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깨닫는 것은 삶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많은 것들로 인하여 꿈은 항상 꿈으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태반이다. 농경시대의 삶은 생노병사의 흐름이 급변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물론 제도적 변화나 국가의 흥망으로 인한 구조적 문제를 제외하고- 예측가능한 테두리내에서 행동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를 한번 둘러보자. 사방에 죽음의 냄새가 깔려있고, 사랑 또한 공기 속에 부유하고 있다. 누구나 어느 순간 느닷없는 사랑과 죽음 앞에 당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음~ 이건 마치 무슨 보험 광고 같기도 하다. 실은 그렇다. 이 시대는 보험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닥칠지 모르는 무엇인가를 대비해서 어떤 준비를 해 두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외출>의 두 남녀는 이런 느닷없이 다가온 사고로 만나게 된다. 외도하는 두 남녀의 각기 다른 남편과 아내로서 만나게 된 두사람은 그야말로 느닷없이 사랑에 빠진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르는 교통사고가 하필이면 외도하는 두 남녀에게 닥침으로써 사랑의 첫 대면을 하게되는 남녀 주인공은 혼돈스럽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실(배우자의 외도)과의 만남은 혼돈이다. 사고로 누운 배우자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바람과, 살아서 변명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지나면 애증도 사라지고,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그러나 이해는 어디까지나 이해이고, 그것이 변치않는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우연성은 <외출>의 영문제목 April snow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월에 내리는 눈이란 무엇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봄을 좋아하고, 눈을 좋아한다는 주인공의 바람을 한번에 해결시켜버린 4월의 눈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들이 삶으로 편입되고,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린(교통사고로 죽게되는 남자) 삶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도 죽음 마냥 결국 누군가에게 아무런 예고없이 닥치는게 현대인의 운명이지 않을까?

그런 장난같은 운명에 우리가 그나마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동병상련. 같은 일을 같이 겪는 사람들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도 없다.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사고가 주위에 널려있듯이, 특별한 경험의 공유 또한 이미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렸다. 사랑의 가능성 또한 일상다반사가 되었지만, 헤어짐도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초연해지기도 쉬워졌다. 그래서일까, <외출>에서 나타나는 사랑은 뜨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냥 흘러가는 바람마냥 세월속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그 잔잔한 흐름이 알 수 없는 애틋함을 가져다준다. 알수 없는 사이, 우리는 서로 위로가 되어준 것일까? 사랑의 종점이 과연 어떻게 될지 여전히 우리는 똑같이 알 수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은 되어주기를 바랄뿐이다.

그럼에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특히 배용준이 흘리는 눈물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감정의 과잉처럼 느껴진다. 한 순간의 사랑이지만 헤어져야만 하는 사랑의 아픔 때문일걸까? 아니면, 자신도 이런 불륜을 해보니, 아내가 가졌던 그 불안하지만 달콤한 사랑을 이해하게 됐기 때문일까? 즉, 그 이해는 바로 불륜에 대한 이해이며, 따라서 그것은 불륜으로부터 배척당한 자기자신에 대한 존재를 자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일지도...

그런 감정의 과잉에 조금 영화보기가 괴로운 것을 제외하면, 영화의 끝맺음은 마음에 와 닿는다.

손예진 : 어디로 가죠?  배용준 : 어디로 갈까요? (눈이 덮힌 겨울 풍경을 배경으로 사랑에 대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엔딩장면은 크레딧의 마지막까지 시선을 사로잡아둔다 )

아무도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느닷없이 찾아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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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고 나서 책을 읽었어요. 책이 더 나았다는 기억이 나네요. 배우들의 연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나를 쳐라 - 세상을 치는 경허 스님의 죽비소리!
경허 스님 지음, 한용운 엮음, 석성우 옮김, 김홍희 사진 / 노마드북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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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금 비아냥 거리는 투로 '선문답' 이라는 것은 동문서답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물론 불교에서 선문답은 깨우침을 일으키는 대화일 터이지만 그것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지극히 어렵다는 점이 일상용어에서 조금 다른 의미로 쓰여지는 이유일 것이다.

<나를 쳐라>는 경허 스님(한 세기 전 고승으로 한용운 스님의 스승이기도 함) 의 게송과 일종의 선문답을 실은 책이다. 그래서 상당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모든 걸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럼없이 읽어본다. 책의 말미에는 경허스님의 일대기가 수록되어져 있다. 중간 중간 <나는 사진이다>라는 책을 쓴 김홍희 씨의 사진이 실려있기도 하다.

먼저 사진부터 이야기 하자면 정결함을 드러냈다고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다. 고즈넉함과 깨끗함이 묻어나는 사진들은 경허스님의 말씀과 잘 어울러진듯 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의 중간, 다음 페이지 간격으로 놓아둔 절의 기둥을 찍은 사진이다. 몽타쥬 효과라고 할까? 첫 사진은 뼈대만 남은 기둥 사이로 바다가 펼쳐져 보이지만 책장을 넘기면 그와 똑같은(아주 흡사한) 배열의 기둥 사이로 산이 우뚝 서 있다. 이 두 사진이 주는 감흥은 글로 표현하기에는 좀 무리인듯 싶다. 삶의 무상함이 배어나오는 듯한 인상은 독립된 사진을 통해서는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여겨진다.

이 책은 경허 스님이 남겨놓은 대부분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이별에 대한 싯구가 상당히 많이 눈에 띤다. 이별이라는 것의 대상이 삶인지, 속세인지, 연인인지, 가족인지, 국가인지, 욕에 사로잡힌 나인지는 독자가 판단해야 하겠지만 그 쓸쓸함만은 글 사이 사이 가득하다. 이별 이외에도 특별히 마음이 쓰이는 부분은 건강에 대한 이야기다. 마음 공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건 건강이라는 스님의 말씀은 특별한 선문답이라거나, 게송이라기 보다는 나이드신 어르신께서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의 충고로 들린다. 건강을 전제로 마음 공부에 전념하라. 마음 공부는 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요, 제일 먼저 행해야 할 것은 화를 내지 않는 일로 여겨진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의 어려움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쉽게 알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화를 내지 않는 방법은 틱낫한 스님으로부터 한 수 배워도 될 것이다. 왜 내가 이토록 화를 내는지, 그 이유에 대해 곰곰히 들여다봄으로써, 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경지. 그것은 어찌보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지 가능한 일이기도 할 터이니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를 쳐라>는 나에게 새로운 화두를 하나 던졌다. 내가 받아들인 화두는 '일없이 산다는 것'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에 치여 사는지를 한번 둘러보라. 사랑하는 사람을 자주 만날 수 없는 것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도 모두 무엇 때문인가 돌이켜보자. 또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때문인지 생각해볼때 일없이 산다는 것은 수많은 의미를 쏟아낸다. 그냥 문자 그대로 일없이 산다는 것의 축복은 물론이려니와 스님이 말씀하신 일없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좇아 천천히 나의 마음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보자.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일없이 살 수 있겠는가? 내가 나일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이미 일의 포로가 되어있지는 않았는가 반성해볼 일이다. 가끔은 일없이 살아보자. 일없는 가운데 나의 참모습을 들여다보자. 시계 쳇바퀴 돌아가는 모양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과연 가능한 일일지는 모르겠으나 깊은 숲 속에 홀로 놓여진 나를 상상해보자. 아마 견딜 수 없을지도. 그렇게 놓여진 나를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를 쳐라. 내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하늘과 닮을때까지 나를 쳐라. 그래서 고독도 무상함도 모르는, 푸른 하늘에 점점히 흐르는, 가뭇없이 사라지는 구름이 되라. 일없이 나를 쳐라. 배고픔도 이상도 꿈도 모두 잊고 나를 한번 쳐라. 그 몸뚱아리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삶의 무상함은 슬픔이 아니다. 항상 그러하지 않으니, 항상 그러한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음이요, 그러니 내가 변해가는 것을 막으려 할 필요도 없음일 터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애써 지키려하지 말고, 내가 찬찬히 둘러본 마음이 저절로 흘러가는대로 맡겨둘법도 하다. 나를 치니 마음이 흐른다. 아무 것도 머무르지 않음에 기뻐할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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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부터 한달에 하루는 굶어보자고 생각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하루 끼니를 굶은 돈으로 배곪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모금에 나서는 것도 아니요, 결식아들의 배고픔을 직접 체험해보자는 뜻도 아니다. 그저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 욕심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TV를 끄고 온종일을 보내다 보면 하루가 이렇게 풍성해질 수 있을까 놀라게 된다. 매일 TV를 끄고 살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TV나 라디오 없이 하루를 보내면서 행복해한다. 물론 처음엔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지만.

순전히 그런 이유때문이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번 재충전을 위해 회사나 학교를 쉬는 것 마냥, 나의 몸뚱아리도 가끔은 쉬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말이다. 내 몸 속에 보이지 않는 내장들도 가끔은 쉬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괴상망측한 생각으로부터 하루 단식은 시작했다. 좀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하루 단식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하루 반 정도다.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 전까지. 먹는 것은 차나 생수. 이런 날엔 TV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프로그램은 온통 음식 이야기다. 돌리는 채널마다 먹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배고픔은 그야말로 고통이다. 다이어트보다는 살을 찌워야 할 판에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한번 작정했으니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참아낸다. 머리 속에 계속 어른대는 음식들.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 내가 얼마나 식욕이라는 탐욕 앞에서 무력한지를 실감하게된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시간을 먹는 것에 소비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된다. 음식을 준비하고, 밥상을 차리고 ,먹고, 설겆이 하고. 우리네 삶에 먹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없으니, 하루의 많은 부분을 공들여 준비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느끼는건대, 하루 단식을 끝내고 먹게되는 밥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쌀 한톨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내장도 푹 쉬워 행복해했을 테지만 혀와 뇌는 더욱 행복해진다. 물론 인내의 열매이긴 하지만.

끼니의 소중함, 참기 어려운 탐욕의 실체. 하루 단식은 의외로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이제 두번 시도해봤지만 아무래도 익숙해지기는 힘들것 같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실험을 해볼지 확신할 순 없지만 나태해진 나의 마음을 일깨우는 소중한 경험임에는 틀림없다. 가끔은 비워보자.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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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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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라크 포로에 대한 미군의 가혹행위를 담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세상이 벌컥 뒤집어졌던 일이 있었다. 언뜻 생각하기엔 학대자 개인의 잔인함에 혀를 내두르다, 이것은 미군이라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힘의 우월성을 가지고, 그것을 최대한 누려보고픈 욕망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어느 잡지에서 이런 잔혹함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스탠리 밀그램의 심리 실험을 예시로 들었다. 인간이란 불합리한 명령앞에서도 얼마나 복종을 하는지 보여주는 이 실험을 통해 미군의 잔혹성과 함께 나치의 비인간적 행위가 어떻게 가능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인간이란 자신의 의지보다는 상황의 논리에 의해 행동이 선택되어진다는 측면을 이해했다고 할까... 이런 상황의 논리는 이 책 3장의 달리와 라타네가 행한 실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권위에 복종한 사람은 대략 65%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 65%라는 숫자에 현혹되어, '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마 그랬을 수도 있을거야' 라고 넘겨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머지 35%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머지에 대한 설명은 어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심리학 실험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한 논거로 짤막한 예시를 통해 접해왔기 때문일까? 실험에서 드러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향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바로 이런 부분에 메스를 들이댄다. 그 이외의 사람들, 실험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차곡차곡 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실험이 끝나고 나서 피 실험자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추적하는 것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심리 실험이 가져다준 압박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 경로가 뒤바뀌어 버린 사람, 그리고 주류를 형성했던 행동을 선택한 사람이, 실험이 끝난 후 비슷한 상황에서 비주류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심리실험을 행한 사람들에 대한 오해를 씻어내고자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 또한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영화<어퓨 굿맨>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퓨 굿맨>은 탐 크루즈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인데 군대 내 폭력을 다룬 법정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군대 가기전에 한번 보고, 제대 하고 나서 다시 우연찮게 접하면서 순간 내가 얼마나 변해 있었는지 굉장히 놀랬던 적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학생이 개구리복(군복)을 입고 나서는 사선에서 자신의 동료들의 목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으니 말이다. 즉, 내가 겪은 상황이 어떤 사건의 당사자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버렸다. 상황에 대한 이해, 실험의 당사자가 겪은 경험이 가져다준 변화를 나는 영화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이 책은 20세기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심리실험 10가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맛깔스럽게 써내려간다. 이 책의 흐름이 심리에서 뇌로 변해가듯, 심리를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도 유심론적 측면에서 뇌생물학쪽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다만 이런 흐름이 환원주의를 넘어서 기계론적 환원주의로 흘러가지 않을까 못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즉, 우울증이나 경계성 장애 등등의 여러가지 정신병을(이 책에선 또한 정신병에 대한 진단이 얼마나 허구일 수 있는가도 보여준다) 뇌의 일정부분의 고장으로 발생한 것으로 치부하고, 이런 병에 뇌의 이런 부분을 제거하면 된다는 식의 치료방법이 횡행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환원적 방법을 통한 치료가 어느 정도 성과를 가져온 것을 현실로 목격하고 있고, 그것이 당사자에겐 희망으로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이해와 치료가 어떤 부작용이나 오해를 가져오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을 가질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좀더 차분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실은 이런 환원적 사유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황우석 박사의 사건이 가져다준 희망과 절망의 희비극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도 되지 않을까 싶다. 만병통치약에 대한 인간의 숙원,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에 대한 염원. 정말 가능한 일일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를 읽으면서 아직도 오리무중인 인간 심리에 대해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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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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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는 2,30년 전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다.  이 가족은 대도시가 아닌 조그만 소도시 대학에서 히틀러학을 가르치는 아버지와 노인들에게 요가를 가르치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 자식들( 이 부부는 결혼과 이혼을 여러번 거쳤기 때문에)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아이가 어른 같고 어른이 아이같기도 하며, 대화 중간 중간 라디오나 텔레비젼의 소음이 끼어들고(이게 바로 책의 제목 화이트 노이즈를 의미한다.) 수많은 브랜드 이름의 홍수들이 넘쳐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쳐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설 전체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차 있다. 사건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유독가스를 실은 기차가 전복되면서 발생하는 소동, 그리고 어머니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 실험용 약물을 복용하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큰 얼개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야기보다는 주인공 각자의 행동양식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본질보다는 항상 이미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로 보여진다. 그것은 소설 전반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족은 미국에서 사진이 가장 많이 찍힌 헛간으로 유명한 관광명소를 찾아간다. 그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지만 실제로 그 헛간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 과정속에 드러나는 대화를 엿들어보면

"일단 이 헛간에 관한 표지판을 본 다음에는 헛간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여기 오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항복입니다. 우린 그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만 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 과연 우리는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와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주어진 정보와 이미지에 파묻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열네살짜리 아이와 아버지의 자동차 속 대화도 잠깐 들어볼까!

<오늘밤에 비가 올 거예요

지금 오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오늘밤이라고 했어요>

<지식은 컴퓨터에서 컴퓨터로 이동하지요. 그것은 매일 매순간 변하고 자라요.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 실제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소설은 이런 생각의 현미경을 가지고 공포라는 감정을 들여다본다. 공포라는 것은 실제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이미지가 범람함으로써 쓸데 없이 비대해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현대 우리의 삶에서 비만이 주는 공포로 말미암아 수많은 다이어트가 성행하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건강 정보들로 인해 나는 항상 어디가 아픈 사람이지 않는가 염려해야 하며, 잠재적 암 환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 또한 자신의 신체적 변화가 주는 직접적인 공포보다는, 검사에서 드러나는 수치로 인해 막연한 공포를 갖게 되고, 죽음이라는 감정이 발생하는 뇌의 작용을 억제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하지만, 오히려 현실과 개념사이의 구분을 잊어버리는 부작용에 시달린다.

유독가스가 새어나옴으로써 더욱 아름다워진 석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나 감성을 갖어야할지도 잘 모르는듯이 보여진다. 그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 또한 매체를 통해 겪은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통해 배워야지만 가능한 것일련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본질보다는 이미지로 가득차 있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의 포장을 걷어내지 못하고, 또 설령 걷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다른 포장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쉽사리 본질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포장은 수많은 화이트노이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이트노이즈 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우리네 삶은 우울한 색깔로 뒤덮여 가고 있는듯만 하다.

소설은 결말부에 충격적 사건을 내놓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결로 믿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믿음 또한 본질적 믿음이 아니라, 누군가 믿지 않으면 건재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믿는 척 함으로써 발생하는 믿음일 뿐이다. 즉 포장지를 걷어낸 것은 거짓 믿음이며, 이것 또한 또 다른 포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결국 우리는 진짜 사물에 한발짝도 다가서지 못하고, 진실보다는 거짓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서글프다. 살아간다는 것은 진실과 하등의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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