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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귀와 마음, 머리 전체를 채울 때가 있다. 그것은 좋다, 나쁘다,의 가치 판단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냥 조용히 나는 귀를 기울이고 그 사람의 소리에 잠긴다.
사랑도 그렇게 시작될 때가 있다. 전화선 너머 미성은 정작 만났을 때 복실복실한 외모와 어긋났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족했다. 눈은 보라고, 귀는 들으라고, 코는 냄새 맡으라고 주어졌으니 그것에 충실한 것을 근시안적이고 감각적이라고 폄하할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이 너무 이뻐서, 몸에서 나는 향내가 좋아서, 목소리가 근사해서 사랑에 빠지는 일이 그러하다.
김훈이 <칼의 노래>로 나타났을 때 문단은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의 문장 하나 하나는 곰이 동굴에서 100일을 마늘로 버텼듯이 철저하게 벼리고 또 벼린 쌉쌀한 맛이 났다. 그의 목소리를 빌리면 이야기는 하나의 완강한 사실이 되어 눈 앞에 떠올랐다. 그는 언제나 사실을 보고하고 고발하는 지점에서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문체가 서사를 앞지른다,는 말은 칭찬이기도 하고 한계점에 대한 비판이 되기도 했다. 유독 그의 문체가 빛을 발한 작품들이 역사적 사실들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신유사옥으로 흑산도에16년간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생을 마친 정약전의 얘기가 주를 이룰 것으로 기대했다. 물론 정약용의 형인 약전의 얘기는 중심 가지를 이룬다. 하지만 그 곁가지들에 김훈의 시선은 가 있다. 시대 너머, 이 생 너머를 기약하는 지점에 천주학을 걸어 놓고 부단히 이 생에서 투쟁하다 때로 꺾이고 스러져간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한 얘기.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자문하는 것은 언제나 조금은 위험하다.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들 앞에서 매혹당해서는 왜 안 되는지를 미처 묻기도 전해 숱한 이들이 그 질문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들이 산화한 지점에서 우리는 타락한 것들에 후달리고 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가장 쉬운듯하면서 용단이 필요한 일이다.
김훈은 언제나처럼 버석거린다. 때로 그의 목소리가 너무 도드라져서 그것이 싸안을 이야기들이 울툭불툭 비어져 나온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그래서 그답다,고 수긍하기도 한다. 숱한 목숨이 내던져진 절두산 아래 닿아 있는 자유로를 달려 귀가하며 그는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 고 한다. 언어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 너머로 부단히 시선을 던지는 작가의 진정성이 담보된 이야기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의 고백은 뭉클하기도 하고 실망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조금씩 밖에 더 나아갈 수 없는 우리들은 실재라고 믿는 것을 향해 생을 내어던질 수 있는 그들의 얘기 앞에서 감히 말을 잃고 만다. 너무나 큰 얘기. 언제 누가 들어도 가슴 저릿한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