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느와르는 주윤발과 유덕화로 통한다. 유럽의 정통 느와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우상으로 떠오른 이들 덕분에 느와르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일수도 있다. 홍콩 느와르는 파란색의 조명과 어딘지 모를 우울함, 그리고 허무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특히 이쑤시개를 입에 꼬나문 주윤발의 입가에 담긴 미소 속에 어딘지 모를 슬픔을 느낀다. 느와르는 나에게 있어 허무함이었다.

영화 <달콤한 인생>도 느와르라는 장르를 표방한 영화다. 그리고 나의 이미지에 걸맞게 영화 속에서는 허무감이 잔뜩 배어져 있다. 영화 초반 선우(이병현)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선우의 쉐도우 복싱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초반부 독백은 불교의 선문답이다. 그것이 벽암록의 고승 이야기 였던것 같기도 하지만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 선문답은 마지막 부분의 고승의 달콤한 꿈이야기와 겹쳐지면서 허무감을 극도록 끌어낸다.

깔끔한 외모와 그 외모만큼 깔끔한 일처리를 자랑하는 김실장 선우는 강사장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을 받는다. 자신의 젊은 애인이 혹시 남자가 있는지 감시하고, 만약 그렇다면 조용히 일처리를 해 줄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선우는 강사장의 젊은 애인을 보는 순간 마음의 작은 파장이 인다. 아주 조그만 파장.

스승님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까? 바람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까? 제자야, 그것은 바로 네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우의 흔들리는 마음은 결국 그녀와 애인 모두를 살려두게 되고, 이것을 강사장은 모욕감으로 받아들여 그를 죽이려 한다. 물론 죽이기 전 선우가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면 살려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선우는 자신의 그 작은 파장을 자신조차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장은 이내 커다란 파도로 밀어닥쳐와 끝내 강사장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한밤중 제자가 잠에서 깨어나 흐느낀다. 이것을 괴이하게 여긴 스승이 왜 우느냐고 묻는다. 제자는 달콤한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우는것이냐? 그 달콤한 꿈은 현실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끝내 현실이 되지 못할 달콤한 꿈. 그 꿈을 꾸는 동안의 달콤함은 잠시 일어난 마음의 파장과 같은 것. 버드나무도 아니요 바람도 아닌 너의 마음이 흔들릴 때 그 흔들림을 끊는 방법은 바로 자기자신의 소멸을 통해서다. 불교의 수행은 바람과 버드나무와 나와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움직임의 소멸이 아니며, 움직임 그 자체의 소멸도 아니며, 바로 자기자신의 소멸을 통해서 모든 움직임 자체가 사라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우에게 있어서는 그 자신의 소멸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는 물 위를 바라보며 자신의 모습에 취한 나르시스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르시스임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지막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쉐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한지를 보여주며, 그 허공을 가르는 주먹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창 밖의 불야성 욕망의 도시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모호한 모습 그 자체를 통해 나르시시즘과 허무주의를 모두 표현해내고 있는듯 싶다.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지못하겠어요. 말해봐요.

아마 선우는 평생을 생각하더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7년을 섬겨온 보스가 왜 자신을 내치는지 자신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 선우는,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선우는 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호수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 숨진 나르시스처럼 선우 또한 우상화된 자신의 모습에 빠져 끝내 끝을 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허무주의로 향해 가는 그 길의 끝을 그는 결말을 알면서도 끝내 되돌아서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자신이, 자신이 생각하던 그 아름다운 선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테니까...

크리스터퍼 래시가 70년대 미국사회를 나르시시트의 사회라고 보았듯이 그 사회는 현재 우리 서울의 모습과 닮아있다. 스포츠에 열광하기도 하고, 스타에 광분하며, 자신의 블로그에 영혼을 뺏기는 모습속에서, 나도 우리도 모두 일정 부분 나르시스트임을 인정한다면 선우의 자기애와 그 끝없는 허무에의 질주를 이해할법도 할만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6-06-06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우의 자기애와 허무에의 끝없는 질주.. 네 이 영화 참 슬펐었죠. 그렇게 소멸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도 나르시스트나 다름 없죠.. 정말 영화를 잘 보시고 잘 쓰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편안한 휴일 보내셨는지요?

하루살이 2006-06-0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휴일은 없답니다. 흑흑.
달력의 빨간 날자에 쉬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래도 주일에 하루 쉴 때는 행복^^.
 
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손영기 지음 / 북라인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책은 전반적으로 해석의 문제에 집중되어져 있다고 본다. 한의학이란 것이 고정불변의 진리를 담은 책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 사람들의 건강에 관련된 문제들을 그 시대의 눈으로 바라본 것임을 전제로, 한의학은 자연과 인간등 세상만사의 진리를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음양과 오행이라는 틀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되어진 것이 어찌보면 한의학의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임상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분명 우리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일 터이다.

고대 중국의 4가지 의학의 발달은 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한 것임을 밝히고,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병의 종류와 그 대처법도 변해왔음을 보여준 저자는 그것이 우(공간)와 주(시간)라는 시대와 공간이라는 제약때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제약을 염두에 둔 해석적 자유를 펼치는데, 현대의 문제를 토의 울로 보는 관점에서, 저자는 새로운 마이너스 건강법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즉, 공해와 먹거리의 오염, 스트레스의 증가로 오행 중 토가 울되어져 있는 것이 먼저 해결되지 않는한 음양의 변화나 오행의 움직임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다른책 먹지마 건강법 등을 통해서 육식의 금지, 인스턴트 식품의 금지, 3백 식품의 금지 등을 주장한다. 이것은 모두 토의 정체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렇기에 해토를 먼저 해주어야지만 비로소 우리가 흔히 접하는 녹용, 인삼과 같은 약성이 강한 약재들도 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고 보는 것같다. 즉 과잉섭취된 영양과 독소로 말미암아 비위와 장이 상해 있는 상태에서 제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는다 하더라도 결코 건강해진 몸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오행의 각 요소에 연결되어져 있는 오장과 육부중 토라는 것은 나머지 목화금수의 변화와 움직임을 조절해주는 작용을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순조로운 운행은 어불성설일 것이라는 뜻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현재 서울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건강해지기 위해선 영양과잉과 독소로부터의 해방을 먼저 이뤄야만 하며, 그것은 바로 해토라는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의학을 제대로 공부해보지 않은 독자로서 저자의 주장이 과연 정설인지, 또는 올바른 해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시대와 지역적 흐름에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변해가는 것이 옳다면 그의 한의학 이론에 대한 재해석도 분명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듯하다. 그리고 또한 몸과 마음을 따로 보지 않았던 우리네 사유체계를 전제로 어떻게 먹을 것인가와 함께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두려움이나 슬픔 기쁨 등등이 장부와 연결되어져 있다고 본 선조의 생각이 꼭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마음과 몸이 서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그 진위에 대한 연구와 함께 마음에 대한 공부 또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 도솔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장일순씨 생전의 서예와 그림, 그리고 말씀 등을 싣고 있다. 그 스스로 많은 책을 남기지 않은 관계로 매우 소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도 보여진다. 파격적인 한글과, 간결하면서도 지조나 사람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는 난 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와 여유를 주는 소중한 책인듯 싶다.

장일순 씨는 60년대 중립평화론을 주장하다 옥고를 치르고 나서, 요주의 대상에 오른 인물이다. 김지하의 정신적 스승이며, 원주라는 곳이 박정희 정권시절 정치적 투쟁의, 민주화를 위한 메카로 떠오르게 만든 숨은 주역이다. 최근 웰빙 바람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 유기농에 대한 접근도 이미 이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왔다고도 할 수 있다.  <한살림>을 통해서 땅과 농부와 도시의 소비자가 하나가 되어 더불어 잘 살자는 취지의 협동조합 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인 것이다. 그의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는 한결같이 퍼 주었다. 그것은 부자의 여유로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항상 바닥에서 기어 모든 뭇 생명들과 함께 하자는 그의 사상의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풍성한 그의 모든 생각들의 대부분을 드러낸다고 생각되어지는 말씀이 있다.

 

친구가 똥물에 바져 있을 ‹š 우리는 바깥에 선 채 욕을 하거나 비난의 말을 하기 쉽습니다. 대개 다 그렇게 하며 살고 있어요. 그러나 그럴때 우리는 같이 똥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 여기는 냄새가 나니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는냐고 하면 친구도 알아듣습니다. 바깥에 서서 나오라고 하면 안 나옵니다.(147쪽)

 

우리는 세상을 향해 무던히도 욕을 해댑니다. 저래서 나쁘다. 이래서 나쁘다. 저러니 안된다. 이러니 될 리가 있는냐?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저런 사람은 살 가치가 있다 없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으례 그러려니 하며 술안주로 사람들을 올려놓습니다. 흔히 뒷다마(담화?)라고 하죠? 아니, 뒤에서 욕하지 않고 바로 앞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고 합시다. 상대방은 그 가르침에 따르던가요? 장일순은 그렇게 해서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두발로 딛고 있는 바로 그곳으로 내려가 함께 나오자고 해야 한답니다. 그래서 그는 전두환도 노태우도 사랑해야 한다고 얘기했었죠. 내가 너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이 올바르기 때문에, 넌 바닥을 기는 나쁜 놈이기 때문에 내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처한 그 곳으로 함께 가서, 왜 잘못되었는지를 직접 깨닫게 하여 함께 나오자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 친구를 위한다면 그 똥물로 들어갈 각오를 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우린 에이, 넌 그냥 그렇게 살아라 하고 체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끝끝내 바깥에서 외치며 스스로 잘났다고 자위할련지도 모르죠. 그러나 장일순씨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생이 바로 똥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진짜 얻어야 하는 것은 누굴 이기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삶이기 때문이다.(231쪽)

 

그는 평화로운 삶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다 퍼주었습니다. 그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 또한 그렇게 퍼줄 것이라 믿습니다. 평화는 그렇게 하나 둘씩 물들어 가겠죠. 겨울의 눈이 봄 햇볕에 녹듯 말이죠. 얼어붙은 땅이 어느새 풀어지듯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 의학의 기초 - 영원한 건강의 원리
모리시타 게이이치 지음, 기준성 감수 / 태웅출판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자연의학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의학에도, 한의학을 비롯한 동양의학에도 섣불리 포함시킬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또 하나의 서양의학인 대체의학에 집어넣기에는 그 사유의 기본 틀이 전혀 다르기에 단순히 대체의학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다. 또한 서양의 진단을 통한 동양적 치유의 개념이라고 하기에도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 사유의 기본틀은 동양적이면서, 그것에 대한 증거자료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서구의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기본적인 주장을 들어보기로 하자. 이 책은 장조혈설과 혈구분화설을 큰 축으로 하고 있다. 장조혈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골수 조혈설과는 완전히 다른 이론이며, 세포 분열이 아닌 혈구 분화로 조직이 이루어진다는 주장 또한 기존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즉,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모넬라 형태(죽과 같은 점액질 상태)로 장에 도달하고 이것이 그대로 장점막을 둘러싼 후 장융막으로 변해가며, 이것은 다시 적혈구모세포를 통해 적혈구를 만들고, 이것이 다시 백혈구 등을 비롯한 혈구 즉 피를 이루며, 피는 온 몸을 돌면서 각 장기와 체세포의 조직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음식이 장으로, 장이 피로, 피가 몸을 이룬다는 것으로서 말 그대로 우리가 먹는 것들이 피와 살로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서는 계통발생학적으로는 뼈를 가지는 어류 발생 이전의 생물체에서 혈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과 개체발생학적으로는 올챙이에게서도 혈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골수조혈설이 말하는 뼈나 골수가 피를 만든다는 것이 왜 틀린 이론인지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또한 토끼의 뼈로 가는 모든 혈관을 막아도 결코 빈혈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예로 들며 피는 뼈와 상관없이 장에서 만들어짐을 보여준다. 이러한 근거로서 장에서 발생하는 적혈구모세포와 혈구발생과정등을 슬라이드로 찍어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세포를 만드는 것은 기존의 세포 분열을 통해서가 아니라 혈구를 통해서 인데 이것은 분열에 의한 세포의 탄생은 끝없는 분열로 말미암은 비대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가 없다는 측면에서  반론을 제시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골수에서의 적혈구 생산은 절식이나 단식과 같은 특수한 상황하에서 일정량의 혈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미 피로 이루어진 골수가 다시 역으로 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우리 몸에서 발견되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는 밖에서 안으로의 침투가 아니라 생활환경의 악화로 세포체제의 유지가 어려울 경유 퇴화함으로써  체세포가 만들어낸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갖는 의미는 병의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며, 그것은 대부분 먹거리와 관련있다는 점이다. 즉 장기나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조직의 이상이며, 그 조직은 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나쁜 피로 인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나쁜 피는 장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이 장은 음식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장에서 음식물이 부패한다는 것이 만병의 원인으로 파악할 수 있다. 몰론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똑같은 음식이라 하더라도 장의 건강상태에 따라 부패의 독소를 걸러내는 능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장의 건강여부는 플로라라고 하는 유익한 세균여부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이 플로라의 건강은 최근 MBC  다큐멘터리<곰팡이>에서 보여주듯 발효음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도정하지 않는 곡물이며, 그것에 채식 위주의 반찬, 덧보탠다면 몸통 전체를 먹을 수 있는 소어패류정도가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것들도 과식을 하게 되면 장의 건강을 해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도 장을 부패시키는 음식으로서 멀리해야 할 것은 육류다. 장의 건강을 해치고 피를 산성화시키는 주요인은 아미노산인데 이것은 육류를 통해 들어온다. 우리가 육류를 섭취하는 이유는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고자 함인데, 이것 또한 서구의 잘못된 영양학으로 인한 오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곡물을 통한 탄수화물이 지방과 단백질과 같은 필수영양소로 변해가는데, 단백질을 섭취한다는 명목으로 아미노산을 몸 안으로 집어넣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장의 건강을 위해 피해야 하는 음식물로는 또한 도정한 곡물과 설탕, 화학성분이 들어간 패스트푸드, 유제품 등이다.

요약컨대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건강하게 사는 법은 통곡물 위주의 식사에 채소와 소어패류를 조금 가미한 소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과식과 미식은 금물. 이것이 좋은 피를 만들어 또한 건강한 몸을 만든다는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이 의견에 100% 동감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두 가지 있다. 먼저 백혈병 환자들에게 골수 이식을 통해 치료의 효과를 거둘수 있다는 것, 최근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줄기세포라는 것은 세포분열을 통한 세포의 탄생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이다. 이것 또한 분명 자연의학을 주장한 저자는 설명할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아직 그 정수를 모르는 독자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부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에 비유되는 건 많다. 연극이 그렇고 바둑도 그렇고 야구도 그렇고... 특히 스포츠라는 것은 그것이 승부가 극명하게 갈라진다는 점에서, 승리를 위해선 엄청난 피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훈련의 과정에서 얻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쉽게 찾을 수 있을련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들은 끊임없이 나오곤 한다. 특히 복싱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배고픔과 연관되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인생의 굴곡을 잘 드러내는 소재로 자주 쓰여진다. 헝그리 복서의 헝그리 정신. 현재 우리나라에 챔프가 없다(1명 있나?)는 것은 바로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우스개 비슷한 소리도 결코 쉽게 무시못할 이유중의 하나일련지 모른다.

아무튼 밀리언달러 베이비라는 이 영화도 맨 처음 이런 스포츠를 통한 인생이야기 처럼 보였다. 복싱은 모든게 거꾸로 라는 모건 프리먼의 해석에 잔뜩 어떤 격언들이 쏟아져 나올 것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건질건 있다. 공격을 위해선 한발짝 물러날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너무 멀리 물러서면 펀치가 다다르지 못한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여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이스트우드가 직접 말하기도 하지만 그의 체육관에 쓰여져 있던 tough ain't  enough.  즉 이말과 위의 말이 합쳐졌을 때 비로소 인생에 대한 훌륭한 교훈을 하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두기. 용감하게 나아갈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설줄 아는 지혜.

그러나 영화는 중반부 서서히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훌륭한 가르침으로 매기(힐러리 스웽크)는 승승장구 하고 결국 챔프전까지 도달한다. 하지만 그의 행복을 시샘하는듯한 치명적 사고. 경추와 척추를 다침으로써 신경이 마비되고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매기. 이 때부터 관조적 입장에서 바라보던 영화는 점차 감정이입의 격류속으로 흘러간다. 처음엔 매기의 입장에 처해 과연 저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것인가? 가족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이기심. 그것보다도 더 큰 복서로서의 꿈의 좌절. 복서가 손가락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건 죽음 그 이상의 고통일 것이다. 그 고통이 전이되는 듯 하던 순간, 감정의 흐름은 이제 프랭키에게로 간다. 매기가 자신의 목숨을 끊어달라고 프랭키에게 부탁하면서 이내 프랭키의 고뇌에 같이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프랭키는 23년을 한결같이 매주 교회에 나간다. 교회에 가서 목사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던지는 늙은이. 매주 딸에게 보낸 편지는 반송되어져 문앞에 떨어져 있다.  언뜻 이 상황을 잘 이해못하다가 결국 프랭키가 매기의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목사와 상담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

그는 그 상처를 끝끝내 자신으로부터 털어내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또 다시 그는 23년의 세월로도 치유하지 못했던 그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짊어질지도 모를 결단을 내려야한다. 그는 트레이너 이기 전에 유능한 치료사였다. 어떤 상처도 그의 손을 거치면 흐르던 피가 멎는다. 하지만  뼈까지 깊게 파고들어간 상처는 결코 피를 멎게 할 수 없다. 프랭키는 자신의 몸에 그런 깊은 상처를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그것보다 더욱 큰 상처를 지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상처는 그녀를 치유해준 영광의 상처다. 오직 복서로서의 꿈을 위해 늦은 나이에도 상관하지 않고 그것만을 향했던 매기. 그녀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영광을 경험했고, 최고의 자리 바로 아래까지, 아니 정말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으며, 꿈에 도달한 행복을 맛보았다. 그 행복감이 사라지기 전에, 관중의 함성이 잊혀지기전에, 고통스런 인생을 끝낼 수 있다면 그녀는 비록 짧은 영광이고, 짧은 인생이었지만 후회없으리라. 프랭키는 그것을 알기에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비록 그들이 피를 나눈 혈육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욱 진한 그 무엇인가로 끈끈히 맺어진 사이였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오! 나의 <모쿠슈라>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클레어 2005-03-2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글..추천합니다.

하루살이 2005-03-26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프랭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