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마음 속 깊은 곳에 꼭꼭 숨어있어 나조차도 그것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그런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숨어있던 기억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허를 찌르듯 나타나 한순간에 나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또 어떤 기억은 가슴 한켠에 한껏 웅크리고 존재감을 과시함으로써 나의 모든 일상과 생각에 제동을 걸기도 한다. 무엇이 되었든 그 기억들은 대부분 아픈 기억들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머리속에서 없앤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온 몸에 새겨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 기본적인 삶의 안전과 관련된 기억같은 것들은 그대로 트라우마가 된다. 루시의 어린 시절은 읽는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아버지는 독일 군인으로 오인하고 어린 아이들을 쏘아 죽였던 경험에 의해 지배받는다. 늘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죄책감은 일종의 성도착증으로 나타난다. 그 아버지의 성도착증과 트라우마를 모두 받아주는 인물이 루시의 엄마인데 나는 이 소설에서 가장 이해가 안되는 인물이 바로 루시의 엄마였다. 루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1인칭 소설이라서 그런지 루시의 엄마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랄까? 그녀의 생각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루시의 엄마가 삶에서 지키고자 하는건 무엇이었을까?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남편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중간에 루시가 반은 독일인인 윌리엄과 결혼하면서 엄마의 집으로 갔을 때 루시의 엄마는 아버지가 독일인에게 트라우마가 있는걸 알면서 독일인 남편을 데리고 온 루시를 탓한다. 이 장면을 보면 루시의 엄마는 오로지 아버지 한 사람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정상적인 삶 또는 반듯하다고 생각되는 삶에 대한 강박이 있어 자식들의 약간의 어긋남에 대해서도 용납하지 못하고 아동학대로 징벌하는 그런 인물이다. 루시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남편인 윌리엄이 루시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면서 다시 만난 이 모녀는 한 순간도 연결되지 못한다. 이제는 다 큰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는 엄마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엄마의 상을 한번이라도 갖고 싶은 루시의 바램은 늘 어긋난다. 그들은 서로가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이 소설에서 작가가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어릴 때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는 딸과 그 상처의 주범인 엄마가 십 몇년만에 만났다고 하여 갑자기 말문이 트일리가 없다. 또한 가슴에 맺혀있는 상처가 몇마디 말과 행동으로 녹을리도 없다. 우리가 신파라고 부르는 것들을 빈정거리며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데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새긴 상처가 몇마디의 용서를 비는 말에 눈물을 흘리며 껴안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것? 그게 신파지 뭐...... 그런 상처는 그렇게 해소되지 않는다. 그건 그냥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거다.
안전함과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로서의 집을 가지지 못했던 루시는 집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갈때는 항상 겁을 먹는다. 또한 호텔방은 늘 외로운 장소다. 루시에게 집다운 집을 준건 첫번째 남편이었던 윌리엄이 유일했다. 하지만 윌리엄이 줬던 집다운 집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살았던 윌리엄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어떤 권위였다. 그러니까 커다랗고 살기에 편리한 집, 매년 정기적으로 떠나는 휴가 여행, 적당한 문화생활의 향유, 주변 사람들과의 안정된 교류 등등 원래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것이 당연하게 몸과 행동에 배여 있는 그런 삶의 권위, 윌리엄의 옆이라면 나 역시 그런 안정을 나눌수 있을거라는 맹목적인 동의, 그것이 윌리엄이 가지고 있는 권위다. 그래서 루시는 윌리엄을 사랑하지만 그의 옆이 결코 편안하지는 않다. 내가 그의 삶에 붙어있는 잉여의 존재라는 느낌을 늘 가지고 있으니까.... 잉여의 존재가 아니기 위해 루시는 늘 괜찮은 척, 지금의 삶이 내 원래의 삶처럼 익숙한 척 그렇게 고군분투해야 한다. 윌리엄 역시 그것을 느끼지 못할리가 없다. 루시는 한번도 그에게 자신을 위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이 소설이 구질구질하지않고 루시가 매력적인 것은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 - 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 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거야! - 204쪽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216쪽
기억속에 무엇을 새기고 있든, 지금의 내가 설사 맘에 안들더라도 그래도 나는 루시 바턴이고 나는 계속 나아가고 살아갈거라는 절대적인 삶의 긍정, 거기에 나의 매력적인 루시가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제 노년이 된 루시와 윌리엄. 이들은 이혼한지 오래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친구처럼 지낸다. 부부든 동거인이든 어쨌든 한 공간에서 어떤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함께 산다는 건 상대에 대해 많은걸 알게 해주지만 동시에 상대에 대해 많은 부분에 눈감게 하기도 한다. 파티에서 만난 어떤 여자는 루시에게 가까운 사람에게는 하지 못할 내밀한 이야기를 한다. 적당한 익명성에 기대는 것이다.
사람들은 외롭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할 수 없다. -152쪽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서는 루시가 가진 트라우마를 쫒아갔다면 이제 <오, 윌리엄>에서는 윌리엄이 가진 트라우마를 쫒아간다. 루시에게 윌리엄은 안전을 보장하는 집같은 존재였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 남자 상당히 유아적이다. 결혼 후에 바람을 피는 것에 대해서 딱히 죄책감이 없고, 결국 이혼하게 되었을 때도 본인은 이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음에도 떠나는 루시를 한번도 붙잡아보지도 못한다. 이후 다른 부인들과 2번 더 이혼하게 되는데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뭘 해야 하는가에서 나 스스로 뭔가를 강하게 추진하고 이루겠다는 생각이 별반 없다고 할까? 중산층의 안정된 가정에, 약간 과보호적인 어머니 밑에서 모범생으로 큰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막상 무언가를 결정하고 추진해야 할 때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못하고 머뭇거리다 결국 중요한걸 놓치고 마는 그런 우유부단한 인물인 것이다. 물론 루시의 눈에는 이런 면이 보이지 않는다. 윌리엄은 늘 루시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존재였기에말이다.
윌리엄에게 틈이 생기는 것 - 이번 이야기의 시작은 윌리엄의 3번째 이혼부터이다. 조금은 불쌍하게도 일방적으로 버림받았다고 할까? 쪽지 한장에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만 때때로 아주 멀게 느껴져"라는 말한마디로 이별을 통고받았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윌리엄은 자신을 떠난 부인과 스스로 뭔가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다시 루시에게 기대고 도움을 요청하고 옆에 있어달라고 할뿐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우연히 알게된 이부 여동생의 존재, 아 윌리엄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던 어머니 캐서린에게 무슨 비밀이?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나는 바로 윌리엄의 어머니 캐서린이었다. 루시의 눈에 비친 캐서린은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타고난 우아함과 세련됨을 소유한 여인. 그리고 가끔 그런 취향을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하는 - 맘에 들지 않는 루시의 외투를 마음대로 치워버리는 식으로- 사람.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제멋대로이기도 하지만 또 천성은 다정하여 가족을 보듬어 안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런데 윌리엄과 루시가 이부동생의 존재를 알고 쫒아가면서 알게되는 캐서린의 과거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너무도 달랐다. 윌리엄과 다르게 캐서린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만들어간 존재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건 쉽지 않았을것이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상처입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시대에 이렇게 적극적인 여성은 매혹적이다.
오, 윌리엄이란 저 호명은 감탄사이기도 하고 불쌍한 윌리엄이란 내용이 숨어있는 내면의 언어이기도 하다. 오, 윌리엄 당신 알고 보니 마마보이였구나. 당신 혼자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게 뭐가 있니? 너 계속 그렇게 살래? 뭐 이런 말이 저 짧은 감탄사에서 끊임없이 들린다고 할까? 그런 윌리엄이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한다. 루시에게 나와 휴가를 같이 가줘라고.... 생각해보겠다는 거절에도 예전과는 다르게 다시 한번 붙잡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 순간 루시에게 안전한 집이었던 윌리엄의 존재는 깨졌지만 이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다정한 친구로서의 루시와 윌리엄이 첫발을 내딛는다.
오 모든 이여, 오 드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소중한 모든 이여, 그런 의미는 아닌가?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 자신 조차도! - 298쪽
우리는 타인을 아니 나 자신조차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다 알 수 없지만, 오 , 윌리엄 또는 오, 루시 또 그리고 오, 캐서린이라 부르는 호명속에 공감과 연민과 이해를 담는 것이다. 갑자기 내 주변의 가족과 친구들을 저렇게 오! 하는 감탄사를 붙여 불러보고 싶어진다. 부디 나의 호명과 존재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어지기를........
<내 이름은 루시 바턴>과 <오, 윌리엄>이 루시 바턴의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3인칭 소설로 소설속 등장인물들의 말을 통해 가끔 루시가 소환된다. 하지만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서 루시와 엄마와의 대화속에 에서 간단하게 언급되면서 궁금증을 일으키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기 다 들어있다. 그래서 스토리상으로는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고 할 수 있겠다.
루시 바턴이 태어나고 자란 미국 중부의 일리노이주 앰개시를 배경으로 그 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작인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서 다들 한번씩 언급된 인물들이라 뭔가 아는 사람을 만나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이야기들의 사이 사이 루시에 대한 이야기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온 여기 9개의 단편들이 재미있다고 말하기에는 다들 너무 아픈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어떤 폭력에 의해 상처를 받은 이들이다.
루시의 오빠 피트 바턴은 어릴 적 가난에 의한 따돌림, 부모의 학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오래된 엄마의 가게 간판으로 상징된다. 이미 엄마가 죽은지 오래되었음에도 엄마의 가게 간판은 엄마라는 존재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위로를 건넨 이웃 토미 덕분에 엄마의 바느질과 수선이라고 적힌 간판에 도끼질을 하고 부숨으로써 그 기억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신의 삶을 위한 첫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여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피트는 앞으로도 수십차례의 도끼질을 할 수 있는 첫발을 내디었으니 그 다음 발자국도 내딛을 수 있으리라.
어릴 적 엄마가 사랑을 쫒아가는 바람에 버림받은 패티와 린다 자매는 한 때는 사랑스런 아이들로 프리티 나이슬리 걸즈로 불리었다. 하지만 엄마가 불륜에 빠지고 심지어는 그 불륜의 대상에게서 버림받아버리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엄마에 대한 증오를 불어넣어주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누구보다 타인의 비난과 뒷담화에 온전히 노출되어 자랐을 이들 역시 어딘가 뒤틀려있다. 그래도 패티는 상담교사로 일하면서 자신에게 막말을 하는 아이에게 순잔적으로 화가 나 쓰레기라고 같이 막말을 하지만 곧 "네가 내게 무례하게 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그 말을 할 권리가 주어지는 건 아냐"라고 말할 수 있는 올곧은 사람이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건 상처를 서로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의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갖지 못한 언니 린다는 변태 범죄자 남편이 너무 싫으면서도 주변의 비난과 뒷담화가 두려워 그저 감내하고 참고 모른척하고 살아간다. 어머니의 그림자가 자신의 삶을 덮어버리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같은 경험을 해도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같지 않다. 모든 인간이 상처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르고, 극복하는 방법 또한 다르다. 그래서 다섯 딸이 다 클때까지 기다리고, 십삼년간 남편과 불륜관계에 있던 여자에 대해 알게 된 뒤 자신을 찾아온 심장마비에서 회복될때를 기다리고, 남편의 뇌종양이 치명적이지 않기까지 정말 이십년을 더 기다려 자신이 찾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 메리의 이야기는 읽는 독자를 웃음짓게 한다. 뭘 그렇게 미련하게 다 기다리고 다 참았는지.... 그러다 당신이 먼저 죽었으면 어쩔거냐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그녀가 노년에 찾은 온전한 사랑을 응원하고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싶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읽으면서는 내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내 마음 속 어린 루시 바턴은 뭘까라는 생각도 들고 다 치유하지 못한 내 마음속의 어린 루시를 위해 나도 이렇게 글을 한 번 써볼까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5분짜리 생각으로 아유 뭐하러 그냥 읽는걸로 만족해야지로 바뀌긴 했지만...... 그런 나에 대한 위로가 <오, 윌리엄>에 가면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이해의 노력으로 이어진다. 물론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데서 오히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을 디딜 수 있음을 깨닫는다. 내 옆에 오, OOO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를 호명하고싶어진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읽으며 다양한 사람들의 상처와 치유를 읽을 때면 책 속 말처럼 그렇게 햇빛속에 앉아있다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희망이 또는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무엇이든 가능하지만 무엇이 되어야 할지는 자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