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윤수현 지음 / 경향미디어 / 2006년 1월
품절


수평선 너머 검은 바다가 별천지가 되어 반짝이고, 아스라한 언덕 위에 고향의 노을이 찾아와 있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살랑거리는 억새풀 사이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더니, 알 수 없는 커다란 물체가 하늘 높이 치솟는 것이었다.
"푸드득, 푸드득……."
힘찬 날갯짓이었다.
"……."
이럴 수가!
나는 지상으로 두 뼘 남짓 얼굴을 내민 창가로 다가가 넋이 나간 듯, 노을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붉은 도시의 바다 위로 힘차게 솟아오르는 것은?
그것은 분명 날개 달린 새도, 그렇다고 작은 비행기도, 하늘을 날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
달팽이……. 달팽이였다. 그것은 분명 달팽이였다. 더듬이를 쫑긋 세운 달팽이가 힘차게 하늘로 도약하더니, 붉은 노을 너머에 있는 하늘무지개를 건너고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높고 푸르른 하늘을 꼭 날아보고 싶은 간절한 그리움마저 가슴에 묻어버리고, 이제 딱딱하게 굳어버린 천형의 업보를 평생 짊어지고 이 모진 세상을 홀로 살아가야만 했던 불쌍한 달팽이였다.
그런데 그 아픈 등골에서 목련꽃처럼 화사하고, 눈꽃처럼 새하얀 순백의 날개가 돋아나 높은 창공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쪽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드디어 창밖의 빨간 십자가들이 붉은 여명에 동백꽃처럼 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침묵의 십자가들은 그렇게 내게 혼란과 갈등만을 부추겨놓고 모두 소멸해버렸다.-.쪽

소중한 사람은 어느덧 먼 바다가 되어 떠나려 하는데, 이제야 어둠이 내리는 강가에 앉아 작은 종이배를 띄우려는 내 어리석음을 깨달은 것이다.-.쪽

누나는 너무도 순수한 하양 꽃망울 같았다. 세상 모진 풍파를 참고 견뎌내며, 언젠가 아이를 위해 순백의 사랑이 꽃피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마음의 날갯짓이 너무도 아름다운 천사였다. 하지만 그 천사가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이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냐! 응석받이 아이를 자신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과 편견의 벽에 가둬버린 곳이야!"
"그리고 아이의 소박한 웃음마저 빼앗아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어버린 곳이기에 너무도 싫어!"
"알아! 속내는 모두 그렇지 않은 줄 알지만, 알면서도 아이를 저렇게 만들어버린 것이 더 나쁜 거잖아!"
손으로 감싸 쥔 컵이 또다시 맑은 파열음을 내며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랬다. 못난 가족들의 이기심 때문에 주눅이 들어버린 아이는 학교조차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세상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아이에 대한 편견과 우리 가족의 철저한 무관심이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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