들의 그것과는 다른 성적 매력을 찾아낼 수 있다.
언젠가 신디 크로포드의 임신 7개월 된 누드를 보며 놀란 적이 있다. 부푼 젖가슴과 부푼 배가 이어지는 선에서 새끼를 뱃속에 담아 키우는 포유류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거침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이다. 날카로운 각은 다 사라지고 둥글 대로 둥글어진 그 실루엣은 만월의 달을 반쪽으로 쪼개놓은 듯했다. 어떻게 보면 괴상하고 어떻게 보면 매혹적인 기묘한 아름다움이었다.
적당히 부풀어서 육감적인 젖가슴으로 변한 시연의 가슴을 봤을 때도 그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녀의 임신이 그들의 관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데도 욕망은 욕망대로 길을 갔다. 지금 생각하면, 남자가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 여자의 몸을 보며 뜨겁고도 애틋한 욕망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그가 생리 중인 여자에게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취향과 통하는 듯하다. 질의 질감이 다르다는 것, 여자의 상처를 무자비하게 파헤치는 가해자가 된 듯한 꺼림칙함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즉 생리 중인 여자는 어떤 의미에선 수정에 실패했음을 증명하는 여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수컷의 욕망이 본능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웃을까. -.쪽

모든 것이 끝난 후 그는 잠들어버렸다. 짧지만 깊은 잠에서 깨어나니 그녀 역시 그를 향해 누운 채 잠들어 있다. 그는 침대 쪽 벽에 붙은 통거울과 약간의 때가 묻은 커튼, 목조 화장대 등을 둘러봤다. 문득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생각났다. 주인공 남자가 실종된 여자를 찾아 안고 동굴 속으로 들어갈 때 펄럭이는 여자의 흰 드레스와 너무 아름다운 사막은 지금도 거슬리지만 남자가 사랑의 결과로 전신에 화상을 입는다는 설정은 좀 달랐다. 통속적이되 생생하게 통속적이라고나 할까. 치명적인 사랑의 결과로 그가 상처를 입었다기보다는 상처 때문에 그의 사랑이 치명적인 것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거나 현실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영국인 환자에겐 상처가 현실인 한 사랑 역시 현실이다. 그는 절대로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의 파워라기보다는 상처의 파워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계 역시 상처의 자장 속으로 들어선 것일까. 아이를 잃었다는 상처가 그들의 관계에 어떻게 작용할까. 정말 그것 때문에 아이스크림처럼 가뿐하고 감미로웠던 시연이 고전적으로 변한 걸까.

=>사랑에 따라 영화를 보는 시각도 달라지네요. 남자의 심경이 변했다는것을 뜻하는것일까요?-.쪽

"은재야! 너답지 않게 왜 이러니? 너처럼 명석하다 못해 영악한, 무엇이 되고 무엇이 안 되는지 너무 잘 아는 아이가. 왜 이렇게 억지를 쓰지?"
"내가 명석하다구요? 한때나마 그렇다고 생각했던 나의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돈데요, 아아 요즘은."
"생각해봐. 우린 거의 매일 함께 있다시피 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난 하루 종일 너만 생각해. 너의 얼굴, 너의 입술, 말투, 목소리…… 그리고 너의 몸, 성기…… 질 안의 감촉들. 그뿐인가. 네 속눈썹, 네 콧날의 굴곡! 그래, 나야말로 너에게 중독돼버렸어. 심지어 너를 생각하다 계속 일에서 실수하는 날도 있을 정도야. 난 이미 너 없이 못 살게 돼버렸어. 이보다 더 명백한 게 어딨니?"
"됐어요.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오빠가 그토록 긴 설명을 해야 하는 이유, 모르죠? 그건 우리에게 무언가가, 결정적인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 하나가 없기 때문에 다른 아홉 가지를 끌어들이는 거라구요."-.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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