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전할 땐 스칸디나비아처럼 - 은유와 재치로 가득한 세상
카타리나 몽네메리 지음, 안현모 옮김 / 가디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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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특별하게 배우지 않아도 '대화'를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속담이다.

관용구를 많이 알아야 언어의 세계가 풍부해지기에, 우리는 언어를 배울 때 단어와 함께 관용구를 함께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영미권 관용구의 경우, 시험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기에 학창시절부터 영단어와 함께 배우고 익히니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칸디나비아 관용구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북유럽식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스칸디나비아 관용구를 두어 번 접한 적은 있지만 이에 관련하여 자세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은 없었다.

그! 런! 데! 그런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알고 나면 재미있고 알고 있으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

이상하고 환상적인 스칸디나비아 명언의 세계에 푹 빠져보자!


저자, 카타리나 몽네메리는 스웨덴 남부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그곳에서 자연을 만끽하고 카다멈빵을 먹으며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했다. 옥스퍼드와 런던에서 오랫동안 출판업에 종사했다. 영국에서 생활하며 스칸디나비아반도 인근 나라들의 문화가 매우 독특하고 유별나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최근 일부 국가에서 스웨덴 문화를 특이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스웨덴 친구는 왜 그렇게 말을 했을까?” 이에 대한 의문에 그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면 마음도 통할 것이라 믿는다. 세상을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언어라는 것을 많은 이에게 전하고 싶다. 그녀는 2019년 영국에서 스웨덴으로 돌아와 연인과 함께 말뫼에서 생활하고 있다.


역자, 안현모는 대학에서 언어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통번역을 전공했다. 익숙함과 낯섦이 포옹하듯 균형을 이루는 짜릿하면서도 안정적인 감각을 좋아한다. 그래서 매일의 일상을 사랑하고 아끼는 만큼 온 세상을 누비고 여행하는 것을 즐기며, 그 안의 사람들과 주고받는 모든 언어와 소통에서 소중한 희열을 느낀다.




♠ 작은 냄비에도 귀가 달렸잖아 Even small pots have ears

이렇게 보면 무슨 뜻인지 상상이 가는가?

아마 이 문장을 보면 단박에 눈치챌 것이다.

Walls have ears!

벽에도 귀가 있다라는 관용구가 있듯이, 스웨덴에도 비슷한 숙어가 있는데 바로 '작은 냄비에도 귀가 달렸잖아!'이다.

(참고로 스웨덴에서는 조리용 냄비 손잡이를 '귀'라고 부른다.)

이 표현은 아이들이 가까이에 있으니 특히나 대화를 조심하자는 뜻에서 사용되고 있다.


집에 있을 때, 영화를 하루종일 틀어놓는 편이다. 보는 것이 아닌 듣는 용으로.

마침 Disney의 Sleeping Beauty를 듣고 있었는데 Flora, Fauna, Merryweather의 대화 중에 이 문장이 나와서 그대로 옮겨봤다.


Fauna: Well, perhaps if we reason with her.

Flora: Reason?

Merryweather: With Maleficent?

Fauna: Well, she can't be all bad.

Flora: Oh, yes, she can!

Merryweather: Ooh, I'd like to turn her into a fat, old hoptoad.

Fauna: Now, dear, that isn't a very nice thing to say.

Flora: Besides, we can't. You know our magic doensn't work that way.

Fauna: It can only do good, dear, to bring joy and happiness.

Merryweather: Well, that would make me happy.

Flora: But there must be some way.

Flora: There is!

Fauna·Merryweather: There is?

Merryweather: What is it, Flora?

Flora: I'm going to-

Flora: Shh, shh, shh, shh, shh!

Flora: Even walls have ears.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를 우리는 Walls have ears!로도 활용할 수 있다.

어른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아이들이 가까이에 있다면 스칸디나비아식 관용구도 사용해보자.

Even small pots have ears!




♠ 늪지의 부엉이로군 Owls in the bog

부엉이는 역사적으로 지혜, 지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런 부엉이가 늪지에 빠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덴마크에서는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Owls in the bog로 표현한다.




♠ 간에서 곧바로 말하자면 Talk straight from the liver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대부분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는다.

굳이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노르웨이 사람일 것이다.

노르웨이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Talk straight from the liver이다.

간이 신체의 느낌과 감정의 중추라고 믿었던 시절에서 유래하여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 골짜기에 무민이 없네 Not all the Moomins are in the valley

무민을 보고 있으면 그저 사랑스럽고 편안한 기분이 든다.

무민과 관련된 동화책들은 당연히 하나의 책장에 꽂혀져 있고 무민과 관련된 프로모션이 나오면 꼭 챙겼을 정도로 무민이 너무 좋다.

핀란드의 대표적인 캐릭터 무민!

핀란드 문화와 디자인의 필수 아이콘이니 관련 관용구가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 머릿속에 바로 입력했다.


Not all the Moomins are in the valley

무민들이 무민 골짜기에 없다?

무민이 무민 골짜기에 없다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 멀쩡히 보고 들었는데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The lights are on, but nobody's home과 같은 맥락이다.




♠ 자전거 타러 나온 Out cycling

In Copenhagen the re are more than half a million bicycle owners.

Were everyone to be 'out cycling' on the streets at once, it would be utter chaos.

'Out cycling' therefore suggests someone is completely bonkers.

One can only guess how many thousands of people survive the morning commute through sheer luck alone.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거주하는 사람들 중 자전거를 소유하는 사람들만 해도 50만이 넘는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러 다 나왔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극심한 혼돈을 초래하지 않겠는가?

'자전거 타러 나온'은 단단히 미쳤음을 의미해 사람에게 수식어로 붙여서 사용하곤 한다.




♠ 얼음 위에 소가 없다 할지라도 No cow on the ice

아주 오래 전,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소들이 1년 내내 자유롭게 들판을 배회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소에게 물을 먹일 때는 강가로 몰았었는데, 겨울에는 농부들이 소들을 위해 얼어붙은 호수에 구멍을 뚫어 물을 마시게끔 해놨다고 한다.

그런데 간혹 얼음의 두께가 너무 얇아 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깨져버렸었는데 그렇다해도 난리피울 정도는 아니였었다.

소의 엉덩이와 뒷다리가 단단한 바닥을 지지하고 있는 한, 꼬리를 힘껏 잡아당기면 충분히 물가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빗대어 No cow on the ice는 누군가를 진정시키려고 할 때 긴장풀고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족 모임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어른들은 아직이고 나와 동생, 사촌동생은 진즉 밥을 다 먹고선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모부가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준다고 하셔서 식당을 나왔었다.

편의점으로 가는 길, 식당 바로 옆에 서점이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시곤 책 하나씩 사줄테니 골라보라는 말에 신이 나서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과 사촌동생은 재미있어 보이는 만화책으로 고르고 있던 중, 알록달록한 표지에 '속담'이라는 단어가 단박에 눈에 띄어 난 그 책을 단숨에 집어들었었다.

여담이지만, 그 책을 고른 내게 고모부는 책 읽는 걸 좋아하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나는 노는 것보다 책 읽는 게 더 좋아요라고 답했었고 그 날 이후 고모부는 위인전 세트를 사주셨었다. 그 때, 받았던 위인전은 물론 속담책까지 아직 보관하고 있다.

아무튼 집에 가자마자 속담책을 펼쳐 한 장, 한 장씩 읽어보는데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별 말 아닌 것 같은데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했었던 것 같다.

첫 시작이 '재미와 신비로움'이였으니 내게 관용구는 지금까지도 재미와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상을 휩쓸고 다녔을 때, 함께 했던 큰 조력자가 있었으니 바로 샤론최 통역가였다.

샤론최 통역가의 통역한 영상들을 보면 적절한 관용구를 활용해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관용구를 알면 알수록 언어의 내공이 한층 더 풍부해질 수밖에 없다.


휘게, 라곰 - 이미 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 우리에게는 익숙한 북유럽 라이프스타일이다.

「The prince and me」라는 영화에서도 덴마크 왕자인 에디에게 덴마크를 상징하는 것을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I don't know anyone from Denmark.

I've never heard of anyone from there.

Have you?

Yeah, sure. Eddie?

Kierkegaard, Niels Bohr, Hans Christian Andersen.

Wow.

Hans Christian Andersen? Hans Christian Andersen?

Lars Ulrich.

From Metallica?

From Metallica.

Get out.

OK.

And Helena Christensen.

Whoa, whoa, wait a second.

The Victoria's Secret model?

Yes.

OK.

That's gotta be the coolest country in the world now.

You should be a superpower.


덴마크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인어공주, 레고 블록부터 핀란드의 산타 할아버지와 무민, 스웨덴의 이케아, 노르웨이의 겨울왕국 그리고 아이슬란드까지.

저자의 말처럼 생각해보면 스칸디나비아와 관련하여 우리는 꽤 많은 것들을 이미 접하고 있다.

언젠가는 꼭 가봤으면 하는 여행지이기에 그 나라의 문화를 살펴보는 것 중 하나가 언어만한 것이 없어 이렇게 책을 펼치게 되었다.

북유럽식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스칸디나비아 관용구를 두어 번 접한 적은 있지만 영미권 관용구는 둘째치고 북유럽에 가지 않는 이상 이에 관련하여 자세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은 없었다.

이미 두번 읽었긴 했지만 요즘은 잠자기 전에 몇 페이지씩 보고 또 보기를 반복하고 있다.

책 본문 옆에는 그림과 함께 조그마한 글씨로 원문이 함께 실려 있어 덩달아 영어공부까지 할 수 있다.

이상하고 환상적인 스칸디나비아 명언의 세계에 푹 빠져있는 지금, 외국 문화와 언어에 관심있어하는 친구들을 위해 몇 권 더 구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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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8-05 19: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칸디나비아의 명언 표현이 하나같이 다 재미있네요. 하나님 설명이 없으면 대부분 이게 뭐지 할거 같아요 ㅋ 역시 유럽은 스칸디나비아~!!

하나의책장 2022-09-12 11:51   좋아요 1 | URL
이 책 보고나니 특히나 더 여행가고 싶어지더라고요^^
장거리로 비행기 탄 지가 언제인지 벌써 까마득해요ㅠㅎㅎ

mini74 2022-09-08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도 사진도 맛집 *^^* 하나님 축하드립니다 ~

하나의책장 2022-09-12 11:51   좋아요 1 | URL
리뷰, 사진 맛집이라니! 최고의 칭찬인걸요>.<
감사합니다, 미니님^^

거리의화가 2022-09-08 0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항상 정성어린 사진과 글에 놀랍습니다^^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하나의책장 2022-09-12 11:52   좋아요 1 | URL
사진은 몰라도 글에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편인데, 알아주시니 너무너무 뿌듯해요ㅎㅎ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9-08 0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하나의책장 2022-09-12 11:5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이하라 2022-09-08 1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축하드립니다.
즐겁고 행복한 추석연휴 되세요.^^

하나의책장 2022-09-12 11:54   좋아요 1 | URL
하라님, 감사해요^^
아쉽게도 연휴 마지막날이지만 행복하게 보내세요^^

새파랑 2022-09-08 16: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당선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하나의책장 2022-09-12 11:54   좋아요 3 | URL
행복한 추석 연휴 보내셨나요?
이번에는 유난히 짧게 느껴져 쉬었다는 느낌을 더더욱 못 받았던 것 같아요ㅠ
연휴 마지막날이라 아쉽지만, 그럼에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9-08 18: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2-09-12 11:55   좋아요 3 | URL
매번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행복하고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9-12 16: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나의책장님의 글을 통해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사랑하는 저자의 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베네루스 3국으로 통칭하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3국이 저마다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가 있는 것처럼, 스칸디나비아 일대 국가들의 같은 듯 다른 문화가 관용어 안에 녹아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나의책장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하나의책장 2022-11-30 09:22   좋아요 1 | URL
(이제서야 댓글을 답니다ㅠ)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님☺
오늘 날씨 정말정말 춥죠? 감기 조심하세요❤

러블리땡 2022-09-14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책장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하나의책장 2022-11-30 09:21   좋아요 0 | URL
이제서야 댓글을ㅠ
러블리땡님, 감사합니다^^ 오늘 날씨 정말 추우니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어메이징 브루클린
제임스 맥브라이드 저자, 민지현 역자 / 미래지향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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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아마존 2020년 분야 베스트셀러 1위

뉴욕타임스 2020년 최고의 도서 TOP 10

타임지 선정 올해 최고의 소설 TOP 10

버락 오바마 "올해의 책"

오프라 윈프리 2020년 북클럽 선정 도서


타이틀만 봐도 한껏 기대감을 올려주는 책으로 내용은 더 실망시키지 않는다.

한 총격사건이 불러 일으킨 거대한 바람은 우리에게 '이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줄 것이다.


저자, 제임스 맥브라이드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재즈 뮤지션이며 1957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폴란드 출신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브루클린의 빈민가 레드훅 지역과 퀸스의 세인트 올번스에서 열두 명의 형제들과 어린 시절을 보냈다. 뉴욕 공립학교를 졸업한 뒤 오하이오 주의 오벌린 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또한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보스턴글로브], [피플매거진], [워싱턴포스트] 등 여러 매체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재즈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지미 스콧의 반주자로 참여하는 등 색소폰 연주자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또한 뮤지컬 음악 감독 겸 작곡가로도 명성을 날리며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총격


탕!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

1969년 9월의 어느 오후, 브루클린 남부의 커즈웨이 빈민 주택단지 광장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해자는 열아홉 살의 딤즈 클레멘스로 마약 중개업자이며 가해자는 스포츠코트라는 별명을 가진 침례교회 집사인 쿠피 램킨이다.

칠십 일평생 적을 만들지 않았고 주민들로 이루어진 야구팀에서 코치로도 십여 년 넘게 이끌어왔던 사람이였기에 모두의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왜 악랄한 마약 딜러에게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


"스포츠코트는 류머티즘 때문에 열이 났던 거야."

"스포츠코트는 말이야… 사악한 마법에 걸려 있어. 불길한 마력이 작용한 거라니까."

총격 다음 날, 은퇴한 도시 근로자부터 부랑자, 주부, 전과자 등이 공원 근처에 있는 벤치에 모여 총을 쏜 이유에 대해 온갖 추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커즈하우스의 관리인인 핫소시지는 스포츠코트와 단짝 친구였는데, 그는 2년 전에 커즈하우스 야구팀과 워치하우스팀 간의 경기가 취소된 일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했다.

스포츠코트와 같은 동에 사는 아이티인 요리사 도미니크 르플루어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스포츠코트가 평생에 한 번쯤은 대단한 일을 할 줄 알았어."

그렇다. 다들 추측에 불과할 뿐 스포츠코트가 딤즈를 쏜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도미니크 르풀루어가 한 말에는 모두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스포츠코트


9동 주민 반 이상이 독감에 걸렸을 때, 스포츠코트 또한 심한 독감에 걸렸었다.

그 중 마이티핸드복음교회 집사가 세상을 떠나자 범범 자매는 스포츠코트 또한 요단강을 건널 것이라 말했지만 무사히 넘어갔었다.

몇 년 후, 스포츠코트가 세 번째 심장발작을 일으켰을 때 19동 주민인 지니 로드리게스가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또 무사히 넘어갔었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스포츠코트는 죽은 목숨으로 정해진 것 마냥 주민들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일흔한 살인 스포츠코트는 아픈 곳이 매우 많았다. 통풍, 치질은 물론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등이 심하게 굽어져 있었다.

왼쪽 팔에는 종양이 있고 사타구니에는 탈장으로 인해 장기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렇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불운했지만 운이 좋았다.

즉, 걸어 다니는 재주꾼이자 불운의 대명사이자 살아 있는 재앙이었으며 의학적인 측면에서는 기적의 화신이었다.



헤티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의 이름은 헤티.

그녀는 1967년 폭설 내리던 날 세상을 떠났었다.

그 날 저녁, 헤티와 게 요리를 먹고 항구를 바라보다 잠자리에 들었었는데 한밤중에 헤티가 스포츠코트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떠보니 방 안에서 빛 하나가 빙빙 떠도는 것이 아니겠는가.

헤티는 이를 보며 이 빛은 하나님의 빛이니 부두에 가서 달맞이꽃을 꺾어 온다며 잠시 나가게 된다.

부두에는 엘레판테가 있었기에 굳이 스포츠코트는 따라나가지 않았다.

엘레판테는 엘리펀트, 즉 코끼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탈리아 출신으로 건설 및 트럭 운송업을 하고 있었는데 몸집도 크고 매우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사악한 딤즈 패거리조차도 절대 엮이지 않으려고 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밤새 아내를 기다리다 아침이 되자마자 아내의 발자국을 따라 부두로 따라나갔다.

그러나 물가에서 끊어진 발자국으로 인해 아내를 어디에서도 찾을 순 없었다.

그렇게 며칠 후, 엘레판테의 부하들이 부둣가 근처에서 물 위에 떠 있는 헤티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엘레판테의 부하들은 헤티의 시신을 건져내 모직 담요에 싼 뒤, 깨끗한 눈밭에 눕혀 스포츠코트를 데려와 말없이 스카치위스키 한 병을 건네주고 경찰을 불러준 뒤 사라졌다.

자기네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헤티가 교회에서 회계를 담당했었다.

성탄절에 선물을 사기 위한 성탄 기금은 물론 회계를 담당하면서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딤즈


딤즈 클레멘스는 젊고 영리한 커즈하우스의 아들이었으며 마약을 팔면서 주민들이 만져보지 못할 정도의 돈을 벌고 있었다.

단순히 돈만 잘 버는 게 아니었다. 상류층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을 뿐더러 괜스레 쓸데없이 딤즈의 이야기를 꺼냈다간 심하게 다치거나 이름 모를 뒷골목에 묻히기도 했다.



어메이징 브루클린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가는 것은 지금부터다.

앞서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고만 서술했지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쓰지 않았었다.

즉, 피해자는 죽지 않았고 다치기만 했다.

또한 모두가 추론했을 뿐이라고 서술했지 자초지종을 아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사실 광장에서 가해자는 가까운 거리에서 피해자에게 총구를 겨눴는데 그 때 열댓 명의 목격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열여섯 명의 목격자였다.

여호와의 증인, 아기를 안고 있던 세 명의 엄마들, 푸에르토리코독립협회의 이지, 위장 임무 수행중이던 경찰, 딤즈에게 마약을 사러 왔던 일곱 명의 고객들 그리고 파이브엔즈 교회에 다니는 세 명의 신도들이었다.

이들 중 누구도 총격에 대해 경찰에게 입을 열지 않았다.

세 명의 신도들, 그 날은 스포츠코트가 난생처음 설교하기로 예정되었던 날이었기에 신도들이 안내문을 나눠주고 있는 중이었다.

나머지는 그렇다쳐도 경찰은 정말 못 본 것일까?

위장 임무 수행중이던 경찰, 스물두 살의 이드로 제트 하드만은 커즈하우스에서 처음 배출한 흑인 수사관으로 제76관할구 소속이었다.

그는 딤즈 클레멘스에 대한 수사를 진행중이었는데, 클레멘스는 단지 하수인에 불과하였으며 그 끝에는 브루클린에서 악명 높은 이탈리아 범죄조직의 핵심인 조 펙이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알아냈다.

그 날, 주택국 소속 청소부 유니폼을 입은 제트는 빗자루를 들고 광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광장에 있는 국기 게양대에서 딤즈가 앉아 있었고 그의 패거리와 고객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스포츠코트가 보였다. 항상 미소지으며 중얼거리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 때, 스포츠코트가 야구 타자의 자세를 취하고는 공을 날리는 시늉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선 킬킬거리다 돌아서려는 순간, 왼쪽 주머니에서 녹슨 권총을 꺼내 오른쪽 주머니에 넣는 것을 순간 보게 된 것이었다.

문제상황이었다.

그렇게 10미터, 5미터… 중얼거림이 멈추자 제트는 훈련받았던 동작이 저도 모르게 나왔지만 신분이 발각되면 안 되기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도 속으로 주민들이 얼른 광장을 떠나길 바랐다.

그렇게 몇몇 주민들이 자리에 일어났고 핫소시지는 물론 범범 자매까지 떠나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지 자매가 떠났고 이제 이지만 떠나면 되었는데… 떠나질 않았다.

제트는 그저 겁에 질린 채 총성이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딤즈?"

"스포츠코트 아저씨! 오, 나의 아저씨."

"너 왜 요즘 야구를 안 하는 거냐?"

"야구?"

"그래, 야구."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요."

"야구보다 중요한 건 없어, 딤즈. 이유를 좀 알아야겠다. 이 커즈하우스에서 야구에 관한 문제라면 내 관할이니까 말이야."

"그 말은 맞아요, 스포츠코트. 야구 하면 당신이죠."

"나는 이 단지 역사상 최고의 심판이야. … 그리고 치즈를 가져오는 건 나야. 베드로도 아니고, 바오로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야. 바로 나란 말이다. 난 너에게 야구를 그만하라고 한 적 없어, 딤즈 클레멘스, 알아? 왜냐하면 네가 제일 잘하는 건 야구니까. 그런데 왜 야구를 하지 않는 거냐?"

"그만 가요, 스포츠코트."

"너 아직 대답 안 했어.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너를 가르쳤어. 주일학교에서도 가르쳤고, 야구도 가르쳤어."

"꺼지라고, 스포츠코트."

조금 떨어져 있던 제트는 그가 총을 가지고 있다고 외쳤다.

순간, 딤즈는 고개를 돌렸고 스포츠코트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이마를 겨냥하던 총알은 결국 빗나가 귀를 스쳤다.

이후 경찰관이 도착했지만 광장은 어느 순간 빈 광장이 되었고 옛 동료를 알아본 제트는 자신을 자연스레 연행해달라고 부탁했다.


모두가 스포츠코트를 걱정했다.

그만큼 신뢰했던 것이었다.

헤티의 죽음 이후, 교회 기금이 어디로 갔는지 모두 궁금해했다.

스포츠코트와 매일같이 대화를 나누던 사이이니 그는 알고 있지 않을까 했지만 사람들은 더이상 캐묻지 않았었다.

핫소시지는 자네가 딤즈를 쐈으니 달아나라고 했지만 스포츠코트는 정작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자, 30달러. 내가 가진 전부야, 스포츠코트. 이걸로 버스표를 사서 어디로든 가."

"난 아무 데도 안 가."

"좋아. 그럼 이 돈은 내가 교도소로 자네 면회 갈 때 버스표 사는 데 쓸게. 그때까지 자네 목숨이 붙어 있다면 말이지."


총격 사건 이후, 조직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어 그야말로 난리가 난리가 아닌 상황이 되어버린다.




아마존 2020년 분야 베스트셀러 1위 · 뉴욕타임스 2020년 최고의 도서 TOP 10 · 타임지 선정 올해 최고의 소설 TOP 10

왜 이런 타이틀은 가지고 있었는지 짐짓 이해가 되었다.

선진국이란 타이틀이 있더라도 미국은 여전히 공정한 사회라고 할 순 없다.

지금도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이 지속되고 있기에 이를 소설에서 여실히 보여줬기에 사람들이 더 주목하며 읽은 게 아닐까 싶다.

미드 수사물을 보면 시즌 초기에 이러한 배경을 다룬 에피소드가 꽤 많다.

소설이지만 굉장히 현실적으로 사건을 다루었고 인물들의 이야기를 매우 잘 풀어내어 당시 미국 배경이 상상될 정도였다.


이 책은 특히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 읽게 되면 훨씬 더 몰입감 높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꽤 분량있는 책이기에 결말을 말하면 너무 허무해질 것 같아 함구하겠지만 Bad Ending은 아니다.


분량이 꽤 되는 책이라 읽던 도중에 멈추고 이어읽기를 반복하다 지난 주말에 자리잡고 앉아 제대로 다 읽을 수 있었다.

요새 자기계발서, 인문/철학서, 경영/경제서 위주로만 읽었었는데 제대로 소설 하나 읽었다는 보람이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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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 - 20만 부 기념 개정판
정영욱 지음 / 부크럼 / 2022년 5월
평점 :
품절





『하나, 책과 마주하다』


살아가면서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이 위로와 격려 그리고 응원이다.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따뜻한 세상이라 단언할 순 없을 것 같다.

경쟁

사회·이익사회로 변모되면서 자연스레 자기 이익 위주로만 생각하게 되었으니깐.

그렇게 우리는 이전보다 크고 작은 상처를 받게되는 일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깨움과 치유는 동질의 마음에서 나온다. 저자는 그런 우리에게 동감어린 시선으로 글을 통해 진심어린 마음을 전해보고자 한다.


저자, 정영욱은 주식회사 부크럼의 대표로 부크럼 출판사와 이외의 문화 사업을 운영 중이다.




Ⅰ 응원했고 응원하고 있고 응원할 것이다


… 현대에 우리의 삶은 진퇴양난일 상황도 배수지진일 상황도 많지 않습니다 굳이 삶 전체로 보지 않아도, 오늘만 하더라도 그랬습니다.

애초에 지금 피나는 노력이나, 혈투에 가까운 열정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면 오늘은 반만 치열하게, 내일도 반만 치열하게 해도 고작 하루 차이로 해결됩니다. 하루 늦는다고 내가 나락에 떨어지는 것도, 누가 날 죽일 듯 쫓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기로 합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장기전이기에 쉬어갈 여유를 주는 것은 꼭 필요하다.

사탐에서 유명한 이지영선생님이 세바시에 나와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뼈를 깎는 노력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주제였다.

그렇게 독하게 공부하라고 채찍질하던 선생님께서 왜 그런 주제로 강연을 하셨을까?


상에는 아직도 독함을 강요하고 성공의 중요한 키워드를 부단한 노력이라 강조하는 동기부여 강의가 많이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요.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큰 선물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아껴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그 어떤 성취도 그 다음 단계의 자기 혹사를 위한 변명이 될 뿐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도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의미 없잖아요.

자신을 아껴주세요.

자신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세요.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진짜 귀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시험이 있을 때면 한 달 전부터 꼬박 앓았었다.

처음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으나 여러 상황과 한계에 부딪히고 부담감이 생기면서부터, 밥 먹듯이 밤을 새고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몸은 점점 아파져만 갔고 쇠약해졌었다.

(당시 입시뿐만 아니라 다른 사정들이 짓누르는 상황이었었다.)

그 때, 결정적으로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마인드를 가지게 된 것이 문학선생님과의 상담이었다.

노력은 열심히 하는데 힘들어하는 나를 안타까워 하셨는지, 토요일 당직하시던 날에 학교에 잠시 오라고 연락해주셨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많은 힘을 얻었으며 무엇보다 생각을 전환시킬 수 있는 날이었다.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성과나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게 되면 결국은 내가 이끄는 삶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끌려다니는 삶이 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물론 내 삶에서 나 자신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여 주셨다.

이 모든 말들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부분 앞만 보고 달리다보면 나 자신이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기에 항상 마음속에서 되새김질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 나는 빠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힘든 내색없이 꾹꾹 참으며 감내했던 일들부터 여러 상황들이 자연스레 떠올랐었다.

당연한 건데도 당연하게 하지 못했던 일들이, 나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옥죄었었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기 시작했고 나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 진심으로 아껴주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을 제대로 새길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것」

▣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껴안고 나를 쓰다듬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이다. 곧 스스로를 껴안을 때, 채찍질할 때를 아는 것이다.

▣ 나를 알지 못하는, 곧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자신감과 자존감은 외려 나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근본 없는 자신감과 자존감이다.

▣ 나에 대한 실례는 곧, 내가 나를 믿어주지 못함에서 나오는 것이며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곧, 나를 믿어주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근거 없이 자신감만을 가지라는 건 아니다. 어떤 때에는, 예외 없이 나를 믿어 행해 줘야 하는 일들이 있다.

▣ 주위를 살필 줄 알되 그 중심에는 내가 있는 것. 간혹 이를 잘못 이해해서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 나를 인정하는 것, 즉 나의 존재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은 무엇을 이뤄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자. 대단한 걸 이루지 않은 나라도 충분히 자랑스러울 수 있다. 나 자신이 스스로의 자랑이 됨은,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해 줄 윤활제가 될 것이라는 걸 기억하자. 내가 나를 자랑스러워해야 내가 하는 일들이 자랑스러워질 수 있다. 또 내가 자랑스러워져야 내 주변의 자랑도 기쁘게 받아줄 수가 있다.


상황에 따라 자존심은 버려도 자존감만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잘 웃고 넘기는 것에 도가 텄으니 단단하고 강한 줄만 알았었다.

스스로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것만큼은 자신있다고 자부했는데 한 번 무너지고 나니 끝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작게, 작게 무너지다 크게, 크게 무너지고 나니 얼마나 스스로가 하찮아 보였는지 모른다.

스스로 인정해주는 것은 둘째치고 아껴주는 마음까지 희미해진다.


몸도 계속 아프다 보면 결국 마음도 아프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나를 더 돌보고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작은 성취라도 잊지 말고 인정해 줘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말자. 듬뿍듬뿍 칭찬해주자.




Ⅱ 이겨냈고 이겨내고 있고 이겨낼 것이다


「흔들리는 나를 꽉 잡아 주는 주문」

▣ 내 생각은 곧 말이 되고, 말은 곧 행도이 되며, 행동은 곧 내 하루이며, 하루가 모여 삶이 이루어진다.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

▣ 에스키모인은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아무 말 없이 화가 풀릴 때까지 얼음 평원을 걷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화가 다 풀리면, 멈춰 서서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 되돌아온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은 뉘우침과 이해와 용서의 길이다.

▣ 명심해야 할 것은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비난을 받았고, 잘난 사람일수록 시기하며 모함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값없는 미움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 그들에 대한 가장 현명한 복수가 될 것이다.

▣ 오늘 당장, 재미있게 살자. 꼭 오락적으로 재미를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기억에 남을 만한 것 많이 쌓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 하나쯤 이뤄 보고, 평생 안줏거리가 될 만한 미친 짓도 한 번씩 해 보고 살자.

▣ 다만, 기억하자. 단지 지금이니까 그런 거라고. 아픈 건 부정하지 않겠다만, 나중을 이야기하진 않겠다만, 그냥 지금이니까 그런 거다. 마음껏 아프고 슬퍼해 줘라. 나중엔 느끼고 싶어도, 멀어져서 희미한 감정들이 될 것이다. 지금이니까 그렇겠지, 좀 지나면 괜찮을 거야.


의지 하나가 있다. 몸무게를 감당할 만한 튼튼한 의자지만 간격이 어긋나거사 한쪽 다리가 짧아지면 쉽게 흔들리고 금세 무너진다.

저자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의, 식, 주 모두 앞서 말한 의자처럼 평행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즉, 그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은 균형에 달린 것이지 짓누르는 시련의 크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단 한 번만 주어진다.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우리는 빈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저자의 말처럼 무게를 견디는 것은 균형에 달린 것이지 시련의 크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면 좀 더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흔들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기에 누군가의 말에 휘둘릴 필요도, 그 말로 인해 나약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과정이 결국은 삶을 살아가는 토대에 불과하니깐.


친구들과 종일 시간을 보내고 늦은 밤이 되었었다.

그렇게 샤워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거실에 모여 한밤의 수다를 또 시작하려는데 그 순간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따라 부르며 눈만 땡그르를 굴리며 혹시 '내가 우리 얘들 생일을 놓친 건 아니고, 뭐, 축하할 일이 또 있었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초를 붙인 케이크를 내 쪽으로 가져오니 당연하게 나는 바로 내 옆에 있는 친구를 바라보았는데 그 친구 또한 나만 계속 보는 게 아니겠는가.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하나야."

한참이나 늦은 생일인데… 생일날 아팠던 내가 계속 마음에 걸려 미리 준비했던 것이었다.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이미 눈물은 또르르 흘러내리고 심장은 쿵쾅거리고 손도 바들바들 떨렸을 정도였다.

만나기 전부터 케이크를 골라 어떻게 숨길지, 어느 타이밍에 노래를 불러주며 깜짝 파티를 해줬을지 고민했던 N, J, A를 생각하니 마냥 귀여웠다.

친구들이 불러주는 노래가, 나를 아끼고 격려해주는 그 마음 자체가 오롯이 느껴져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나의 두 번째 생일이나 다름 없는 이 순간, 절대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 날, 친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놨었는데 저자의 말처럼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은 균형에 달린 것이지 짓누르는 시련의 크기가 아닌 것 같다.

끊임없이 위기가 찾아오고 작든, 크든 흔들리는 삶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혹은 처한 상황으로 인해 상처받을 순 있지만 휘둘릴 필요도 없고 나약해질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게 삶이니깐.

다만, 나를 존중하고 아껴주는 마음만큼은 굳건하게 지킬 필요는 있다.




Ⅲ 함께했고 함께하고 있고 함께일 것이다


사람보단 사이가 쉽게 변한다. 지나가는 세월에 따라 시시각각. 내가 냉정하게 변한 게 아니라, 우린 그냥 그렇게 거절하고 끝내는 게 편한 사이로 변했을 뿐이었다. 지나가는 세월에 못 이겨, 자연스럽게.


사람의 진가는 힘들 때보다 행복할 때 나온다.

꾀죄죄할 때보다 여유로울 때 나온다.

어려울 때의 겸손과 배려는 처지로부터 나오는 법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의 겸손과 배려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I think…

사람은 변하지 않아도 사이는 변할 수밖에 없다.

예외도 있지만 결국 영원한 관계도 없는 셈이다.

사실 나는 변한 것이 전혀 없다. 변한 것 없이, 똑같이 그 자리에 있지만 누군가는 내가 달라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결국 상대방이 느끼는 관계의 변화일 뿐이지 변한 것은 전혀 없다.


「요즘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 관계에 덜 상처받기 위한 것들」

▣ 나 싫다는 사람은 신경 끄고, 나 좋다는 사람을 신경 쓰고 살아갈 것.

▣ 혹해서 나의 약점을 보여 주는 순간, 그 사람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내 치부를 보여 주는 건 정말 주위 손꼽을 몇 사람이면 충분하다.

▣ 마음에는 이자가 없다. … 줄 거면 그 이상 되돌려 받을 마음은 버리고 줄 것.

▣ 나를 대하는 태도가 갑작스럽게 변했다면, 나에게 이득을 취하기 위해 변한 척하는 건 아닌지 주의를 기울일 것.

▣ 언제 개선될지도 모를 관계를 오래 붙잡고 끙끙 앓지 말고, 지금 내 앞의 소중한 관계를 붙잡아 둘 것.

▣ 사회에서의 관계는, 대가 없는 관계가 드물다는 것을 늘 기억할 것. 선의가 있다면, 그 선의만큼 후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 늘 기억하며 주고받을 것.

▣ 영원한 관계는 없다는 것을 기억할 것. 특히나 요즘같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선 어제의 적, 어제의 친구, 오늘의 적, 오늘의 친구.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 나를 지배하려는 사람 … 지극한 강약약강. 강약은 그러려니 해도, 약한 자에게 유독 강해지려는 인성은 피해야 한다.

▣ 술 마시면 심하게 추태인 사람. 흔히 개가 된다거나 하는 부류.

▣ 좀 불리한 건 다 모르는 사람 … 꼭 불리한 상황만 되면 모르쇠가 되더라. 꼭 거짓말을 해도 기억 안 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 꼭 때리지는 않아도 과격하게 때리는 시늉이라도 하는 사람은 믿고 걸러야 한다.

▣ 모든 것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사람. 결정의 기준이 오롯이 자신을 향해 있는 사람.

▣ 앞에서 웃고 뒤에서 칼 꽂으려는 사람. … 대부분의 사람에게 앞에선 웃어 주고 뒤돌아서면 표정 싹 변하는 사람. 괜한 걸로 미움과 열등감이 꽉 찬 사람. 나 또한 그 희생양이 될 게 뻔하다.


「관계를 오래 지키는 사람들의 공통점」

▣ 표현을 예쁘게 한다 : 보통의 대화뿐 아니라 서로 간의 이해가 틀어져 서운함을 표현할 때에도 그 표현법이 선을 넘지 않는다.

▣ 경청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 사회생활에서 화법이 중요한 만큼, 관계에 있어서 듣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것은 곧 대체할 수 없는 치유이며 응원인 셈이다.

▣ 의외로 약속에 얽매이지 않는다 : 물론 관계에서 '약속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지만, 자신에게 큰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의 어김은 충분히 관용을 베푼다.또한 어느 정도 피해가 있는 약속 어김의 경우, 약속이라는 규율보다도 피해의 정도에 따라 서운함을 표시한다. … 사소한 약속은 어느정도 눈감아 주는 관계에서는 스트레스가 현저히 줄어든다. 세상이 그만큼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

▣ 다름을 인정한다 :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 틀리고 다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도 상대가 아니고 상대도 내가 아니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다. … 또 물러선 이후엔 그의 대처에 상대가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스트레스는 덜고, 인정받는 상황을 만드는 현명한 사람이다.

▣ 거절 의사 표현이 정확하다 : 부탁을 거절했을 때의 껄끄러움이 싫어 거절을 하지 않는다거나, 상대가 포기할 때까지 애매모호하게 미룬다거나 하는 경우가 적다.


〃우리의 미래는 지금껏 어떤 가치가 있는 시간을 보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곧,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나의 미래입니다.


I think…

부정적인 감정을 풍기는 사람은 당연히 멀리해야 하지만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심어 주는 사람 또한 그 익숙함에 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그렇기에 가까이 할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관계가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나를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그 사람이 곧 나의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며칠 전, 아빠와 동생의 생일이었다.

간단하게 차리자고 마음 먹었지만 엄마와 내가 손이 워낙 크다보니 상에 음식을 다 못 놓을 정도로 푸짐하게 차렸었다.

그렇게 우리는 웃고 떠들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하루를 보냈다.


가족의 화목함과 단합을 위해 크고 작은 파티들을 많이 하곤 하는데, 그 뒤에는 언제나 나의 숨은 노력이 있다.

중학교 때부터 부모님 결혼기념일을, 고등학교 때부터는 엄마의 생일상을 차리기 시작했고 대학교 때부터 크고 작은 기념일들을 만들어 챙기기 시작했다.

출근 전, 퇴근 후 짤막하게 나누었던 말이 전부였지만 이런 날만큼은 편안한 분위기와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푸짐하게 차려진 집밥을 마음껏 즐길 수도 있다.

막상 하기 전에는 힘들다가도 맛있게 먹어줄 생각만 하면 음식 만드는 과정 또한 내겐 힐링이다. 가족들은 맛있는 음식 잔뜩 먹을 수 있어서 좋고.

축하하는 기념일이 아닌 날은 노래를 부르지 않더라도 케이크 초에 불을 붙여 박수를 치고 서로를 응원하는 말 한마디씩 건네며 불을 끈다.


다들 각자의 삶이 있으니 밥 한 번 같이 먹는 것도 매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나마 이런 기념일이라도 있어야 맛있는 것 먹으며 웃고 떠들 수 있으니 더더욱 이런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우리에겐 참 소중한 존재들이다.

마음을 담아 한껏 챙겨주고는 있지만, 나를 생각하고 아껴주는 그 마음 잊지않고 더 챙겨주고 더 아껴줄 것이다.

물론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도 잊지 않고.



무언가 알려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이라, 나도 이랬었다고 미련했던 마음을 적어 본다. 단지 그뿐. 난 이렇지만 기필코 살아간다고.

그러니 당신도 꼭 살아내었음 한다고. _저자 정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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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07-17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조건 1주일에 한 번은 부모님과 식사를 합니다. 그게 여러모로 좋은 거 같습니다.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거 같아요. 물론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한 건 아쉬움이 있지만 부모님과 같이 식사를 하는 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거 같습니다. 어쨌거나 가족이 같이 모여 밥을 먹는 건 점점 어려워지는 일이 되고 있으니까요..ㅎ

하나의책장 2022-11-30 08:1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대부분 개인 스케쥴이 있으니 빙 둘러앉아 밥 한 번 먹기 참 힘들죠.
저희 가족도 yamoo님처럼 일주일에 한두번은 서로의 시간 맞춰 저녁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있어요^^
제 친구는 부모님이 제주도에 살다보니 일이 너무 바쁘다보면 일년에 두어번 밖에 못 만난다고 하더라고요.
예전과는 달리 부모님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yamoo님 말처럼 식사 이상의 의미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레슨 인 케미스트리 1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 책과 마주하다』


진한 에스프레소같은 느낌을 준다.

부드럽고 우아하지만 매우 강렬하다.


두려울 때면 기억해야 할 유일한 사실, 변화란 화학적으로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저자, 보니 가머스는 소설가로 올해 예순다섯 살 생일을 맞은 문학계의 후발 주자다.

미국과 영국에서 카피라이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다. 야외 수영을 즐겨 하며, 조정 선수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최근까지 시애틀에 살다가 두 명의 딸과 남편 그리고 강아지 99와 함께 런던으로 이사했다.

그녀의 데뷔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20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는 보니 가머스의 원고 『레슨 인 케미스트리』였다.

“올해의 출판 센세이션”이라는 평과 함께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영국에서 16개의 출판사가 경쟁한 뒤 데뷔작 사상 가장 높은 계약금 200만 달러(한화 약 25억)에 출판권이 계약되었다.

출간 후에는 아마존 4.7점, 굿리즈 4.5점의 기록적인 평점을 달성했다.

현재는 35개국에 판권이 수출되었고, 애플TV는 이 소설을 브리 라슨 주연의 드라마로 제작하고 있다.




험난한 환경 속에서 꿋꿋이 꽃 피웠던 그녀, 엘리자베스 조트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그녀와 그녀의 오빠는 방치되며 살아왔었다.

그녀의 부모는 거짓 종말론을 사람들에게 설파하며 이와 관련된 성물을 판매하였는데 그들의 자녀는 그들의 관심사 밖이였다.

그렇게 방치된 채 자란 두 남매였다.

그녀에게 하나 남은 오빠는 동성애자였고 이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평범한 가정 속에서 살지 못했던 그녀의 운명은 초년부터 기구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구한 인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캘빈, 그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인생이 참 기구했다.

보육원에서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평범하게 사나 싶었지만 양부모가 사고로 죽어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야만 했었다.

그런 그는 "살아갈 날이 많으니까 힘내자. 내일은 달라질 거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캘빈에게 있어서 엘리자베스는 말그대로 '빛'이었다.

이렇게나 힘든 환경 속에서도 절대로 지칠 줄 모르는 오뚝이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녀의 자존감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자존감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녀는 전도유망한 화학자였다.

그렇기에 과학자다운 합리주의에 따라 모든 것을 생각해본다.

사실에 근거해서만 판단을 내리기에 자기 확신이 흔들릴지라도 무너지는 법이 없다.

그녀는 독학으로 학사 과정을 마치고 헤이스팅스 연구소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밝혀내지 못한 ‘진화 이전’ 분자의 비밀을 연구하고 있었다.

1955년, 당시 여자들은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으며 일을 하더라도 보조원이나 행정직원이 전부였다.

즉, 연구소에 있는 사람들은 엘리자베스를 심부름이나 시킬 수 있는 보조원이라 생각할 뿐 동등한 화학자로 생각하진 않았다.

단, 한 사람을 빼고! 노벨과학상 후보인 캘빈 에번스만이 오롯하게 그녀를 봐주었다.

앞서 설명한 엘리자베스가 사랑했던 인물이 바로 캘빈 에번스이다.

이 때 둘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화학자 엘리자베스 조트라는 이름을 지키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을.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동거를 하게 되었으며 둘 사이에 예쁜 딸도 낳게 되었다.

그렇게 행복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알았지만, 그녀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캘빈이 사고로 죽고 비혼모가 된 것이었다.

마냥 슬퍼하고 울부짖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아이 딸린 여자라며 연구소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뚝이다.

이미 훌륭한 화학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집 부엌을 실험실로 개조해 연구를 이어나간다.

그렇게 딸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우연한 기회로 TV 요리 프로그램 「6시 저녁 식사」의 MC로 발탁된다.

그런 말이 있다.

초년 고생길을 걸었다면 중년, 말년에는 꽃길만 가득하다고.

TV 요리 프로그램을 계기로 그녀는 미국 최고의 슈퍼스타가 된다.




참 대단한 인물이라 평할 수 있겠다.

소설이지만, 어쩌면 현실은 더 험난하기에 더 공감하며 읽은 게 아닐까 싶다.

진한 에스프레소같은 느낌을 준다.

부드럽고 우아하지만 매우 강렬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곧장 떠오른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Hidden Figures이다.

Hidden Figures는 Lessons in Chemistry와 달리 실화를 다룬 영화로, 천부적인 수학 능력을 가진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이란 인물이 나온다.

그 당시에도 백인·남성 우월주의인 시대였기에 흑인 그리고 여성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나사에서 전산원으로 일한 캐서린 존슨은 "흑인 여성"이었으니 자신의 천부적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는 없었다.

소설 속 엘리자베스 조트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캐서린 존슨 또한 오뚝이 같은 뚝심이 있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손가락질에도 자존감만큼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세상은, 참 어렵고 험난하다.

어떤 일이 닥칠 지 모르기에 더 긴장할 수밖에 없다.

자존심은 내려놓을 수 있지만 자존감은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좋지 않은 상황에 직면했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 안주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는 뚝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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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6-17 09: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엘리자베스 정말 대단하네요! 배우고 싶은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님 관심 갖고 있었던 책이었는데 덕분에 도움을 받습니다^^ 히든 피규어스도 함께 보고 싶어졌어요.

하나의책장 2022-07-23 17:2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히든피겨스 꼭 보세요! 몇 번이나 더 봤을 정도로 정말 재미있었거든요ㅎ
아마 거리의화가님 마음에 쏙 드실 거예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2-06-17 12: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질거같은 책이네요. 리뷰만으로도 약간 힐링이 되는 기분입니다. ^^

하나의책장 2022-07-23 17:2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비가 오긴 하지만 기분 좋은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2-06-17 18: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첨들어본 작가인데 표지도 인상적이고 내용도 인상적이네요~! 판권이 크게 계약될 정도면 책도 재미있을거 같아요~! 중요한건 역시 뚝심 ^^

하나의책장 2022-07-23 17:23   좋아요 2 | URL
맞아요!ㅎㅎ
주말 내내 비소식이긴 하지만 행복하게 보내세요♥

mini74 2022-06-17 19: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히든피겨스 넘 재미있었어요. 유색인종의 여성과학자들이 실력으로 이겨내는 모습 멋있었어요. 이 책도 넘 재미있겠어요 하나님 ~

하나의책장 2022-07-23 17:26   좋아요 1 | URL
역시 미니님도 보셨군요^^
재미도 있고 영어공부도 할 겸 보고 또 보는 영화 중 하나예요!
요새 인문/철학서만 읽는 것 같아 소설도 살짝 살짝 보고 있는 중이에요ㅎ
미니님,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 - 이어령의 서원시
이어령 지음 / 성안당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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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2022년 2월 26일,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셨던 이어령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

【하나의책장】을 열어 이어령 선생님의 책이 책장에 몇 권이나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적지 않은 권수를 보니, 그의 작품을 꽤 읽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때, YES24이었는지 알라딘이었는지 기억은 나질 않지만 한 해의 키워드 중 하나가 '이어령'이었으니깐.

2월 말, 이어령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선 그와 그의 작품들을 기억하기 위해 3월에 새로운 책을 집어들었는데, 바로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이다.


저자, 이어령은 1933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문리대학보》의 창간을 주도 ‘이상론’으로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한국일보》에 당시 문단의 거장들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발표, 새로운 ‘개성의 탄생’을 알렸다.

20대부터 《서울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두루 맡으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논객으로 활약했다.

《새벽》 주간으로 최인훈의 『광장』 전작을 게재했고,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아 ‘문학의 상상력’과 ‘문화의 신바람’을 역설했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기획자로 ‘벽을 넘어서’라는 슬로건과 ‘굴렁쇠 소년’ ‘천지인’ 등의 행사로 전 세계에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을 각인시켰다.

1990년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과 국립국어원 발족의 굳건한 터를 닦았다.

2021년 금관문화 훈장을 받았다.

마르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 쉼 없는 말과 글의 노동으로 분열과 이분법의 낡은 벽을 넘어 통합의 문화와 소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끝없이 열어 보인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2022년 2월 향년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Ⅰ 흙과 디지털이 하나되는 세상


서구의 두 모험가가 에티오피아를 구석구석 다니며 지도를 만들었었다. 금과 은을 구하기 위해 돌까지 조사했을 정도로 세밀하게 살펴보았으니 황제는 그런 그들에게 선물까지 내렸었다.

그렇게 그들이 에피오피아를 떠나기 위해 배에 타려고 하자 근위병들이 조심스레 그들의 구두를 벗기고 깨끗하게 닦아 황제의 말을 전했다.


그대들을 멀리 떨어진 강한 나라에서 왔다. 그대들은 에티오피아가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그대들의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땅의 흙은 우리에게 소중하다. 우리는 그 흙에 씨앗을 심고 우리의 죽은 자들을 묻는다. …… 에티오피아의 흙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형제다. 우리는 그대들을 환대했으며 귀한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흙을 단 한 알갱이도 줄 수 없다.


모험가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한 알갱이의 흙에서 나오는 힘이 에티오피아인들을 지켜준 것이었는데, 흙의 감동과 아름다움때문에 3000년의 긴 역사를 읽고 서구인의 지배를 받았으니 말이다.

서양인들은 에티오피아를 침략해 먹지도 않는 땅콩을 대지에 잔뜩 심었었지만 이는 토양에 맞지 않았고 결국 심었던 땅콩이 아프리카 땅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결국 흙의 시대, 그 지혜와 생명의 시대는 끝이 난 것이었다.

단순히 보이는 흙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었다.

모험가의 구두에는 나라를 구석구석 다니며 얻었던 보이는 흙이 아닌, 보이지 않는 흙의 정보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는 결국 흙과 디지털이 하나되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디지털 정보는 흙의 지혜를 압도한다.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지식을 검색해 습득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스마트폰이 활성화되기 이전에는 모두가 사전을 이용했었다.

모든 면에서 방대하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으며 심지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기까지 한다.

일론머스크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우크라이나를 위해 스타링크를 전격 지원하지 않았는가.

과거 아프간 전쟁도 모두가 10년은 걸릴 것이라 했지만 불과 석 달 만에 끝났으니 디지털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비행사들에게 수직 폭격의 기술을 가르쳐 수평 폭격의 적중률을 높였었던 반면에 스마트탄은 날렵하고 지능을 가진 폭탄이라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교량 하나를 파괴하려면 200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어야 했는데 레이저 유도 폭탄이 생겨나면서 12.5톤으로 줄었고 이후 이라크전에서는 4톤이면 충분히 폭발시킬 수 있었다.

GPS 유도탄처럼 위성으로 받은 위치 정보로 목표물을 향해 정확히 가격하여 적중률을 높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스마트탄이 마냥 스마트하지는 않다.

걸프전 때,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대통령궁을 폭격한 일이 있었다.

물론 스마트탄은 완벽하게 투하되었지만 후세인은 죽지 않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때, 밖에서 천막을 치고 자는 풍습이 있었는데 미군이 이를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즉, 목표물을 파괴하는 정보기술은 뛰어났으나 문화에 대한 정보는 백지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정보기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유도탄같이 기계를 다루는 하드웨어의 정보기술이며 또 하나는 상대방의 문화나 인간의 마음을 읽는 소프트 콘텐츠에 관한 것이다.

전자를 기계 기술, 후자를 지식 기술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정보기술은 부국과 강병의 수단이자 도구이다.

지식이나 문화를 목적으로 정보기술이 사용되는 경우는 미미한 편이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하드 파워에서 소프트 파워로 옮겨지는 추세로 바뀌었다.

교육, 학문, 예술, 과학, 기술 등 인간의 이성과 감성적 능력이 빚어내는 창조적 산물과 연관되어 있으며 외교와 국방에서도 커맨드 파워 command power 가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 cooperative power 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는 더 나아가 하드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할지 결정하는 기술인 스마트 파워를 강조하는 추세이다.




Ⅱ 벽을 넘는 두 가지 방법


허허벌판에서 살 수 없기에 인간은 벽을 만들었다.

그림은 벽에 뚫어놓은 마음의 창인 듯하다.

창을 벽의 상처라고 말하듯, 그림 또한 피가 흐르는 벽의 상처인 것이다.

벽은 태양보다, 구름보다, 바람보다 강하며 오직 날카로운 설치류 쥐만이 구멍을 뚫을 수 있다.


벽은 바람을 막고 풍경을 도살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이 때 날카롭고 빨리 자라는 송곳니가 필요하다.

한밤의 어둠 속에서 갉고 갉은 색채와 선 그리고 회화의 구도가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그림의 탄생이다.


희랍의 전설에는 회화와 조각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한 청년을 마음에 품은 소녀가 그와의 이별을 앞두고 상심하여 앓게 되자 소녀의 아버지가 그 마음을 알고 그 청년의 옆얼굴이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따라 윤곽의 선을 그리고 색을 칠했다.

곧 청년과 꼭 닮은 릴리프, 즉 그림과 조각의 중간인 부조가 생겨났는데 딸의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그림자를 그림으로, 조각으로 옮긴 이야기는 상징적이라기보다 사실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벽을 긁는 것, 벽에 어리는 그림자, 그리고 벽 너머로 사라질 연인에 대한 그리움.

긁는 것, 그림자, 그림, 그리움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따로 떨어져 불리던 그 말들이 하나의 초점으로 합쳐지면서 떼어낸 달력의 벽면 윙는 글과 그림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하나의 관자놀이처럼 뛴다.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벽은 무엇일까?

저자는 올림픽 개폐회식을 기획할 때 그 주제를 '벽을 넘어서'라고 했다.

그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도 철의 장막이 무너졌으니 서구 문화는 즉 벽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다.

도시든 개인의 삶이든 무엇이든 간에 두꺼운 벽을 기본으로 이루어지니깐.

성벽 안에 세워졌던 도시들로 이루어진 서양만 봐도 그렇다.

유럽은 섬이 아닌 대륙인데도 성벽이라는 제한된 도시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일찍이 고층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도시가 커져도 옆으로 퍼지지 못하고 위로 치솟아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양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두께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옛말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가 있는데, 그만큼 벽이 얇고 허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서양 집은 대개 적조식으로, 돌이나 벽돌로 벾을 쌓아 만든 것이다.

거기에 비해 한국 집은 가구식이라고 하여 기둥을 세워놓고 집을 지은 비내력벽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한옥은 벽을 터도 무너지지 않지만 양옥은 집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Ⅲ 전통 물건에 담긴 한국인 생각


전통적인 물건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 뜻이 담겨져 있다.

문풍지와 한복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은 정밀함에서 문화의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적당히 문을 짜서 단 후에 틈이 생기면 문풍지로 막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반면에, 일본은 융통성보다는 정확성에 중점을 두어 문을 닫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꼭 들어맞도록 만들기에 문풍지라는 것이 없다.

바지, 버선 그리고 되질, 말질 등도 치수를 무시하곤 한다.

즉, 한국의 멋은 약간의 비규격이 있는 멋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양의 양복 바지는 기능주의, 합리주의를 지향해서 허리춤에 꼭 맞도록 만들었었다.

반면, 한복 바지는 인체의 허리 부분은 밥 먹을 때와 굶었을 때가 다르고 건강할 때와 병을 앓고 있을 때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치수를 재서 만들었기 보다는 풀어 입을 수도 있고 조여 입을 수도 있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저자는 전통 물건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바로'융통성'이다.


치수가 잘못되면 사람이 옷에 몸을 맞추어야 하는 주객전도의 양복 문화, 그것이 인간 소외 현상을 낳는 것이라면, 넉넉한 한국의 허리춤은 끝없이 인간을 감싸주는 융통성 있는 문화의 상징이다.


서양은 자아를 중심으로 개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어 그들의 문화는 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자아의 문화란 너와 나를 구별하는 방벽과 도시와 도시를 분리하는 성벽의 문화라 할 수 있다.

한국은 물론 동양권 시인들은 두꺼운 벽이 아닌 병풍을 둘러치고 작업을 하였다.

병풍은 가볍고 신축성 있는 벽으로, 펴면 벽이 되고 접으면 한 공간이 된다.


병풍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아름답고 밝고 가동적인 벽이라고 할 수 있다.

병풍의 가동성과 신축성은 한국을 비롯한 동양적 기술의 원형이며 서구 문화와 동양 문화를 나누는 가장 상징적인 경계다.

즉, 병풍의 공간은 하나이면서 전체인 것이다.


(지금은 없지만) 어릴 적에 외가집에 가면 큰 병풍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저 보기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일종의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벽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 또한 누군가의 작품이었다고 하니 그때 봤던 병풍 기억을 되살려보고 싶다.

병풍이 다락방 옆에 있었기에 더 쭉 피면 조그마한 공간이 새로 만들어져 그 안에서 동생과 함께 놀기도 했다.

8살과 6살이 뭘 알겠냐마는 이미 그때 느꼈던 것이었다.

병풍의 공간은 하나이면서 전체라는 것을.




2022년 2월 26일.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셨던 이어령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쓰셨던 작품 중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이 무엇이었는지 책결산을 살펴보니 『너 어디에서 왔니』였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작품들을 적지 않게 읽었었고 책장에 있는 그의 책들을 살펴보니 80년대에 출간된 책도 가지고 있었다.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은 다름아닌 엄마의 책이었다. 20살이 되고서부턴 책을 더 읽었다는 엄마도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외가집에 가면 오래된 LP부터 핑글핑글 돌려서 거는 전화기 그리고 책이 다락방에 가득해 병풍을 친 뒤 다락방으로 올라가 동생과 함께 탐험 놀이를 했었다.

그러다 다락방에서 엄마 이름을 새겨놓은 책 한 권을 보게 되었고 오래된 책이 신기해 그 책을 들고 다락방에 내려왔었다.

아, 그러고보니 내가 이어령 작가님의 책을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에 집으로 데리고 왔으니, 그 책을 중학교 1학년 되는 시기에 읽었었다.

참 신기하다. 책 한 권으로도 나의 과거의 흔적들이 생각난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소재로 생각될 수 있는데 소재 하나로도 이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 생각이 이어진다.

국문학과도 가고 싶었던 학과 중 하나였는데,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비슷한 과목이 교양으로 나와 한 번 들은 적이 있었었다.

그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어령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었는데, 그 때 다시금 느꼈었다.

'역시 지성인이 맞구나. 지성인이구나!'


2월 말, 이어령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선 그와 그의 작품들을 기억하기 위해 3월에 새로운 책을 집어들었는데 그 책이 바로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이다.

14년 전, 「날게 하소서」란 제목의 시에 구술 해설을 입혀 서문을 완성한 책으로 열 세가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메시지를 꼭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 소개해 보았다.

앞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고 표현하였었다.

틀에 박힌 생각은 결국 제자리 걸음하는 것과 다름없어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될 수 있다.

틀에서 걷히는 순간, 그 때 창의적 사고가 발휘되는 것이다.

에세이지만 사고에 대한 메시지가 분명해 인문서와 다름없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책은 3월에 읽었는데 3개월만에 올리게 되었다.

쓰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이제야 재독하고 제대로 올리게 되었다.

책을 읽고선 글쓰기 노트에 정리를 마친 후에야 글을 쓰는 것인데, 지금까지 쭉 해왔던 방법이지만 바꿔야 하나 생각중이다.

아날로그적인 방식은 느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요새는 노트북 앞에 앉다가도 아프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니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아 더 느려지고 더 느려진다.

그럼에도 쭉 고수해 왔기에 쉽게 바뀌어지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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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6-16 0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어령님 마지막 병실에서도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하셨다고 합니다
육체의 고통과 쇠락의 끝자락에서도 글과 그림을 그리며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정신력에 탐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책장 스케치 멋져요
알라딘 이달의 굿즈로 줬으면 ㅎㅎㅎ

하나의책장 2022-07-17 18:26   좋아요 0 | URL
역시 시대의 지성이셨던 분이네요.
마지막 병실에서도 스케치하고 채색하셨다니.. 저 또한 그 정신력에 탐복했습니다!

오늘도 역시나 꽤 덥네요.
한여름인 8월에는 얼마나 더울지;
scott님은 주말 시원하게 잘 보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