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 - 제19회 부커상 수상작, 개정판
아룬다티 로이 지음, 황보석 옮김 / 문이당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이야기는 작가에게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와 이 세상을 덮친다.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말해 줄 입술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런 이야기는 무딘 사람도 차마 발을 뺄 수 없다.  

"이 소설은 저의 세상이며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라고 작가는 서문을 연다. 비겁하지 않다. 이건 단지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는 무관하다고 미리 숨어버리지 않는다. <작은 것들의 신>이 작가의 유일한 소설로 남아버린 것도 더이상 중언부언하며 자신을 설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아도 되는 작가의 특권인 것같다. 

건너서든 직접적으로든 인도 사람을 알게 되는 기회가 있으면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저 사람은 카스트의 어느 계급에 속해 있을까? 였다. 인도에 대하여 배울 때 그 불합리하고 불가항력적인 계급의 피라미드는 구두점처럼 따라붙었다. 한국에 와 있는 인도 사람을 소개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의 계급을 왕관처럼 덧붙였다. 저 사람은 브라만이란다. 브라만. 저 머나먼 끝 대척점에는 불가촉천민이 있었다. 가촉민들이 다니는 길을 걸을 수도 없고 우산을 쓸 수도 없고 말할 때 내뿜는 입김까지 통제해야 하는. 그 계급의 틀에 의구심을 갖고 반역을 꾀하는 얘기 대신 다만 사람으로서 누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의 세상의 통념을 잠시 잊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하고 끝난다.  

라헬이 아예메넴으로 돌아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총소사를 퍼붓듯 성긴 흙을 파헤치며 비스듬히 내리꽂히는 은빛 빗줄들.
-p.14 

18분의 간격을 두고 태어난 남매쌍둥이 라헬과 에스타가 '늙지고 젊지도 않고 그러나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나이'인 서른하나에 고향인 아예메넴으로 돌아오면서 슬픈 회고는 시작된다. 작가의 시어 같은 묘사들은 뭉근하게 이야기를 적신다. 그 어떤 덧붙임도 함부로 내다버릴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소중한 이야기. 절로 젖어든다. 

기억이 잔잔한 차 빛깔 마음에 폭격을 가하듯 잔잔한 차 빛깔 웅덩이들로 쏟아져 내리는 융단 폭격.
-p.23 

이제는 손을 흔들고 달아난 유년의 기억들이 와르르 쏟아져 꽂힌다. 쌍둥이들의 어머니 야무는 그들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이혼하고 옥스퍼드 대에서 유학하고 돌아과 공산주의의 베일까지 뒤집어쓴 오빠 차코와 제국주의 곤충학자와 사별한 어머니가 있는 친정 아예메넴으로 돌아온다. 지극히 불명예스럽게. 쌍둥이의 외가는 피클 공장을 소유하고 기독교주의와 공산주의의 세례까지 맞춤하게 받은 누리는 자들의 집안이다. 자비와 이성으로 변장한 치사하고 졸렬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의 구현. 그것은 공고하고 그럴 듯한 껍질로 포박되어 있다. 쌍둥이 라헬과 에스타, 그들의 어머니 아무는 일종의 침입자로 간주된다. 삼촌 차코가 전처와 그 사이에서 낳은 딸 소피 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고 작가는 얘기한다. 인도인으로 옥스퍼드에까지 유학한 차코의 전처는 영국인이다. 그 사이에서 낳은 피부 빛깔이 옅은 딸은 스스로를 반쪽 인도인이라고 자랑스럽게 고백한다. 쌍둥이는 소피 몰 앞에서 묘한 열등감을 느낀다.  

이 소설은 끊임없이 시제를 혼합한다. 서른하나의 라헬과 그 서른하나였던 엄마 아무의 시간. 달아난 유년은 완강하게 현재로 밀려온다. 이미 사랑을 잃은 엄마. 이미 죽어버린 엄마. 불가촉천민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엄마. 저도 모르게 그 사랑을 방조하고 도와주기까지 하고 심지어 외사촌 소피 몰을 죽게 하고 엄마의 사랑까지 밀려나게 하는 쌍둥이들. 아무도 이것을 이렇게 의도한 이는 없다. 삶은 미리 결론을 안고 미친듯이 달려와 파고든다. 책장에서 시린 바람은 갈피짬마다 숨었다 나오려든다. 차마 한번에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 잠시 심호흡을 한다.  

이야기의 끝은 귀향한 라헬로 돌아오지 않는다. 낯선 여관에서 몸이 퉁퉁 불어 서른하나에 죽은 엄마가 사랑했던 그 시간으로 맺는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랑. 집안에 불명예를 안겨 주고 결국은 남자를 죽게 할 그런 사랑. 엄마가 했던 사랑.  

 

그녀가 다시 그 말을 하려고 돌아섰다. 

'나알리(Naaley).'
 내일.

 

너무나 작은 것밖에 말할 수 없고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백만 개의 별을 주고 싶은 이야기. 찬란한 패배자에 대한 이야기. 그러기에 신을 원망하고 신에 대하여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 작가가 얘기했듯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삶같다. 이 책을 읽는 일은 하나의 삶을 사는 일처럼 고달프고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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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2011-12-07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작은 것"들에게도 "신"이 존재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고나서 제목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blanca 2011-12-08 00:02   좋아요 0 | URL
like님 역시 읽으셨군요! 저는 사실 그다지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아, 이런 소설이라니요!

비로그인 2011-12-0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숨만 쉬고 있었어요.
블랑카님, 저도 이 책을 읽어야겠어요.

blanca 2011-12-08 00:04   좋아요 0 | URL
강추 또 강추합니다. 수다쟁이님은 어떤 느낌을 가지실까요? 정말 읽고 나면 왜 부커상을 받았는지(사실 이 상의 성격은 잘 모르지만--;;) 심사위원들 손까지 잡아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도 그랬고 부커상 수상작품은 정말 반짝 반짝 빛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재미있어요. 슬프기만 한 소설이 아니라 읽다가 빵 터져 버릴 정도로 웃긴 대목도 많답니다. 작가 능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1-12-0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매번 들었다놨다 했었어요, 블랑카님. 아룬다티 로이의 유일한 소설이랬던 것 같아요. 저는 늘 <9월이여, 오라>가 더 끌리긴 했지만요. 대학 때 카스트에 대한 레포트를 썼었는데 그때가 막 생각나네요. 논문수준이 아니어서 지극히 일반적인 지식으로 썼었겠지만 계급으로 나뉘는 삶과 사랑을 상상하지 못하겠어요. 살만 루슈디랑 같이 사서 꼭 읽어봐야겠어요. 그리고 저도 어떤 형태로든 "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blanca 2011-12-08 22:00   좋아요 0 | URL
<9월이여 오라>가 아룬다티 로이의 에세이였군요!! 오, 놀라워요. 표지의 사진도 너무 아름다워요. 역시 무언가 다른 사람이긴 한것 같아요. 전혀 비겁하지 않은. 살면거 그러기 참 힘들잖아요. 카스트에 대한 레포트도 쓰셨어요? 아, 그렇군요. 아직도 일본은 카스트 간 자유로운 결혼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제3세계 작가들은 절망에 대한 통찰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북극곰 2011-12-0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이사가더라도 끝까지 데리고 다닐 녀석으로 책장 깊숙히에 잘 챙겨두고 있어요.소설이 한 권 뿐인건 아쉽지만 그녀의 행보엔 진정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blanca 2011-12-08 22:01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아, `끝까지 데리고 다닐 녀석`이라는 표현이 참 따뜻하네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이고 싶다는^^;; 아, 그래요.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어 놓아야 한다는 욕심과 의무가 있다면 참 고달프겠지요. 그녀의 행보에 저도 박수를 보냅니다.

마녀고양이 2011-12-0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 예정이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듯이, 거꾸로
언젠가 죽을 것을 알기에 한순간 한순간 죽을 듯이 소중하게 살아가는 것도
동일한 맥락일거 같아요, 삶이란게 참 동전의 양면 같아요.

누군가의 유일한 소설이라,,, 어쩐지 짠하네요.

blanca 2011-12-09 21:01   좋아요 0 | URL
이 작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떤 책 읽을까 둘러보다 소설가 한강이 추천하는 책에 있어 무심코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작가 앞에서는 감히 `소설의 죽음` 같은 얘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온몸에서 자신이 가진 것, 얘기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뽑아내어 이제는 더이상 소설을 쓸 수 없나봐요. 아쉽기도 하지만 참 근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1225979 2014-03-2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입니다. 저도 같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쓰다가 여운이 남아 한 바퀴 돌던 중에 좋은 글을 만났습니다. 기쁜 마음에 덧글 남깁니다. 시간 나시면 제 블로그에 오셔서 작은 것들의 신에 대한 제 감상도 읽어주세요.

제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anssjaj 입니다.

좋은 책인데, 많이 알려지지 않아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는 분을 뵈니 참으로 반갑네요.

blanca 2014-03-24 18:06   좋아요 0 | URL
블로그 방문해서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참 아쉬웠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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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바흐인벤션이었다. 싯누런 겉표지의 악보책을 올려놓고 안 쓰던 왼손을 거의 오른손 만큼 써야 하는 모험은 할 만하지도 다이나믹하지 않았다. 바흐인벤션을 치면서 피아노를 그만두는 일에 대하여 생각했다. 거의 매일 졸랐던 것 같다. 바흐인벤션만 치려하면 내 손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마구 떼를 쓰며 이제는 그만하라고 발을 구르는 것 같았다. 오 년 간의 피아노 교습은 그렇게 바흐 덕택에 막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이 인간의 신체 그리고 그 신체가 연결된 정신의 불균형을 치유하기 위해 바흐라는 희유의 천재가 만들어낸 장절한 소우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원고를 쓰다가 지치면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더듬어 연습하며, 숨이 멎을 듯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우주에 기분 좋게 몸을 내맡긴다.
p.295 

어깨가 결릴 때 하루키는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2성 인벤션'을 친다. 그게 하루키와 독자를 갈라놓고 그를 유일무이한 작가로 만드는 지점처럼 보인다. 나는 울면서 그 앞에서 피아노를 그만두는 것을 생각했을 때 하루키는 '자 이제 한번 쉬어 볼까.' 하며 바흐의 인벤션을 쳤다는 얘기다. 안 쓰던 왼손의 근육을 오른손만큼 단련시키는 일은 왠지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루키는 그 느낌을 즐기고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소설을 제대로 완독해 보지 않고('노르웨이의 숲'도 거의 통독 수준이었다.) 그의 에세이들을 읽고도 충분히 그것에 몰입하고 반응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멈추고 머뭇거리고 돌아선 곳에서 그는 출발한다. 그러니 그의 얘기는 지루하지 않고 단조롭지 않고 뻔하지 않다.  

청춘, 반항 들의 표지자처럼 아이콘화된 그는 이미 육십 대에 접어들었다. 작가로 데뷔한 지 삼십 년이 넘었다. 이 책에는 단행본으로 발표되지 않은 글들, 에세이, 여러 책들의 서문, 해설, 문학상 소상 소감, 질문과 대담 등이 날것으로 퍼득인다. 내성적이고 관계를 두려워하는 하루키와 그가 좋아한다는 굴튀김 한 접시를 놓고 마주앉아 밤을 새워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라고 지우의 딸 결혼식 축사를 보내는 하루키와 함께. 

한창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았을 때 그에게 예루살렘상이 수상되어 그 수상식 참석 여부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하루키는 어떻게 했을까? 그는 물론 가는 것을 선택했다. 수상식에 참석해서 하루키는 예상과는 달리 한 방 제대로 먹인다. 역시나.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p.91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하나의 알이라고, 더없이 소중한 하나의 영혼과 그것을 감싸는 깨지기 쉬운 알이라고,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벽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시스템'입니다. 본래 그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저 혼자 작동하여 우리를 죽이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살해하게 만듭니다. 냉혹하고 효율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p.92 

상을 주는 주체를 가장 효율적으로 비난하는 방법은 수상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게 통상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그러지 않았다. 주는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 사람들의 껍질을 깨고 그 사람들의 속살에 가닿는 말들을 쏘아 올렸다. 그것이 무용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루키는 일단 그렇게 했다. 그게 하루키다. 

그의 스콧 피츠제럴드론과 레이먼드 카버 얘기는 당장 불꺼진 서점이라도 달려가 둘의 책을 들고 나오고 싶게 만든다. 레이먼드 카버의 전작품을 번역해 가는 일을 했던 하루키가 카버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스하고 눈물겹다. 잘난 척하지 않는 사람. 뽐내지 않는 소설을 쓰고 뽐내지 않는 시를 쓰고 뽐내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고마워요, 레이'라고 덧붙이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위대한' 피츠제럴드에 대한 얘기는 또 어떠한가. 피츠제럴드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청춘기의 아름다운 발로이자 그 숨결이 공중에서 순간적으로 신화로 결정화한 것이라는 하루키의 얘기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하여 자신의 성공을 연기했던 개츠비를 부활시킨다. 저기에 꿈 하나를 놓고 달음질쳐 갔던 우리의 청춘에 대한 복기와 함께. 

키스 헤링(herring;청어)의 그림을 보면 반사적으로 청어 초절임이 당겨 곤혹스럽다는, 자신이 굴튀김이 아니고 소설가라 기쁘다는 하루키의 잡문들은 무언가를 한없이 그립게 만들고 아련하게 만든다. 누군가와 반 세기를 살아도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루키는 함께 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잡아주고 싶게 만든다. 열악하고 치사하고 차가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 그럼에도 꿈을 꾸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야 견딜 수 있는 우리들을 그는 불러 모은다.  그가 내세운 반세기가 넘어도 독자들이 피츠제럴드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에게도 유효하다. 그것은 '멸망의 미학'이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구원의 확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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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11-23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있다가 좋아서 포스트잇 붙여가며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아직 다 못읽었어요), 블랑카님의 리뷰라니! 전 리뷰를 안써도 좋겠네요. 인용하신 91페이지의 에피소드는 저도 무척 좋았어요. 알의 편에 서겠다는. 그리고 모두가 거기에 가서 그 상을 받지 말라고 하는데도, 그는 거기에 가서 그 상을 받고 소감도 이야기하잖아요.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게 대체 가능하단 말인가,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나이에 대해서 이야기한 하루키도 좋았어요. 이 리뷰를 읽으니 어서 빨리 끝까지 다 읽고 싶어져요.
리뷰를 써줘서 고마워요, 블랑카님. 왜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고마워요.

(235쪽을 읽는데 가슴이 벅차올라요!)

blanca 2011-11-23 23:0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리뷰를 쓰셔야지요. 저와는 또다른 다락방님의 감상을 듣고 싶어요. 그죠!! 저도 수상을 거부하는 대신 가서 그 사람들 앉혀 놓고 자기 소신을 피력하는 모습이 참 하루키답다,고 생각했어요. 당사자들을 앉혀 놓고 불편한 얘기들을 호소력 있게 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하루키인가 싶기도 했고요. 다락방님이 누군가에게 하루키의 그 단편을 필사해 주는 사진 참 근사했어요. 저는 하루키의 소설을 잘 모르지만 저의 친구가 저에게 열변을 토하며 그 책을 안긴 장면, 다락방님이 또다른 분에게 마음을 담아 자신이 반한 것을 전달하는 모습이 오버랩되면서요. 그냥 하루키를 생각하면 우리의 청춘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왠지 모르게....

2011-11-23 1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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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1-23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당장 미국으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피츠제럴드와 카버.
당장 깨어지고 싶게 만드는 하루키의 알의 편에 서겠다는 말.

blanca 2011-11-23 23:11   좋아요 0 | URL
쥬드님, 저는 카버를 원문으로 읽어보겠다고 한창 시간 없을 때 새벽마다 아파트 베란다에 차갑게 궁둥이 깔고 한 달을 매달렸었잖아요.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감동 그 자체였어요. 그 사람은 정말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여기가 아픈데 카버가 말한 건 저긴데 묘하게 공명해요. 정말 기가 막히게.

마녀고양이 2011-11-2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루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사랑해요!
저는 소설보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더욱 그에게 반하게 되더라구요.
넘 좋다, 이 책을 사야겠다고 맘을 굳혔어요! ^^

blanca 2011-11-23 23:12   좋아요 0 | URL
마고님, 저도 그래요! 저는 사실 하루키 소설은 워낙 마니아 들이 주변에 있어서 타의에 의해 두 번 시도해 봤는데 사실 저랑은 좀 안맞더라고요. 그러나 에세이는 아, 정말 아껴 읽고 싶어요.

2011-11-23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3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3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5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5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4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4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12-04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실 하루키 소설은 상실의시대가 다에요.
먼북소리의 여운은 길고요.
이 잡문집도 여기저기 호평이군요, 역시.^^ 담아가렵니다.
늘 멈추고 머뭇거리고 돌아선 곳에서 하루키는 시작했다는 문장이 쏙 들어와요, 블랑카님.
조용한 일요일 오후에요.^^

blanca 2011-12-04 21:3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오늘은 초겨울 날씨답잖에 참 푸근했어요. 저도 <상실의 시대>도 거의 대충 읽어서 하루키를 제대로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먼 북소리> 참 좋았어요. 그러고 보니 에세이들이 참 좋아요.

2011-12-06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6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7 0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집 앞 복지관에서 헬스를 시작한지 얼추 두 달이 되어간다. 헬스를 시작한 것은 체중감량 때문이라기보다는 저질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없을 때야 힘들면 나름대로 컨디션 조절하며 가끔 졸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면 되는데 아이가 생기니 엄마가 기본 체력은 있어야 적어도 기본적인 것 이상을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긴 생머리에 귀엽게 생긴 여자 트레이너는 나에게 근력이 전무하다고 했다. 예상했던 바라 놀랍지도 않았다. 근력이 저조한 게 아니라 전무하다니.  

스트레칭 시간에 가보면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다. 아는 동생을 만나 헬스를 한다고 애기하니 헬스 진짜 진짜 재미없지, 라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봤다. 기막히게 재미있을 턱이 없다. 다시 돌아와서 대부분 나이가 나보다 많은데 내가 제일 못한다. 삼십오 분, 고작 1킬로짜리 덤벨을 가지고 고군분투한다. 중간에 너무 힘들어 나가 버리고 싶은 순간 내 앞 육십이 넘은 할머니는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입술을 앙 다문다. 별것도 아닌 동작들로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 내가 매일 야구모자의 챙으로 반이나 얼굴을 가려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헬스를 시작하고 살이 찌고 있다. 얼굴은 핼쓱해져 가는데 허벅지는 더 두꺼워지는 것같다. 배가 너무 고파 꼭 야식을 먹어야 잠이 온다. 마의 열한 시 라면을 끓이거나 호빵을 찐다. 헬스 끝나고 복지관 앞 떡볶이집이 닫혀 있으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떡볶이집 아주머니는 수시로 문을 닫아 버리신다. 근 일주일 만에 가보니 열려 있다. 아주머니는 동년배 손님들을 붙잡고 부동산 업체들에서 오는 좋은 땅을 소개해 준다는 전화를 가지고 빈정거리신다. 그렇게 좋은 땅이 있으면 자기 가족한테 해 주지 나한테 돌아올 차례가 어디 있느냐고, 자기가 여동생이냐고, 가족이냐고,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시며 떡볶이를 조렸다 포장 용기를 꺼냈다 하는데 야구 모자 쓴 허벅지 두꺼운 여자는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마치 후렴구 같았다. 반복할 때 조금씩 조사도 억양도 달라지는데 지겨운 게 아니라 전조로 듣는 노래 같아 듣기 싫지 않았다. 적당히 잘 조려졌어, 맛있을 거예요. 아, 아주머니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 집에 와서 떡볶이를 다 마셔 버렸다. 플라스틱 용기를 분리수거함에 구겨 넣으며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탄수화물을 부르는 운동. 나는 근력을 키우고 있는 것인가, 지방을 축적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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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7 0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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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8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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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11-17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방을 축적하고 있으며 근력을 키우고 있죠. 오늘밤 지방을 축적하고 다음날 근력을 키우며 지방을 다시 태우고 계신거에요. 블랑카님,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근력을 키우지 않고 또 지방을 태우지 않으면서 마의 열한 시에 라면을 끓여먹거나 떡볶이를 사먹는 1人이 여기 이렇게 든든하게 버티고 있으니까요. 제가 응원합니다.

blanca 2011-11-18 09:10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락방님, 저 위안 받아도 되는 거었어요? 밤참도 습관인 것 같아요. 참는 게 극기 수준이에요. 이러면 안 되는데....운동 오래 한 사람들 보니 날씬하다기보다는 탄탄하더라고요. 그냥 이대로 엉뚱이로 살려고요^^;;;

cyrus 2011-11-17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글 읽고나니 저도 근력을 키우기 위해서 방학 때 운동 좀 해야겠는데요.
지금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할까? 아니면 개인적인 공부를 할까? 신중하게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
그런데 운동을 하게 된다면 작심삼일 될거 같아요 ㅎㅎ


blanca 2011-11-18 09:13   좋아요 0 | URL
cyrus님 저도 그런 고민했었는데. 결론은 4학년 1학기 여름 방학때부터 취업준비로 그만두기로 계획을 잡았었어요. cyrus님은 기본 근력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 분들은 운동을 해도 기본이 다르니 금방 금방 달라지더라고요.

마늘빵 2011-11-1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운동 안한 지 오래 됐는데, 그거 운동하고나면 식욕이 막 솟아서 이거저거 먹게 되는데 그러시면 몸이 불어나신다는... ^^ 그걸 참으면 성공인데 저도 잘 못 참죠. -_- 러닝머신 한 시간 해봐야 빠지는 칼로리는 한 끼 식사만큼도 안 되는데-한 400칼로리 빠지던가요-, 먹는 건 1000칼로리 순식간이에요. ㅠㅠ

blanca 2011-11-18 09:1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아시는군요. 벌써 1킬로 더 쩠어요. 배가 너무 고파서 정말 견딜 수가 없답니다. 게다가 저는 덤벨하고 러닝 20분 뛰니 운동을 제대로 한다고도 볼 수 없는 것 같아요. 바로 먹어주고요^^;;

감은빛 2011-11-17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여름에 결혼후 처음으로 예전 몸매에 가까운 상태까지 돌아갔었는데, 그래서 자신있게 소매없는 옷을 입고 다녔는데, 찬바람이 불기시작하면서 또 한동안 운동을 안하고 지내고 있네요. 몸은 결혼전 몸매가 아닌 작년 몸매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요? 블랑카님의 운동을 응원합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천천히 조급하지않게 가시길 바랍니다!

blanca 2011-11-18 09:16   좋아요 0 | URL
소매없는 옷이요! 우아. 예, 딴건 몰라도 확실히 덜 피곤하더라고요. 체력이 나아지고 있는 것을 느끼니 계속 열심히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pjy 2011-11-1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요? 저도 예전에 헬스했었는데요~ 뭐랄까 몸무게가 줄어드는 효과는 미미했고, 식욕은 하늘을 찔렀고, 다만 몸의 내부구조가 변신되는 경험이었습니다ㅋㅋ 근데요~ 허무한것이 헬스를 관두면 몸이 도루아미타불이더라구요^^; 운동은 꾸준히 계속 해야되는게 관건인가봐요-_-

blanca 2011-11-18 09:17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그죠, 그죠! 저도 그게 넘 무서워요. 그만두면 더 찐다는 얘기가 있어서요. 몸의 내부구조가 무언가 변동이 일어나는 것은 같아요. 점점 동작이 덜 힘들어지고 오후에 피로도가 덜한 게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sslmo 2011-11-1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OO휘트니스 클럽 연간 회원권을 가지고도 안 다닌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고요~
지난 겨울엔 동네 헬스클럽 3개월 등록하고 첫날 딱 하루 갔었습니다, 끙~--;

근데 떡볶이 국물 조려주는 그 동네 어디예요?@@
넘 먹고싶다는~ㅠ.ㅠ

blanca 2011-11-18 09:19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안 그래도 다들 3개월 그것 한꺼번에 끊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첫날 하루는^^;; 여기는 동대문구랍니다. 완전 맛나요. 학교 앞이라 좀더 나가면 온갖 체인 떡볶이집들이 있지요. 그래도 여기 동네 아줌마 떡볶이가 더 맛있어요. 참고 또 참아 1주일에 한번씩만 먹으려고 한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1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는 데는 흔히들 고기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탄수화물도 힘내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그래서 보디빌더들도 시합을 위한 훈련이 아닐 때는 탄수화물을 많이 섭취하죠.당연히 이때는 지방비율이 높아집니다.그러다 시합이 가까워 올수록 탄수화물 섭취량을 줄이죠.

웨이트 트레이닝 교본에 훈련법과 함께 영양학에 대한 지식도 있습니다.하나 하나 공부해 나가면 좋죠.


blanca 2011-11-18 09:19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저는 탄수화물 섭취가 건강에 안 좋다고 자꾸 그런 식으로만 생각이 되었어요. 안 그래도 웨이트 트레이닝 교본을 좀 봐야 되나, 그런 생각하고 있답니다.

마녀고양이 2011-11-17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스클럽 끊고 안 다니고, 집안에도 온갖 운동 기구 갖춰놓고도 안 하고, 이번에 운동 DVD도 구매했는데
아직 뜯지도 않았답니다............ 흐흐.

마의 11시,, 그러게요, 딱 그 시간이 문제예요, 문제~

blanca 2011-11-18 09: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마고님, DVD는 어떤 건가요? 너무 궁금하네요. 저도 집에 실내사이클(옷걸이로)이랑 덤벨 세 종류 있어요. 이번엔 기필코 결단코 운동 오래 제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순오기 2011-11-18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쩔거야, 마의 11시!ㅋㅋ
나도 근력운동이 필요한데, 귀찮고 게을러서 운동을 못해요.
그렇지만 퇴근길 40분 걷는 게 체력향상에 많이 도움됐어요.
내 나이쯤에는 무리한 운동보다 걷기가 제일 좋다고 하는데, 체중을 줄이는 건 역시 먹는 걸 줄여야 하나봐요.
2~3킬로 빠진 후 한주일을 식생활에 따라 500그램이 올랐나 내렸다~~ 더 이상 안 줄어요.ㅜㅜ

blanca 2011-11-18 09:2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40분 걸으신다니 그럼 몇 킬로나 되는 건가요? 제가 저번에 1킬로 내외 거리를 걸었는데도 꽤 피곤하더라고요. 운동 제대로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운동만으로는 체중감량은 힘든 것 같아요. 2~3킬로라도 정말 많이 빼신것 같은데요. 저는 운동 시작하고 1킬로씩 체중이 올라가고 있는 것 같아요.

섬사이 2011-11-18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느 책에서 읽은 것 같아요. (어느 책이었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질 않네요...)
유산소운동은 식욕을 억제시키는 반면 무산소운동은 피로감이 높고 식욕을 증가시킨다고 했어요.
유산소운동을 같이 하시면 어떨까요..
전 오늘로 헬스다닌지 딱 3개월 됐는데, 다른 건 몰라도 체력은 좋아졌어요.
(체중도 줄었어요.. ^^)

blanca 2011-11-20 11:36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제가 유산소운동을 너무 소흘히 했나 봐요. 어떨 때는 15분 사이클 타고나서 유산소 운동 했다고 자위하고 -..- 그러거든요. 조언 감사합니다. 체력은 정말 좋아지는 것 같아요!

2011-11-29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9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9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1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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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귀와 마음, 머리 전체를 채울 때가 있다. 그것은 좋다, 나쁘다,의 가치 판단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냥 조용히 나는 귀를 기울이고 그 사람의 소리에 잠긴다. 

사랑도 그렇게 시작될 때가 있다. 전화선 너머 미성은 정작 만났을 때 복실복실한 외모와 어긋났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족했다. 눈은 보라고, 귀는 들으라고, 코는 냄새 맡으라고 주어졌으니 그것에 충실한 것을 근시안적이고 감각적이라고 폄하할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이 너무 이뻐서, 몸에서 나는 향내가 좋아서, 목소리가 근사해서 사랑에 빠지는 일이 그러하다. 

김훈이 <칼의 노래>로 나타났을 때 문단은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의 문장 하나 하나는 곰이 동굴에서 100일을 마늘로 버텼듯이 철저하게 벼리고 또 벼린 쌉쌀한 맛이 났다. 그의 목소리를 빌리면 이야기는 하나의 완강한 사실이 되어 눈 앞에 떠올랐다. 그는 언제나 사실을 보고하고 고발하는 지점에서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문체가 서사를 앞지른다,는 말은 칭찬이기도 하고 한계점에 대한 비판이 되기도 했다. 유독 그의 문체가 빛을 발한 작품들이 역사적 사실들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신유사옥으로 흑산도에16년간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생을 마친 정약전의 얘기가 주를 이룰 것으로 기대했다. 물론 정약용의 형인 약전의 얘기는 중심 가지를 이룬다. 하지만 그 곁가지들에 김훈의 시선은 가 있다. 시대 너머, 이 생 너머를 기약하는 지점에 천주학을 걸어 놓고 부단히 이 생에서 투쟁하다 때로 꺾이고 스러져간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한 얘기.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자문하는 것은 언제나 조금은 위험하다.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들 앞에서 매혹당해서는 왜 안 되는지를 미처 묻기도 전해 숱한 이들이 그 질문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들이 산화한 지점에서 우리는 타락한 것들에 후달리고 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가장 쉬운듯하면서 용단이 필요한 일이다. 

김훈은 언제나처럼 버석거린다. 때로 그의 목소리가 너무 도드라져서 그것이 싸안을 이야기들이 울툭불툭 비어져 나온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그래서 그답다,고 수긍하기도 한다. 숱한 목숨이 내던져진 절두산 아래 닿아 있는 자유로를 달려 귀가하며 그는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 고 한다. 언어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 너머로 부단히 시선을 던지는 작가의 진정성이 담보된 이야기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의 고백은 뭉클하기도 하고 실망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조금씩 밖에 더 나아갈 수 없는 우리들은 실재라고 믿는 것을 향해 생을 내어던질 수 있는 그들의 얘기 앞에서 감히 말을 잃고 만다. 너무나 큰 얘기. 언제 누가 들어도 가슴 저릿한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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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1-11-15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작가의 글발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입니다.
모두가 다산에 주목할 때, '자산'에 눈을 돌린
그의 탁월한 선택에 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blanca 2011-11-15 23:20   좋아요 0 | URL
hermes91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정약용이 아닌 그의 형을 소재로 소설을 쓸 생각을 한 것 부터가 김훈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stella.K 2011-11-15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별은 세 개군요. 별로였나요? 기대했는데...
하긴, 작년에 나왔던 소설 거 뭐죠...? 숲 어쩌고 하는 소설
그거 참 별로 였어요. 예전의 작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분도 늙는 것일까요? 헉~

blanca 2011-11-15 23:23   좋아요 0 | URL
저도 갑자기 제목이 생각 안 나서 찾아 봤어요. <내 젊은 날의 숲>. 사실 김훈 작품을 다 찾아 읽을 만큼 좋아하는데 그 작품 이후로 문체는 여전히 훌륭하지만 서사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칼의 노래>가 너무 눈부셔서 그 이후의 작품들이 그 후광에 가려지는 것도 같고요. 단편 <언니의 폐경>이랑 <화장> 같은 작품은 참 좋았는데...저도 개인적으로 아쉬워요.

마녀고양이 2011-11-15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 책 읽으셨군요?
그동안 잘 계셨죠?

blanca 2011-11-15 23:24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안 계신 동안 저는 시간만 죽이고 있었습니다.--;; 아, 갑자기 올해를 떠나보낸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허무한지요....

순오기 2011-11-15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젊은날의 숲> 올초에 어머니독서회 토론도서였는데,
한승원의 <흑산도 하늘길>도 읽었으니 두 작가가 그린 정약전을 비교할 겸 <흑산>을 읽을까 했더니 다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어요. <흑산>은 정약전보다 주변인들을 더 조명한 듯, 김훈은 점점 호불호가 명확히 나뉘고 장편보다 단편이 더 빛나는 것 같아요.

blanca 2011-11-16 09:1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한승원의 <흑산도 하늘길>은 어땠나요? 궁금합니다. 아, 맞아요. 저도 정약전 시점에서 그려진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아웅, 저도 순오기님 어머니독서회 들어가고 싶어요--;;

비로그인 2011-11-16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마음에 들어요..잘 읽었습니다. 꾸벅.

blanca 2011-11-16 09:10   좋아요 0 | URL
음, 이 아침 기분좋게 하시는 댓글이네요.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yamoo 2011-11-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께서도 읽으셨군요. 이 책을 사야할지 말아야할지...좀 두고 보다가 반값세일 하면 그때 냉큼 사야 겠어요..ㅎㅎ

김훈의 역사소설은 좀 별루 인거 같다는 인상이 짙습니다만..어쨋든, 요즘 젊은 작가보다는 훨씬 고퀄리티의 글을 쓰시는 양반이니 구해서 읽어는 봐야 겠습니다. 아, 근데, 아직 <공무도하>도 안봤군요!

blanca 2011-11-16 22:59   좋아요 0 | URL
야무님, 저도 사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책들이 한 다스랍니다. 연말이 되니 더욱더 그렇게 되는군요. 이제는 가진 책들을 하나 하나 제대로 읽고 좀 떨어내고 하려고 하지만 이미 오늘 또 주문하고 말았답니다.--;;
 

다섯 살 때였는지 여섯 살 때였는지 가물가물하다. 동네 아주머니가 과실주를 담가 왔다. 우리 집에서는 시음회가 벌어졌고, 나도 아마 한 모금 졸랐던 것 같다. 예상 외로 너무 달콤해서 홀짝 홀짝 계속 먹었나 보다. 먹었던 과정은 사실 기억이 잘 안 나고 영화의 장면 전환처럼 갑자기 엄마 등에 업혀 울고 불고 하며 술기운에 고통스러워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의 그 출렁이던 멀미의 포격 같은 기분은 아직도 삼삼하다. 술에 참 일찍이도 취했다. 

그래서 <빨강머리 앤>에서 철저하게 감정이입이 된 대목은 앤이 라즈베리 시럽으로 착각하고 건네 준 포도주를 연거푸 마시고 술에 취한 다이애너에게 앤이 절교당하는 부분이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다이애너는 곤드레만드레 취한 모습으로 엄마 배리 부인을 경악시킨다. 이 대목을 떠올릴 때마다 엄마 등에 업혀 울며 주정을 했던 꼬마도 같이 생각나 기분이 묘해진다. 그 꼬마는 하여튼 커서도 술과 관련된 많은 해프닝의 주인공이 된다.-..-  

 

  

사실 그린 게이블즈의 그 주근깨투성이의 빨강머리 소녀의 얘기는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ANNE>에서는 초반에 불과하다. 무뚝뚝한 중년의 남매에게 뚝 떨어진 고아원에서 온 소녀의 얘기가 기대 이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작가에게는 속편에 대한 부담과 압력이 가해진다. 이 덕택에 앤은 성장해서 유년기의 첫사랑 길버트와 결혼하여 대가족을 이루고 아들들을 전장에 내보내며 늙어간다. 앤의 시점에서 이야기는 점차 확대되어 앤의 보금자리를 둘러싼 이웃들의 삶까지 닿는다. 이 작품은 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앤이 성장한 애번리 마을사람들의 연대기에 가깝다. 유년시절의 꿈, 청춘의 무모함과 순수, 열정, 중년기를 거쳐 노년기의 쇠잔, 소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한 밀착된 시선과 섬세한 묘사는 삶을 횡적으로 종적으로 아우른다. 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의 유년, 청춘, 지금 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망에 얽힌 가족들, 타인들의 시점까지 함께 자꾸 돌아보게 한다. 지나치게 낭만화된 결말들, 조금씩 서투른 반전들의 아쉬움까지도 다 덮어줄 정도로 이 작품이 매력을 가지는 이유는 사람과 삶을 결국은 믿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의 본능적 치우침을 작가가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장'에 대한 얘기는 필연적으로 끌리고 만다. 뒤돌아봐도 만질 수 없는 것들. 그 애달픈 서투름. 시간을 돌려도 항상 과거의 실수는 그 자리에 그대로 그 몫을 고스란히 지키려 든다.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우유부단하고 어리버리한 청춘의 모습은 의외로 촌스럽지 않다. 육십 년대의 청춘이든, 구십 년대의 청춘이든, 21세기의 그것이든 청춘은 본질적으로 어리석음을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청춘이든 그것은 시행착오, 실수와 더불어 채색되고 어느 정도 그것이 줄어들 때쯤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 한다. <졸업>에서 그가 유난히도 망설이고 자신없어 하는 모습은 관객을 웃기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울리려는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성장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확실한 것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술에 취해 본 것은 스물 다섯 언저리였다. 낙지 안주가 너무 잘 받아서 주량인 소주 세 잔의 두 배를 마시고도 거뜬하다고 생각하며 음식점을 나오자 갑자기 하늘과 땅이 붙어 버리는 경험을 했다. 놀림도 받고 위로도 받았던 그 사건의 최후는 엄마 등에 업혀 울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과 같다. 졸업해 버린 것들. 언제나 부끄럽고 가끔은 절절하게 그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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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무렵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 어머니가 집에서 담갔다는 포도주를 억지로 먹이고는 혼자 집에 보내는 바람에 술 기운에 비틀비틀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있어요. 이틀쯤 앓아누웠었죠 아마. 이 페이퍼를 읽으니 그 기억이 떠오르네요^^

blanca 2011-11-13 22:06   좋아요 0 | URL
후와님은 정말 다이애너와 흡사한 경험을 하셨군요. 그런데 지금 포도주 마셔보면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을 정도는 아닌데 어렸을 때 어찌 그리 달콤하게 느꼈었는지 참 불가사의해요. 후와님도 아시는군요^^

poptrash 2011-11-13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술, 많이 마셨어요. 집에서 담근 포도주, 아버지 친구들이 마시던 맥주.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에... 그래서 결국 이런 어른이 되었는지도...

blanca 2011-11-13 22:0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런 어른^^;; 저는 제가 상태가 안 좋은 게 혹시 그 때 술에 너무 취해 뇌에 약간이 손상이 가서가 아닌가 가끔 생각해 봅니다.^^;;;

cyrus 2011-11-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올해 최근에서야 포도주를 처음 마셔본 적이 있었어요, 이전까지는 포도주가 달달한 포도주스인줄 알았는데,,
마셔보니 아니더군요 ^^;; 포도주는 포도주스가 아니라 포도 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ㅎㅎ

책으로 된 앤의 이야기는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블랑카님의 글을 읽으면서
어렸을 때 TV에서 해주던 만화에서 술 취한 앤이 나오는 에피소드를 본 기억이 나네요.
혹시 <토지>에 이어서 <앤> 시리즈를 읽고 계신가요? ^^



blanca 2011-11-13 22:08   좋아요 0 | URL
오, cyrus님 포도주와 너무 늦게 만나셨군요. 그죠, 생각보다 맛없죠! <앤>은 다 읽었답니다. 이제 되도록 시리즈물은 안 읽으려고요. 부담감이 커서요. 중간에 읽다 그만둘 수도 없고. 그러면서 또 <임꺽정> 재미있다는 얘기에 자꾸 마음이 동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11-1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주 전에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가 '걸어서 세계속으로'에 나왔는데, 서양에서도 <빨간머리 앤>은 여자들이 읽는 소설이라고 알려졌더군요.백인남자관광객이 "남자들은 아무래도 잘 안 읽는 작품이죠.제 아내는 감명 깊게 읽었대요." 하더군요.나는 재밌던데...

blanca 2011-11-13 22:10   좋아요 0 | URL
어, 정말요? 정말 아름다운 섬이라면서요. 죽기 전에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더라고요. 여자들이 읽는 소설 ㅋㅋㅋ 노자님 재미있게 읽으셨어요? 내용이 남자들이 재미있게 읽기는 힘든 요소들이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노자님은 안 읽은 책이 없군요. 정말 박학다식하십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14 16:18   좋아요 0 | URL
그쪽은 애틀랜틱 캐나다라고 해서 대서양 쪽의 동부 캐나다입니다.전에도 무슨 여행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바다경치도 좋고 산도 아름다워요.특히 캐번디시는 몽고메리 고향이면서 '빨간머리 앤'을 집필한 곳이라 관련시설이 잘 되어 있더군요.'걸어서 세계속으로' 다시 보기 하면 나올 거에요.

20여년 전에 나온 완역본 10권 짜리를 읽었는데 시간 꽤나 잡아먹었죠.

2011-11-13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3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1-13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전 얼마전에 선물받은 포도주를 따서 홀짝 홀짝 마시다가 그만 다 마셔버렸는데, 아..어릴 때 포도주 담아둔것을 마셨던 생각이 나더라구요.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11-11-13 22:13   좋아요 0 | URL
탁님 반갑습니다.^^ 저는 포도주를 한 잔 이상 마시면 머리가 너무 아프더라고요. 어렸을 때 다들 과실주에 취한 경험들이 있군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니 괜히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