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 - 제19회 부커상 수상작, 개정판
아룬다티 로이 지음, 황보석 옮김 / 문이당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이야기는 작가에게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와 이 세상을 덮친다.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말해 줄 입술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런 이야기는 무딘 사람도 차마 발을 뺄 수 없다.  

"이 소설은 저의 세상이며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라고 작가는 서문을 연다. 비겁하지 않다. 이건 단지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는 무관하다고 미리 숨어버리지 않는다. <작은 것들의 신>이 작가의 유일한 소설로 남아버린 것도 더이상 중언부언하며 자신을 설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아도 되는 작가의 특권인 것같다. 

건너서든 직접적으로든 인도 사람을 알게 되는 기회가 있으면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저 사람은 카스트의 어느 계급에 속해 있을까? 였다. 인도에 대하여 배울 때 그 불합리하고 불가항력적인 계급의 피라미드는 구두점처럼 따라붙었다. 한국에 와 있는 인도 사람을 소개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의 계급을 왕관처럼 덧붙였다. 저 사람은 브라만이란다. 브라만. 저 머나먼 끝 대척점에는 불가촉천민이 있었다. 가촉민들이 다니는 길을 걸을 수도 없고 우산을 쓸 수도 없고 말할 때 내뿜는 입김까지 통제해야 하는. 그 계급의 틀에 의구심을 갖고 반역을 꾀하는 얘기 대신 다만 사람으로서 누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의 세상의 통념을 잠시 잊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하고 끝난다.  

라헬이 아예메넴으로 돌아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총소사를 퍼붓듯 성긴 흙을 파헤치며 비스듬히 내리꽂히는 은빛 빗줄들.
-p.14 

18분의 간격을 두고 태어난 남매쌍둥이 라헬과 에스타가 '늙지고 젊지도 않고 그러나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나이'인 서른하나에 고향인 아예메넴으로 돌아오면서 슬픈 회고는 시작된다. 작가의 시어 같은 묘사들은 뭉근하게 이야기를 적신다. 그 어떤 덧붙임도 함부로 내다버릴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소중한 이야기. 절로 젖어든다. 

기억이 잔잔한 차 빛깔 마음에 폭격을 가하듯 잔잔한 차 빛깔 웅덩이들로 쏟아져 내리는 융단 폭격.
-p.23 

이제는 손을 흔들고 달아난 유년의 기억들이 와르르 쏟아져 꽂힌다. 쌍둥이들의 어머니 야무는 그들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이혼하고 옥스퍼드 대에서 유학하고 돌아과 공산주의의 베일까지 뒤집어쓴 오빠 차코와 제국주의 곤충학자와 사별한 어머니가 있는 친정 아예메넴으로 돌아온다. 지극히 불명예스럽게. 쌍둥이의 외가는 피클 공장을 소유하고 기독교주의와 공산주의의 세례까지 맞춤하게 받은 누리는 자들의 집안이다. 자비와 이성으로 변장한 치사하고 졸렬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의 구현. 그것은 공고하고 그럴 듯한 껍질로 포박되어 있다. 쌍둥이 라헬과 에스타, 그들의 어머니 아무는 일종의 침입자로 간주된다. 삼촌 차코가 전처와 그 사이에서 낳은 딸 소피 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고 작가는 얘기한다. 인도인으로 옥스퍼드에까지 유학한 차코의 전처는 영국인이다. 그 사이에서 낳은 피부 빛깔이 옅은 딸은 스스로를 반쪽 인도인이라고 자랑스럽게 고백한다. 쌍둥이는 소피 몰 앞에서 묘한 열등감을 느낀다.  

이 소설은 끊임없이 시제를 혼합한다. 서른하나의 라헬과 그 서른하나였던 엄마 아무의 시간. 달아난 유년은 완강하게 현재로 밀려온다. 이미 사랑을 잃은 엄마. 이미 죽어버린 엄마. 불가촉천민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엄마. 저도 모르게 그 사랑을 방조하고 도와주기까지 하고 심지어 외사촌 소피 몰을 죽게 하고 엄마의 사랑까지 밀려나게 하는 쌍둥이들. 아무도 이것을 이렇게 의도한 이는 없다. 삶은 미리 결론을 안고 미친듯이 달려와 파고든다. 책장에서 시린 바람은 갈피짬마다 숨었다 나오려든다. 차마 한번에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 잠시 심호흡을 한다.  

이야기의 끝은 귀향한 라헬로 돌아오지 않는다. 낯선 여관에서 몸이 퉁퉁 불어 서른하나에 죽은 엄마가 사랑했던 그 시간으로 맺는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랑. 집안에 불명예를 안겨 주고 결국은 남자를 죽게 할 그런 사랑. 엄마가 했던 사랑.  

 

그녀가 다시 그 말을 하려고 돌아섰다. 

'나알리(Naaley).'
 내일.

 

너무나 작은 것밖에 말할 수 없고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백만 개의 별을 주고 싶은 이야기. 찬란한 패배자에 대한 이야기. 그러기에 신을 원망하고 신에 대하여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 작가가 얘기했듯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삶같다. 이 책을 읽는 일은 하나의 삶을 사는 일처럼 고달프고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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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2011-12-07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작은 것"들에게도 "신"이 존재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고나서 제목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blanca 2011-12-08 00:02   좋아요 0 | URL
like님 역시 읽으셨군요! 저는 사실 그다지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아, 이런 소설이라니요!

비로그인 2011-12-0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숨만 쉬고 있었어요.
블랑카님, 저도 이 책을 읽어야겠어요.

blanca 2011-12-08 00:04   좋아요 0 | URL
강추 또 강추합니다. 수다쟁이님은 어떤 느낌을 가지실까요? 정말 읽고 나면 왜 부커상을 받았는지(사실 이 상의 성격은 잘 모르지만--;;) 심사위원들 손까지 잡아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도 그랬고 부커상 수상작품은 정말 반짝 반짝 빛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재미있어요. 슬프기만 한 소설이 아니라 읽다가 빵 터져 버릴 정도로 웃긴 대목도 많답니다. 작가 능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1-12-0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매번 들었다놨다 했었어요, 블랑카님. 아룬다티 로이의 유일한 소설이랬던 것 같아요. 저는 늘 <9월이여, 오라>가 더 끌리긴 했지만요. 대학 때 카스트에 대한 레포트를 썼었는데 그때가 막 생각나네요. 논문수준이 아니어서 지극히 일반적인 지식으로 썼었겠지만 계급으로 나뉘는 삶과 사랑을 상상하지 못하겠어요. 살만 루슈디랑 같이 사서 꼭 읽어봐야겠어요. 그리고 저도 어떤 형태로든 "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blanca 2011-12-08 22:00   좋아요 0 | URL
<9월이여 오라>가 아룬다티 로이의 에세이였군요!! 오, 놀라워요. 표지의 사진도 너무 아름다워요. 역시 무언가 다른 사람이긴 한것 같아요. 전혀 비겁하지 않은. 살면거 그러기 참 힘들잖아요. 카스트에 대한 레포트도 쓰셨어요? 아, 그렇군요. 아직도 일본은 카스트 간 자유로운 결혼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제3세계 작가들은 절망에 대한 통찰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북극곰 2011-12-0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이사가더라도 끝까지 데리고 다닐 녀석으로 책장 깊숙히에 잘 챙겨두고 있어요.소설이 한 권 뿐인건 아쉽지만 그녀의 행보엔 진정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blanca 2011-12-08 22:01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아, `끝까지 데리고 다닐 녀석`이라는 표현이 참 따뜻하네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이고 싶다는^^;; 아, 그래요.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어 놓아야 한다는 욕심과 의무가 있다면 참 고달프겠지요. 그녀의 행보에 저도 박수를 보냅니다.

마녀고양이 2011-12-0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 예정이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듯이, 거꾸로
언젠가 죽을 것을 알기에 한순간 한순간 죽을 듯이 소중하게 살아가는 것도
동일한 맥락일거 같아요, 삶이란게 참 동전의 양면 같아요.

누군가의 유일한 소설이라,,, 어쩐지 짠하네요.

blanca 2011-12-09 21:01   좋아요 0 | URL
이 작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떤 책 읽을까 둘러보다 소설가 한강이 추천하는 책에 있어 무심코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작가 앞에서는 감히 `소설의 죽음` 같은 얘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온몸에서 자신이 가진 것, 얘기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뽑아내어 이제는 더이상 소설을 쓸 수 없나봐요. 아쉽기도 하지만 참 근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1225979 2014-03-2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입니다. 저도 같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쓰다가 여운이 남아 한 바퀴 돌던 중에 좋은 글을 만났습니다. 기쁜 마음에 덧글 남깁니다. 시간 나시면 제 블로그에 오셔서 작은 것들의 신에 대한 제 감상도 읽어주세요.

제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anssjaj 입니다.

좋은 책인데, 많이 알려지지 않아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는 분을 뵈니 참으로 반갑네요.

blanca 2014-03-24 18:06   좋아요 0 | URL
블로그 방문해서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참 아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