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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징조들 그리폰 북스 2
테리 프래쳇.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테리 프레쳇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멋진 징조들』, 시공사, 2003.

판매가 13,000원

 

지금 보니, 닐 게이먼과 그가 창조한 꿈의 신의 이미지와 상당히 비슷하군요. 깡마른 것도 그렇고. 제가 가장 탁월한 그래픽 노블 작가라고 생각하는사람이 바로 닐 게이먼입니다. 매우 탁월한, 정말 매우 탁월한 작품인『샌드맨』을 썼지요.

 

 

  생각해보면

  물방울 하나와 물방울 하나가 합쳐져 정확하게 두 배의 물방울이 되는 게 아니며

  눈을 크게 뭉쳐봤자, 그 다음 날이면 달걀 껍질처럼 오그라들 수도 있는 법.

 

  그러니 끝내주는 두뇌 둘이 합쳐졌어도

  죽여주는 작품은 '안' 나올 수도 있는 게 당연지사.

  어쩌면 그건 '못' 나오는 건지도.

 

  흔하디 흔한 게 번역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지만

  이 많은 말장난들을 잘 번역하기도 고역스러웠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 또한 부질없으니

  그저 읽은 시간이 아까웠다는 결론 뿐.

 

  내 인생에 이제 공저 읽기는 오늘로써 끝이도다. 에헤 공수레공수거.

 

 

 

책에 나오는 학사모 쓴 얼간이 사진보다 이게 훨씬 낫군요. 좀 얌전해보이기도 하고. 닐 게이먼을 상당히 좋아하는 저로서는 뻘 세계(?)로 빠지는 이 작품의 죄를 테리 프레쳇에게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상 요인

  빤한 시작이지만, 일단 커버부터 들어가보면 : +0원

  커버와 디자인이 나쁘지 않아 : +200원

  다름 아닌 닐 게이먼의 이름 : +350원

  제목이 주는 언어유희적 매력과 이것이 지닌 의도성 : +400원

  언어유희를 위해 태어났다고 무방한 소설이며, 정말이지 번역하기 까다로운 말장난들이 너무 많아 : +0원

  그 말장난들이 가끔 웃겨: +250원

  29쪽의 악마들의 회합은 인상적이야 : +400원

  그 회합의 모양새가 이 책의 무대와 상황과 분위기를 확 잡고 들어가 : +200원

 

 

아래에 설명이 나오네요. 영국 하드 커버용, 페이퍼용, 미국 하드커버용 등등. 영문판으로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번역 때문에 묻혀버린 말장난이 이 책의 아주 큰 장점이거든요. 저는 이 작품이 그래픽 노블로 만들어졌으면 어댔을까 싶은데요. 뭐 다 지난 일이죠.

 

 

 

  인하 요인

  닐 게이먼, 그 이름이 내게 실망을 줬어 : -100원

 『스타 더스트』가 만회하지 못한다면, 산문작가로서의 닐 게이먼은 관에 들어갈 예정 : -0원

  그 말장난들이 많이 안 웃겨 : -100원

  이건 어쩔 수 없는 번역의 한계야 : -0원

  지겨워 : -200원

  따분해 : -200원

  이게 왜 이러냐면, 그 아담이라는 놈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대소동이 뭐랄까, 너무 빈약해 : -750원

  이 사건이 아마게돈이라는 신의 의지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지만, 이 사건의 진행에서 신의 역할은 거의 없어 : -0원

  거기서 벌어지는 어떤 불균형이랄까 : -100원

  천사와 악마라는 각자의 입장과 상황에 묶인 인물들이 이 입장과 상황을 푸는 과정이 좀 굼떠 : -400원

  악의 화신이 되어 가야 하는 아담의 과정이 9선 국회의원의 구닥다리 농담처럼 빤해 : -900원

  마지막 결론도 김 빠져 : -150원

  이 마지막 싸움에 개입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아주 특히 매우 정말 환장할 정도로 따분해 : -1000원

  이건 나의 닐 게이먼이 아니라능! : -0원

  그러니 테리 프레쳇, 네가 이 죄를 뒤집어써라 : -0원 

 

이 디자인도 상당히 재미있네요. 삼지창에 악마와 천사의 얼굴이라니. 날개를 어디에 걸어놨으면 좋았을 것을. 

 

13,000원+1,800원-3,900

= 감정가 10,900원

 

 

  * 이 글은 http://blog.naver.com/anssjaj에 실린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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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열린책들 세계문학 13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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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보물섬』, 머핀 피크 그림,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2010.

  꿈에 본 섬으로. 바다 타고, 물결 넘어. 바다로 가자……로 이어지는 주제가를 가진 애니메이션 ≪보물섬≫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원작과 얼마나 비슷했는지 세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언제나 스티븐슨의 대표작인『보물섬』생각을 하면 그 주제가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곤 한다.

 

  어릴 적에 행복하게 읽은 책들을 장성한 뒤에 다시 펴는 일은 첫사랑을 찾는 일에 견줄 수 있다. 그녀를 다시 만나는 일이 행복하려면, 그녀와 나 사이에 적당한 망각이 필요하다. 속속들이 아는 상대를 다시 만나는 일에 자극이 따를 리가 없다. 불가피하게 그녀와 나 사이엔 추억도 공유되어야 한다. 서로 완전히 잊을 정도의 사람이었다면 굳이 ‘재회’여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통해 서로가 지난 사랑에 버금가는 감동과 기쁨과 만족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혹은 그녀가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랑 맞는 이성(혹은 책),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인식과 감동과 재구성의 기쁨을 주는 책(혹은 인간)이 있다.

 

  물론,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것과 달리 인간관계는 쉽게 덮이지도 않고 덮은 책을 열듯 끊긴 관계를 일방적으로 새로이 하기도 어렵다. 확실한 것 하나는, 출판된 책과 (어느 정도)나이 먹은 인간은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얽히고 꼬인 책이나 사람은 좀처럼 맞아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서설이 길었다. 자, 이제 인정하자. 아이디어로 충만했던 스티븐슨은 결코 대가는 아니었다. 그는 착안을 솜씨 좋게 빚어 소설을 썼지만, 결코 대가는 아니었다(사망 십여 년 전부터 스티븐슨은 자신의 재능이 고갈되었음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위트로 무장한「악마의 호리병」은 좋았지만, 전적으로 스티븐슨 자신의 창작은 아니었다. 잭 더 리퍼에게 영감을 받은 게 분명한『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스티븐슨은 인간 본성에 대한 혜안을 보이지만, 결코 포가 쌓은 것 같은 음울하고도 기이한 문학의 성(城)을 완성하진 못했다.

 

  물론『보물섬』은 아동문학이며, 이 정도의 서술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평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아이들이 먹기엔 충분한 영양을 함유할지언정, 어른들이 섭취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갈등구조의 빈약함과 치밀하지 못함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약점이다. 해적들이 죽음을 예고하는 방식은 흥미롭지만, 그것의 반복은 구태의연해 보였다. 듬성듬성한 서술은 독자의 상상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서술의 구멍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스티븐슨은 실버 선장이라는 매력적인 인물로 여러 부실한 지점들을 성공적으로 메워나간다. 좋은 인물을 창조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보물섬』은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실버 선장이 없었더라면, 이 작품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평은 끝났다. 첫사랑을 만나는 것도 만나지 않는 것도 내가 제시하는 최종제의는 아니다. 다만, 옛사랑의 그림자는 길었지만 그가 지닌 달콤함은 길지 않았다는 것만 밝혀두고 싶다. (*)

 

  더 많은 서평을 http://blog.naver.com/anssjaj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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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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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7년의 밤』, 은행나무, 2011.

 

  ‘한국형 스릴러’에 대한 명상으로 독후감을 시작해보자. 한국형 스릴러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신호탄은 영화에서 기인되었다.《추격자》의 성공은 남자 VS 남자라는 영화 시나리오 구도를 만들어냈고, 잔혹 스릴러의 재생산을 촉진했으며, 생생한 날것의 이야기들(주먹으로 이뤄지는 복수극, 적나라하고 증오에 찬 대사들, 정의가 이뤄지는 난폭한 방식들)을 양산해냈다. 마치 뱅코우의 뒤를 따르는 왕의 행렬처럼 말이다.

 

  일억 원 고료로 유명한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정유정이 이 년 만에 내놓은『7년의 밤』이 영화 판권으로 일억 원을 받자 감독 캐스팅을 둘러싸고 충무로가 들썩거렸다고 한다.『7년의 밤』을 두고 “그림이 그려진다”던 그들은 제 2의 추격자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이 그렇게 그림이 그려지는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대목이 있다. 일종의 쾌감을 선사하는데, 이는 생생함 때문이다. 문장이 매우 빼어나다는가, 마음을 사로잡는 서술보다는 탄탄한 자료조사와 함께 (매우 좁은 공간이긴 하지만) 세령호를 작가가 완전히 의식구조에 갖춘 채 글을 썼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물이 주는 재미는 반씩 자리한다. 아내와 딸을 폭행하는 권위적인 사디스트로 나오는 오제영과 프로야구선수 출신의 사회 부적응자 최현수가 대립각을 세우는데, 오제영과 달리 최현수의 내적고통은 그리 만족스러운 울림을 주지 못했다. 특히 그가 등장하는 대목들은 매우 지루한데, 과거로 빈번히 돌아가는 서술 방식과 적확하지 못한 서술이 원인이다.

 

  이 소설은 여러 화자를 두고 있는데, 1인칭 시점에서는 주인공인 서원이, 3인칭으로 서술되는 ‘세령호 I, II, III’에서는 승환, 서원, 현수, 영제 등의 입장에 매우 가깝게 서술자가 서서 서술을 풀어낸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전지적 위치를 점하며 인물들의 마음을 상당히 직접적으로 서술한다. 드러나지 않는 인물은 제영의 딸인 세령 뿐이다(나는 작가가 세령을 통해 드러낼 수 있을 게 별로 없었기에 사용치 않았다고 여긴다. 세령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건 제영이라는 인물, 그 안에 잠재된 폭력과 악 뿐이다). 이렇게 인물과 매우 밀착된 서술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인물의 내면에 폭넓은 접근권을 가지며 스릴러 장르 특유의 속도감과 예측불허를 다각도에서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스릴러로써 이 작품은 성공적인가? 전문적인 취재를 거쳐 쓴 대목이나, 충분한 대립각을 세워둔 점, 악한 인물의 내면과 그만의 독특함을 잘 부여한 점은 매력적이나 그 이상이 없다. 정유정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의 작품을 좋아한다는데, 그에 필적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특히 스티븐 킹은 인간 내면의 드러나지 않은 악을 잘 관조하는 편인데, 정유정이 그러낸 오제영이라는 인물은 (그 충분한 매력들에도 불구하고) 빤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은 통속성과 지루함이다. 과연 최현수의 슬픔에 대해 그렇게 지루하게 써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앞서 언급했지만, 최현수의 트라우마에는 허점들이 있다. 대학 때까지 좋은 선수였으나 프로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했다는 서술이 있었고, 실제로 그런 선수들도 많다. 그렇다면 최현수의 소심함과 내성적인 면모들은 프로 초창기에 성립되었던 걸까. 잠복되어 있던 트라우마가 프로 적응 실패로 도드라졌다? 그렇다면 대학 때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가. 아니면 적응 실패 때부터 이런 성격이 시작된 걸까.

 

  이 부분을 집요하게 따지는 이유는 이 대목에서부터 최현수라는 인물이 탄생했고, 그 지점의 서술부터 인물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최현수가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지 못하고 끙끙거렸던 측면도 이해되는 구간을 넘어섰기에 뒤쪽으로 가면서는 급기야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갓 태어난 아들을 받아들고 하는 최현수의 행동도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지점이 감정적으로 과잉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볼 때 정유정은 최현수를 덩치가 크고 어리석으나 아들은 끔찍이 생각하는 녹색 괴물 정도로 구축했던 것 같다.

 

  이런 어수룩한 반대편 인물을 보완하는 게 아주 명민한 아들 서원(약속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지켜주겠다는 현수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과 그를 돕는 승환이다. 아마 남자작가는 서원이라는 인물을 이 정도로 똑똑하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 출간된 김애란의『두근두근 내 인생』에서의 한아름(이 역시 남자 작가라면 절대 짓지 않았을 이름이다) 만큼이나 영특한 서원을 보며 똑똑한 남자아이를 내세우는 게 요새 트렌드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웃자고 하는 얘기다). 서원은 오제영의 무례한 어투에도 쩔쩔 매는 최현수를 당돌한 행동으로 지원하는 아이이며 7년 동안의 온갖 사회적 핍박을 견뎌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의 막판에 이 인물이 오제영과 대립하는 부분은 매우 좋았다. 긴박감이 느껴졌는데, 소설의 대미까지 이러한 긴장이 잘 이어졌다. 과정은 아쉬웠지만, 결말은 장대한 셈이다. 하지만 정유정이 레이먼드 챈들러 대신에 존 카첸바크나 마이클 코넬리를 사숙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좋은 결말이긴 하나,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소멸되었다. 어쩌면 10위권 밖에서 선전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판촉 광고의 수사에 내가 너무도 (혹은 아직도) 홀려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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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의 시간 - 2009년 제54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하성란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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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외,『2009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현대문학, 2009.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2009현대문학상을 이제야 집어 들었다. 다른 책들이 밀려 있기도 했고, 그간 한국단편들에 지쳐있기도 했다.

 

  나는 하성란이라는 작가에 대해 의구심을 지녔다. 무엇이 그녀를 작가이게 만드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어쩌면 나는 아직도『A』로 인해 생긴 화를 풀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우선 김숨에 대한 평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나는 이번 작품인「모일, 저녁」을 통해 김숨이라는 작가가 불안의식을 통해 일종의 공포를 들여다보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막차」에서 어두운 차창 밖을 내다보는 나이든 여인의 을씨년스러운 표정에서도 그랬고,「국수」에서 애증의 대상이었던 의붓어머니를 위해 국수를 미는 여인의 날 선 독백에서도 그러한 작가 특유의 시선이 느껴졌으며,「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에서 빚어진 인물의 고립감이 그러했다.「모일, 저녁」에서 김숨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가족을 통해 만남을 만들고 있지만, 지연시키던 그 식사를 끝내 무산시킴으로써 회합을 가로막는다. 등장하는 인물은 고시에 실패하고 방에 틀어박힌 삼촌과 고시촌 생활을 하고 있는 서술자, 하룻밤에 꼬박 백 마리의 뱀장어를 잡아야 하는 서술자의 아버지 등이다. 못 박힌 문 너머의 삼촌은 물론이거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술자와 부모들 간에도 미묘한 층위로 차단막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에 작가는 어떠한 이유를 서둘러 붙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작가를 더욱 미덥게 만든다. 인물이 파편화되고 서로 간에 융화될 수 없는 것은 어떤 무엇에 까닭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은 원래 단독자로서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등장한 실성한 노인네는 이러한 두려움을 이해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인간이다. ‘실성’은 일종의 한계를 넘은 ‘달성’이기에, 노망난 늙은이는 서술자의 공포를 차라리 이해한다. 은행을 줍다 트럭에 치일 뻔한 어머니의 에피소드와 뱀장어를 죽이며 돈을 버는 아버지의 상황을 통해, 그것에 대한 연민어린 서술자의 시각을 통해 작가는 평범한 삶을 위협하는 일상의 덫을 은연히 가리켜 보인다.

 

  박민규가 하성란을 위협하지 못한 것인가? 일종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심사평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현대문학상이 지닌 엄격한 완고함이 조금은 우습다.「누런 강 배 한 척」의 뒤를 잇는「근처」는「낮잠」과 함께 일종의 박민규식 만년문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근처」는 죽음을 맞이하려는 외로운 인물을 통해 인간이 끝내 떨칠 수 없는 환멸을 보이는 동시에, 그렇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존재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향취의 역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과 함께「아침의 문」을 떠올려보니, 박민규가 지난 몇 년간 죽음이라는 주제를 파헤쳐 온 게 아닌가 싶다. 자기만의 방식을 지닌 박민규는 그 형식의 독특함으로 인해 작품에 담긴 내용의 적절성과 깊이에 대해 정당한 평을 받지 못해왔다. 나는 박민규식 파격을 현대문학상이 감당하려 들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일종의 발랄함과 실험적인 형식에 있어 이기호가 박민규에 밀리진 않는다. 편지체를 통해 인물 너머의 병리적 현상을 보이는 사회 자체를 겨눈 이기호의「김박사는 누구인가?」는 무척 신선한 기운을 지닌 작품이다.『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와『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통해 이기호는 더채로운 형식에 색다른 이야기를 생기 있게 다듬을 줄 아는 작가임을 증명했는데,「김박사는 누구인가?」를 통해서도 그러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고백하건데, 이장욱의「고백의 제왕」은 그다지 기대했던 작품이 아니었다(어디선가 읽은 그의 작품이 떠오르질 않는다). 인간의 허위가 드러날 때 느껴지는 당혹감이 실제로는 카타르시스를 동반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이장욱의 작품은 시린 예각을 지녔다. 이장욱은 이 단편을 통해 우리 모두가 실은 어둠의 공모자임을 교묘하게 폭로하고 있다.

 

  최수철의 이인칭 소설은 김영하의 그것을 생각나게 만든다. 최수철은 당신이라는 단어를 좀 더 폭넓게 사용하면서 독자의 사유의 폭을 늘리려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있다. 황정은이 시도하고 있는 방식을 일종의 ‘최수철 식’이라고 규정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모자」이후로 황정은의 작품은 두 번째인데, 나는 그녀의 시도가 이루려는 정도를 충분히 만족시키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건 자체의 소소함 때문에 이러한 색다른 방식마저도 너저분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거꾸로 하성란에 대해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선 떠올렸다. 알파라? 오메가와 함께 하는 그것을 가리키는가? 어쩌면 R파(波)? 알파가 애매하기 때문에 뒤의 시간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섣불리 규정지을 수 없게 된다. 모호함 속에 가려진 제목은 호기심으로 충만해진 독자를 재빨리 끌어당긴다.

 

  그리고는? 없다. 나는 왜 이 작품이 빼어난지를 심사평을 통해 확인하려 했지만, 결국은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삼과 시간에 대한 성찰만이 문학의 미덕인가? 그것은 꼭 가족의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가? 다른 작품들에는 삶과 시간에 대한 성찰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드러나 있다면, 하성란의 것에 비해 어떻게 빈약한가? 나는 그것에 대해 알아낼 수 없었다. 흘러넘치도록 많은 가족 이야기, 딸과 엄마의 이야기, 아버지의 부재, 노망난 노인네에 대한 이야기들을 버무린 이 작품이 어떠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지를 심사평은, 더불어 이 작품 자체는 설득하고 있지 않다.

 

  나는 2009 현대문학상을 박민규가 수상했어야 한다고 본다. 심사위원들의 말을 그대로 적용시켜보아도 박민규가 이루고 있는 문학적 성취는 하성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 깊다. 또한 기존의 방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문학의 외연을 넓혀간 그간의 행보에 한국문단은 답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다음해에 박민규는「아침의 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다). 나는 하성란의 이 작품을 한 번 더 읽어봄으로서 심사위원들의 선택을 한 번 더 이해해보려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기수상작가들의 작품 평은 간단하게 하겠다. 윤대녕은 자신의 색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로 자신이 지닌 감성을 그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고, 성석제는 독특한 인물을 발굴해 특유의 입담으로 이를 희회화하였다. 얼마 전에 2012년 이상문학상 후보작에 수록된 김경욱의「스프레이」를 비판적으로 평했었는데, 이 같은 일종의 슬럼프는「러닝맨」에서부터 유발된 게 아닌가 싶다.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김경욱의 섬뜩한 날 섬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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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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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줄리언 반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2012.

 

  문학상이 책에 드리우는 아우라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수상작을 매혹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소설의 파악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고양 원더스의 감독인 김성근은 직접 본 선수만을 판단하지 다른 이의 평은 듣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같은 맥락으로 말을 이어보자면, 문학상 수상이라는 아우라는 소설 자체가 지닌 의미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요소가 되기도 한다(그렇기 때문에 더 자세히 봐야할 필요가 생긴다).

 

  이언 매큐언의『암스테르담』, 아룬다티 로이의『작은 것들의 신』 등을 통해 맨부커 상 수상작들은 내게 좋은 인상을 주었었다. 생각해 보니,『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사 년 전에『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은 뒤로 처음 읽는 반스의 작품이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은 뒤 남은 생각은 그것이 좋은 소설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독자를 대상으로 쓴 소설이라는 인상이며, 잘 쓴 작품이긴 하지만 내 취향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며『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펴들었다.

 

  우선, 원제인『The sense of an ending』를 고친 결정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이 결정은 어리석었다. 원제가 지닌 의미심장함을 한국어판 제목은 5할도 지니지 못했다. 차라리 ‘종말의 예감’ 정도로 바꾸었으면 어땠을까. 이 제목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이는 페이소스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단점부터 짚고 넘어가자. 이 소설은 지루하다. 독서에 있어 ‘지루함’의 면모는 다양하다. 담 너머로 책을 내던지고 싶을 정도의 지루함이 있고, 일부 대목이 늘어지기도 하며,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 대목마다 여지없이 따분하기도 하다. 각각의 다른 요인들로 인해 다양한 지루함이 드러나는 건데,『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지루함은 일부분에 한정되어 있다. 서술자인 토니 웹스터가 자신의 단조로우면서도 단선적인 자아를 드러내는 서술에서 지루함이 도드라지곤 한다.

 

  나이든 토니 웹스터는 자기 본위적인 인물로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불완전한 기억을 지닌 인물이다. 소설의 많은 부분이 토니의 회상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 부분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사건이 뒤죽박죽이 되거나 서술이 꼬여있진 않다(나는 한 명의 서술자를 세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소설이 정교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참사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회상이 사건 발생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과 말끔하게 정리된 문장이 독자의 서술 이해를 잘 돕고 있다는 점은 엉뚱한 사고(私考) 단계로 흘러가버리는 토니의 습성을 참아내게끔 만든다.

지루해지는 대목들은 토니가 벌어지고 있는 주된 사건과 동떨어진 장황한 서술을 선보일 때 빚어지곤 했다. 글쎄, 두 번째 읽으면 그것들이 지닌 좀 더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처음 읽었을 때 그것들은 여지없이 지루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일견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서술들이, 치밀한 복선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이 소설이 지닌 최대의 장점이다. 충격적인 결말을 예비해놓은 줄리언 반스는 그 곳에 이르는 길목들에 수많은 단서들을 설치해놓았고, 그것을 엷은 모래로 덮어버렸다. 이 장점에 준하는 또 다른 장점이 이 대목에서 발현된다.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도록 독자의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소재들의 사용을 줄리언 반스는 탁월하게 해낸다. 서술자인 토니가 회상해내는 지난날의 과오들, 그가 보냈던 편지, 그에게 남겨진 에이드리언의 일기장과 포드 부인이 남겼다는 유산. 중대하지만 소소하게 보이도록 가공된 단서들은 책의 결말에 이르러 놀라운 복선으로 작용한다.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읽어 넘기고 있던 단조로운 서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운 연결점들을 만들어내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복선들은 결말에 이르러 놀라운 폭발을 일으킨다. 그것이 일으킨 불꽃이 성대했음을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으리라.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법이다.

 

  이 대목부터는 스포일링이 포함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서술을 다시 한 번 읽으며, 나는 토니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단순함 때문에 에이드리언이 맞은 파국을 피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어리석음과 단순함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줄리언 반스가 구사한 서술을 가능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리석음이 돌연한 깨달음을 맞으며 파국은 가장자리로 밀려 나아간다.

 

  어쩌면 이것은 ‘예감’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논했던 역사와 문학과 동급생의 자살은 진중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흩어놓은 의미들을 집중시키는 작가의 솜씨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어보길 바란다. 작품이 걸맞은 품격을 지닐 때, 상이 드리운 고고함이 한껏 빛날 수 있음을 당신이 직접 확인하기를 나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

 

 

사진을 포함한 리뷰와 다양한 서평들을 http://blog.naver.com/anssjaj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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