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문학과지성 시인선 601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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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저자 이병률

문학과지성사

2024-04-24

시 > 한국시





언젠가는 알게 될 모두의 것들



사람들은 사랑을 오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심하게 구부러뜨리거나 질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요

나는 사랑을 시작하기 시작했고

개인적입니다


언제나 좋은 맛이 나는 음식을 바라지는 않아요

맛이 없거나 입에 안 맞는 음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사랑과의 잘못은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꽃을 떨어뜨린 줄기가 땅을 파고들어 열매를 맺는 것이 땅콩입니다

그것을 줄기로 치느냐 뿌리로 치느냐 관점의 차이는 있습니다

사랑은 계속해서 내 앞에서 헷갈려 하지만요


사랑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난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은 이성적으로 나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러기 떼의 숫자나 세고 돌아와도 되는 것입니다


여름이라는 계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싫어합니다

마술사라는 직업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것에는 없지만

좋아하는 것에 암호가 있다고 오래전부터 뻣뻣하게 믿어왔습니다


사랑을 감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번 생의 암호를 풀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러고 삽니까


사랑이 후방에라도 있는 겁니까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마음은 꽃게



생각을 할 때 사선으로 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식한 적 없습니다

이름에 꽃 자가 달려 있다는 사실도요

뭐든 자르고 끊어낼 것 같지만 소문이 건드릴 때뿐입니다

집게는 한 번 사용한 후에 끊어냈으니 여태 대상에 매달려 있을 겁니다

왼쪽보다는 다른 쪽으로 비켜서기 쉽습니다

경우에 따라 상하좌우는 뒤집혀 섞입니다

은신처를 여럿 파놓고 자주 숨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후퇴 뒤에는 번번이 실패만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자주 연속적으로 거품을 문다는 점이고요

죽을 때까지도 옆으로 걷는다는 사실을 모를 뿐 아니라

대체 뭐 하러 양손을 번쩍 허공에 쳐들고 다니며 씩씩대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조각들을 좋아해



싸움을 좋아해

하지만 싸워보질 않아 얼마나 잘 싸우는지 모르지


나는 시 쓰기를 좋아해

하지만 종속되어 있기만 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지


말하고 싶었지

멀리서 혼자서만 좋아해온 그것들은 실제로 만져진다고


음악에 영향받는 것을 좋아해

때문에 하루가 망가지거나 기분이 가라앉기를

한없이 그렇게 반복해


나는 말했지

소금 만드는 일을 하라고

먹을 정도는 되지 않겠지만 옷 틈새 살 접히는 틈새에

우수수 떨어질 정도의 소금을 맺으라고


그것이 우리 몸을 영하로 떨어뜨리지 않는 길이라고

오래 왔다는 사실과 멀리 갈 거라는 계산은

그래서 중요한 축적이라고


나는 철길을 좋아해

진실을 향해 멀리 뻗어 있어서

뱀을 좋아해

마주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곳에 씨앗이 모여 고인다는 사실을 좋아하고


빨간 덩어리 하나가 있어

천천히 쳐다보고 오래도 쳐다보고 있으면

당돌하게 장미가 되어 피는 것처럼


말간 숨 하나

오래 안에 들여놓고 키웠더니 춤이 되고

큰 사과 하나 깊이 먹었더니

나 또한 하루 만에 똑같이 사과가 되는 것처럼


좋아하는 하나 종일 들고 걸으면

언덕 너머 나무 밑 살고 싶은 곳에 도착하지


아, 나는 나에게 전화 거는 것을 좋아해

도대체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어떻게 걸고 받아야 하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이병률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이 출간되었습니다.

사랑의 순간들을 연상케하는 구절들이 마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도 같아 사랑과 이별, 외로움을 더 부각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봄이 오면 생각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시'입니다.

중학교 때, 봄에 만난 선생님께서 종종 시 한 구절을 뽑아 선물해주셨는데 지금도 제게 시 한 구절을 꼭 보내주신답니다.

많은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아도 신기하게 제 기분을 바로 알아차리시곤 제 상황에 맞는 시 한편을 보내주세요.

그래서인지 시를 떠올리면 사랑은 물론 따스한 격려와 용기가 자연스레 연상된답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문학 선생님께서 보내주셨던 시를 모아놓고 있는데 이병률 시인의 시도 한 편 있답니다.

훗날 보내주셨던 시들을 차곡차곡 모아 이야기를 덧붙여 책으로 만든 뒤 선생님께 선물로 드려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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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6-01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에 시를 잘 읽지 않는 편인데, 하나의책장님 서재에서 좋은 시를 읽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하나의책장님, 오늘부터 6월 시작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한 한 달 되시고,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누구나의 일생 - 오늘이 소중한 이야기 (양장본),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 수상작 오늘을 산다 1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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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의 일생

저자 마스다 미리

새의노래

2024-03-11

원제 : ツユクサナツコの一生

에세이 > 외국에세이






평범하지만 투박하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위트 넘치는 짧은 말들이 가득한 마스다 미리 작가의 작품들.

그녀가 그려낸 세계 속 주인공, 30대 일러스트레이터 쓰유쿠사의 오늘이 소중한 일상이 담겨 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쓰유쿠사는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도넛 가게에서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집에서 「화과자 가게의 하루코」라는 만화를 그리고 있지요.



【화과자 가게의 하루코】


아빠도 아빠지만 엄마도 그래. 이제 일 그만두면 안 돼?

그러게.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해야지. 용돈벌이도 되고.

하지만 조금 있으면 엄마도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야.

그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할게.

그건 그렇고. 지금 일하고 있는 실버타운은 고급스럽더라. 각각 개인 방도 있고 부부가 같이 쓰는 방도 있고. 식사도 제대로 나와. 요리사가 있으니까.

나중에 거기 들어가면 할인해줘?

할인해줘도 못 들어가! 보통 사장 정도는 했던 사람들밖에 없어.

평상시에 입는 스웨터 하나도 얼마나 고급스러운지~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부자와는 완전 차원이 달라. 진짜 부자는 이런 사람들이구나 한다니까.

빙수에 비유하자면 꿀이 듬뿍 올려진 꼭대기 사람들이네.

우리는 산기슭의 하얀 부분이고? 아하하. 우리는 뭔가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 엄마는 열심히 살고 있잖아.

그런가? 하하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고맙다. 너도 팥 삶느라 덥고 힘들지?



【화과자 가게의 하루코】


아, 그러세요? 손님은 이곳에 종종 들러 주셨어요.

그런가요?

네! 늘 콩가루 오하기랑 참깨로 두 개씩 사셨어요.

……

찾았다!! 아빠! 혼자 외출하시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요전에도 길 잃어버리셨으면서. 왜 그래~ 죄송해요. 아버지가 좀…

아버님은 저희 단골이세요! 또 언제든 들러 주세요. 고맙습니다. 아버님, 제가 아버님을 잘 아니까 안심하세요. 괜찮습니다!

……

얼마나

얼마나 불안한 마음일까. 자신을 잃어간다는 것.

과거가 희미해진다는 것.

두렵지 않을 리가 없어.

그래도 그건 절대 미안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야.



쓰유쿠사가 그리고 있는 「화과자 가게의 하루코」는 그녀가 경험했던 모든 일상들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특히 쓰유쿠사와 아빠의 대화가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답니다.





참고로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코로나 시기이기에 만화 속 주인공들 모두가 철저하게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 버렸습니다.

코로나가 처음 발생하고 많은 이들이 작별 인사도 못한 채 목숨을 잃다 보니 모두가 패닉에 빠졌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장기화로 접어들다 보니 모두가 답답하고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시기였지만 결국 마침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걷고 있더라도 결국 마침표를 찍고 빛을 보게 되지요.

주어지는 선택지가 많다면 그 또한 운이지만, 운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딱 붙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과거와 미래보단 현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교훈 삼고 미래에 성취할 일을 계획하며 가장 중요한 오늘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사는 것!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쌓이다 보면 자신의 암흑도 결국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겁니다.


가볍게 읽으려고 펼쳤던 에세이인데 지금 시기에 많은 깨달음을 줘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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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오늘을 만끽하는 이야기 (양장본) 오늘을 산다 2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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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저자 마스다 미리

새의노래

2024-03-11

원제 : ヒトミさんの戀





마스다 미리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진솔함과 위트가 가득한 그녀의 책을 보고 있자면, 책 속 주인공 나이대에 들어서지 않았어도 공감대를 자연스레 불러일으키죠.

저 또한 그랬습니다.

평범하지만 투박하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위트 넘치는 짧은 말들이 가득한 마스다 미리 작가의 작품들.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에서 그려낸 세계 속 주인공은 바로 40대 싱글인 히토미입니다.

히토미는 70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책을 벗 삼아 사시는 아버지와 언제나 밝은 미소로 반겨주는 어머니는 히토미에게 큰 보물이지요.

세 사람의 주된 대화는 계절과 음식입니다.

읽다 보면 문득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가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하죠.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히토미의 일상과 연애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우리는 매일 일상의 변화를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변화는 일종의 불안감을 자아낼 수 있는데, 그 불안감은 사람마다 체감하는 게 다르기에 좋은 불안감일 수도 있고 나쁜 불안감일 수도 있습니다.

쉼 없이 달리다 보면 그나마 남아있던 여유의 잔재마저 사라져 밤새 생각에 빠지다 잠을 못 이루곤 합니다.

1년에 한두 번 오던 게 어느새 서너 번으로 늘어난 것 같아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히토미지만, 그녀의 일상 또한 변화의 연속이죠.

불안했던 어제를 보내고 오늘이 왔음에도 다가올 내일의 변화도 언제나 불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안감 또한 잘 받아들여야만 내일의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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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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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arte(아르테)

2015-05-10

에세이 > 한국에세이 > 여행에세이





헤세의 작품을 오랫동안 읽어온 정여울 작가는 헤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가 태어난 도시부터 그가 마지막 날을 보낸 도시까지, 곳곳을 다니며 헤세의 깨우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자에게 있어서 헤세는 첫 경험과도 같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첫사랑, 방황, 슬픔의 기억과 함께.

저 또한 학창 시절 힘든 시기에 헤세의 작품을 읽으며 위로를 받았었지요.

중학교 때 처음 읽었던 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선 또 찾아 읽을만큼 제겐 깨달음이 가득한 책입니다.


칼프 역에서 내려 도시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이 강이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가 낚시를 하며 행복해하던 그 강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강을 바라보며 자연을 사랑했던 한스가 낚시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절로 그려지지 않나요?

주인공 한스가 공부를 잘하자 주변인들은 자연스레 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습니다.

모두가 공부하기를 강요했고 한스는 엄격한 환경 아래 신학교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헤르만 하일러와 친구가 됩니다.

똑똑하지만 반항적인 영혼이었던 헤르만과 우정을 쌓을 수록 한스는 지금의 환경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엄격한 규율 아래 꾸역꾸역 공부해야 하는 주입식 교육에 지쳐가는 것이었죠.

그러다 하일러가 무단이탈로 인해 신학교에서 나가게 되는데, 한스는 의지했던 친구 하일러의 부재로 인해 결국 고향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날이 갈수록 우울증과 무기력함이 한스의 목을 졸랐습니다.

빈민가에서 만나게 된 엠마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 사랑은 결국 거짓이었죠.

새로이 마음을 다잡으며 아버지의 권유로 취직했지만 이 또한 순탄치 않았습니다.

결국 한스는 술먹고 돌아오는 길에 강물에 빠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헤세의 작품들은 꼭 읽어봐야 할 고전문학으로 통합니다.

이야기로 돌아오면, 헤세가 여행했던 수많은 장소가 그의 그림 소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헤세에게 그림 그리기와 정원 가꾸기는 마법의 피난처나 다름없어 만년의 헤세는 농부처럼 부지런히 살았다고 합니다.


헤세가 태어난 곳인 칼프로부터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싯다르타』의 흔적이 묻은 장소는 물론 헤세가 잠든 곳인 몬타뇰라로까지!

헤세의 흔적이 가득 채워진 문학기행을 책 한 권으로 읽고 있자니 지금의 '나'에 대해 자연스레 생각해보게 됩니다.

문학 수업을 통해 한 번 쯤은 접하게 되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 그만큼 우리에겐 매우 친숙한 작가입니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주 읽어왔기에 헤세의 작품은 제 글쓰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근래 헤세의 작품들을 꺼내 읽는다는 건 인생의 전환점이 든 시기에 접어들어서겠지요.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에 빠져 홀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당신을 본다면 헤세는 이렇게 말해줄 것입니다.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보라고.

눈부신 하늘, 아름드리나무 잎사귀들, 아장아장 걸어가는 강아지들, 떼 지어 노는 아이들, 여인의 머리카락, 그 모든 것을 높치지 말라고.

인생의 아름다움은 그런 자잘한 풍경들에 깃들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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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니를 뽑다
제시카 앤드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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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니를 뽑다

저자 제시카 앤드루스

인플루엔셜(주)

2024-03-25

원제 : Milk Teeth

소설/시/희곡 > 영국문학 > 영미소설





젖먹이 때 나서 아직 영구치가 나지 않은 이를 뜻하는 젖니는 유치라고도 부릅니다.

즉, 소설에서 뜻하는 젖니는 과거에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끌고 온 상처와 미숙함을 뜻합니다.

주인공 '나'가 '당신'에게 쓰는 글로, 청춘이라면 겪었을 법한 미성숙함과 이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자라온 환경 때문에 '나'는 날씬한 몸에 대한 강박감을 지니게 됩니다.

표준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 나를 지키기 위해 몸이 더 작아야 한다는 것을 믿고 자란 것이지요.

날씬한 사람이 곧 세련되고 멋진 사람이라 규정지으며 철저한 식욕 억제와 꾸준하게 관리하며 자라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28세가 되던 해에 '당신'을 만나게 됩니다.


…… 당신은 내게 스물여덟 살을 맞아 다짐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당신의 입에서 소용돌이치며 흘러나오는 은빛 연기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나다워지는 것."


'당신'에게 흠뻑 빠진 '나'는 '당신'을 통해 삶의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나는 런던을 떠나고 싶었다. 사탕 공장의 부서진 침대와 펍의 숨 막히는 일에서도 말이다. 어린 시절의 버스 정류장과 전당포에서 멀리 떨어져서, 빛에 시달리는 도시를 누비고 다니며,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는 곳에 살고 싶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갈 곳으로 선택한 곳이 런던이었지만, 그 가장자리는 '나'에게 매우 날카롭고 잔인한 곳이었지요.

'나'는 카페와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보모로도 일을 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존재감이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정착하지 못하는 것도, 지금껏 생각하고 형성해 온 것들의 굴레 안에 갇힌 것도 자신 스스로임을 깨닫는 '나'이지만 '나'는 대번에 선택하지 못합니다.


뒤틀어짐을 느끼게 된 '나'는 그제야 과거와 현재에서 불안함과 두려움, 그 과정에서 털어내지 못하고 지금까지 끌어안았던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깨닫게 됩니다.

젖니를 뽑아내지 못하고 몸에 지닌 채 살아가고 있으니, 이미 어른이 되었어도 자기 몸을 온전히 긍정스럽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죠.

결국 이를 깨닫게 된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남아 있었던 자기혐오를 벗어냅니다.


나는 바르셀로나행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 있다. 감지 않은 머리카락과 씻지 않은 피부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몇 안 되는 소지품을 그러모은다. …… 웨이터가 내 테이블을 치우러 다가온다. 그는 기름과 꿀로 반짝이는 빈 접시를 보며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내게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물어본다. 그가 내 이름을 물어보자, 나는 말한다.





"뭘 원해?"라는 그의 물음에 그녀는 "전부 다 원해."를 쓰다가 지우곤 "난 너무 많은 것을 원해."를 쓰게 됩니다.

그러다 다시 지우고 결국 이러한 말을 써서 그에게 보냅니다.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선택할 수 있잖아."

내내 그의 대답을 피하거나 불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던 그녀는 마지막에 미뤄왔던 대답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 '나'가 얽매였던 상처는 결국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누구나 금수저, 은수저, 다이어수저를 가지고 태어날 순 없죠.

세상은 생각보다 공정함과는 멀어서 평범하고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진 않습니다.


불안정한 삶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춘들 중 지금도 젖니를 지닌 채 살아가는 청춘들도 많을 겁니다.

결국 이를 깨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그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북돋아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로 「솔트 워터」에 이어 발표한 두 번째 장편 소설인 『젖니를 뽑다』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찬사를 받으며  2023년 영국 왕립문학상 최종후보에 올라 저자 제시카 앤드루스는 MZ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고 합니다.

같은 또래로서 그녀의 소설을 통해 저에게 박혀있던 젖니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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