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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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바흐인벤션이었다. 싯누런 겉표지의 악보책을 올려놓고 안 쓰던 왼손을 거의 오른손 만큼 써야 하는 모험은 할 만하지도 다이나믹하지 않았다. 바흐인벤션을 치면서 피아노를 그만두는 일에 대하여 생각했다. 거의 매일 졸랐던 것 같다. 바흐인벤션만 치려하면 내 손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마구 떼를 쓰며 이제는 그만하라고 발을 구르는 것 같았다. 오 년 간의 피아노 교습은 그렇게 바흐 덕택에 막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이 인간의 신체 그리고 그 신체가 연결된 정신의 불균형을 치유하기 위해 바흐라는 희유의 천재가 만들어낸 장절한 소우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원고를 쓰다가 지치면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더듬어 연습하며, 숨이 멎을 듯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우주에 기분 좋게 몸을 내맡긴다.
p.295 

어깨가 결릴 때 하루키는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2성 인벤션'을 친다. 그게 하루키와 독자를 갈라놓고 그를 유일무이한 작가로 만드는 지점처럼 보인다. 나는 울면서 그 앞에서 피아노를 그만두는 것을 생각했을 때 하루키는 '자 이제 한번 쉬어 볼까.' 하며 바흐의 인벤션을 쳤다는 얘기다. 안 쓰던 왼손의 근육을 오른손만큼 단련시키는 일은 왠지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루키는 그 느낌을 즐기고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소설을 제대로 완독해 보지 않고('노르웨이의 숲'도 거의 통독 수준이었다.) 그의 에세이들을 읽고도 충분히 그것에 몰입하고 반응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멈추고 머뭇거리고 돌아선 곳에서 그는 출발한다. 그러니 그의 얘기는 지루하지 않고 단조롭지 않고 뻔하지 않다.  

청춘, 반항 들의 표지자처럼 아이콘화된 그는 이미 육십 대에 접어들었다. 작가로 데뷔한 지 삼십 년이 넘었다. 이 책에는 단행본으로 발표되지 않은 글들, 에세이, 여러 책들의 서문, 해설, 문학상 소상 소감, 질문과 대담 등이 날것으로 퍼득인다. 내성적이고 관계를 두려워하는 하루키와 그가 좋아한다는 굴튀김 한 접시를 놓고 마주앉아 밤을 새워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라고 지우의 딸 결혼식 축사를 보내는 하루키와 함께. 

한창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았을 때 그에게 예루살렘상이 수상되어 그 수상식 참석 여부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하루키는 어떻게 했을까? 그는 물론 가는 것을 선택했다. 수상식에 참석해서 하루키는 예상과는 달리 한 방 제대로 먹인다. 역시나.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p.91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하나의 알이라고, 더없이 소중한 하나의 영혼과 그것을 감싸는 깨지기 쉬운 알이라고,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벽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시스템'입니다. 본래 그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저 혼자 작동하여 우리를 죽이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살해하게 만듭니다. 냉혹하고 효율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p.92 

상을 주는 주체를 가장 효율적으로 비난하는 방법은 수상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게 통상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그러지 않았다. 주는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 사람들의 껍질을 깨고 그 사람들의 속살에 가닿는 말들을 쏘아 올렸다. 그것이 무용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루키는 일단 그렇게 했다. 그게 하루키다. 

그의 스콧 피츠제럴드론과 레이먼드 카버 얘기는 당장 불꺼진 서점이라도 달려가 둘의 책을 들고 나오고 싶게 만든다. 레이먼드 카버의 전작품을 번역해 가는 일을 했던 하루키가 카버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스하고 눈물겹다. 잘난 척하지 않는 사람. 뽐내지 않는 소설을 쓰고 뽐내지 않는 시를 쓰고 뽐내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고마워요, 레이'라고 덧붙이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위대한' 피츠제럴드에 대한 얘기는 또 어떠한가. 피츠제럴드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청춘기의 아름다운 발로이자 그 숨결이 공중에서 순간적으로 신화로 결정화한 것이라는 하루키의 얘기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하여 자신의 성공을 연기했던 개츠비를 부활시킨다. 저기에 꿈 하나를 놓고 달음질쳐 갔던 우리의 청춘에 대한 복기와 함께. 

키스 헤링(herring;청어)의 그림을 보면 반사적으로 청어 초절임이 당겨 곤혹스럽다는, 자신이 굴튀김이 아니고 소설가라 기쁘다는 하루키의 잡문들은 무언가를 한없이 그립게 만들고 아련하게 만든다. 누군가와 반 세기를 살아도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루키는 함께 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잡아주고 싶게 만든다. 열악하고 치사하고 차가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 그럼에도 꿈을 꾸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야 견딜 수 있는 우리들을 그는 불러 모은다.  그가 내세운 반세기가 넘어도 독자들이 피츠제럴드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에게도 유효하다. 그것은 '멸망의 미학'이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구원의 확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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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11-23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있다가 좋아서 포스트잇 붙여가며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아직 다 못읽었어요), 블랑카님의 리뷰라니! 전 리뷰를 안써도 좋겠네요. 인용하신 91페이지의 에피소드는 저도 무척 좋았어요. 알의 편에 서겠다는. 그리고 모두가 거기에 가서 그 상을 받지 말라고 하는데도, 그는 거기에 가서 그 상을 받고 소감도 이야기하잖아요.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게 대체 가능하단 말인가,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나이에 대해서 이야기한 하루키도 좋았어요. 이 리뷰를 읽으니 어서 빨리 끝까지 다 읽고 싶어져요.
리뷰를 써줘서 고마워요, 블랑카님. 왜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고마워요.

(235쪽을 읽는데 가슴이 벅차올라요!)

blanca 2011-11-23 23:0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리뷰를 쓰셔야지요. 저와는 또다른 다락방님의 감상을 듣고 싶어요. 그죠!! 저도 수상을 거부하는 대신 가서 그 사람들 앉혀 놓고 자기 소신을 피력하는 모습이 참 하루키답다,고 생각했어요. 당사자들을 앉혀 놓고 불편한 얘기들을 호소력 있게 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하루키인가 싶기도 했고요. 다락방님이 누군가에게 하루키의 그 단편을 필사해 주는 사진 참 근사했어요. 저는 하루키의 소설을 잘 모르지만 저의 친구가 저에게 열변을 토하며 그 책을 안긴 장면, 다락방님이 또다른 분에게 마음을 담아 자신이 반한 것을 전달하는 모습이 오버랩되면서요. 그냥 하루키를 생각하면 우리의 청춘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왠지 모르게....

2011-11-23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1-23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당장 미국으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피츠제럴드와 카버.
당장 깨어지고 싶게 만드는 하루키의 알의 편에 서겠다는 말.

blanca 2011-11-23 23:11   좋아요 0 | URL
쥬드님, 저는 카버를 원문으로 읽어보겠다고 한창 시간 없을 때 새벽마다 아파트 베란다에 차갑게 궁둥이 깔고 한 달을 매달렸었잖아요.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감동 그 자체였어요. 그 사람은 정말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여기가 아픈데 카버가 말한 건 저긴데 묘하게 공명해요. 정말 기가 막히게.

마녀고양이 2011-11-2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루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사랑해요!
저는 소설보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더욱 그에게 반하게 되더라구요.
넘 좋다, 이 책을 사야겠다고 맘을 굳혔어요! ^^

blanca 2011-11-23 23:12   좋아요 0 | URL
마고님, 저도 그래요! 저는 사실 하루키 소설은 워낙 마니아 들이 주변에 있어서 타의에 의해 두 번 시도해 봤는데 사실 저랑은 좀 안맞더라고요. 그러나 에세이는 아, 정말 아껴 읽고 싶어요.

2011-11-23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3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3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5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5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4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4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12-04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실 하루키 소설은 상실의시대가 다에요.
먼북소리의 여운은 길고요.
이 잡문집도 여기저기 호평이군요, 역시.^^ 담아가렵니다.
늘 멈추고 머뭇거리고 돌아선 곳에서 하루키는 시작했다는 문장이 쏙 들어와요, 블랑카님.
조용한 일요일 오후에요.^^

blanca 2011-12-04 21:3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오늘은 초겨울 날씨답잖에 참 푸근했어요. 저도 <상실의 시대>도 거의 대충 읽어서 하루키를 제대로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먼 북소리> 참 좋았어요. 그러고 보니 에세이들이 참 좋아요.

2011-12-06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6 2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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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7 05: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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