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화이트 노이즈는 2,30년 전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다.  이 가족은 대도시가 아닌 조그만 소도시 대학에서 히틀러학을 가르치는 아버지와 노인들에게 요가를 가르치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 자식들( 이 부부는 결혼과 이혼을 여러번 거쳤기 때문에)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아이가 어른 같고 어른이 아이같기도 하며, 대화 중간 중간 라디오나 텔레비젼의 소음이 끼어들고(이게 바로 책의 제목 화이트 노이즈를 의미한다.) 수많은 브랜드 이름의 홍수들이 넘쳐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쳐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설 전체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차 있다. 사건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유독가스를 실은 기차가 전복되면서 발생하는 소동, 그리고 어머니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 실험용 약물을 복용하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큰 얼개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야기보다는 주인공 각자의 행동양식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본질보다는 항상 이미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로 보여진다. 그것은 소설 전반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족은 미국에서 사진이 가장 많이 찍힌 헛간으로 유명한 관광명소를 찾아간다. 그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지만 실제로 그 헛간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 과정속에 드러나는 대화를 엿들어보면

"일단 이 헛간에 관한 표지판을 본 다음에는 헛간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여기 오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항복입니다. 우린 그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만 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 과연 우리는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와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주어진 정보와 이미지에 파묻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열네살짜리 아이와 아버지의 자동차 속 대화도 잠깐 들어볼까!

<오늘밤에 비가 올 거예요

지금 오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오늘밤이라고 했어요>

<지식은 컴퓨터에서 컴퓨터로 이동하지요. 그것은 매일 매순간 변하고 자라요.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 실제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소설은 이런 생각의 현미경을 가지고 공포라는 감정을 들여다본다. 공포라는 것은 실제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이미지가 범람함으로써 쓸데 없이 비대해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현대 우리의 삶에서 비만이 주는 공포로 말미암아 수많은 다이어트가 성행하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건강 정보들로 인해 나는 항상 어디가 아픈 사람이지 않는가 염려해야 하며, 잠재적 암 환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 또한 자신의 신체적 변화가 주는 직접적인 공포보다는, 검사에서 드러나는 수치로 인해 막연한 공포를 갖게 되고, 죽음이라는 감정이 발생하는 뇌의 작용을 억제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하지만, 오히려 현실과 개념사이의 구분을 잊어버리는 부작용에 시달린다.

유독가스가 새어나옴으로써 더욱 아름다워진 석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나 감성을 갖어야할지도 잘 모르는듯이 보여진다. 그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 또한 매체를 통해 겪은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통해 배워야지만 가능한 것일련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본질보다는 이미지로 가득차 있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의 포장을 걷어내지 못하고, 또 설령 걷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다른 포장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쉽사리 본질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포장은 수많은 화이트노이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이트노이즈 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우리네 삶은 우울한 색깔로 뒤덮여 가고 있는듯만 하다.

소설은 결말부에 충격적 사건을 내놓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결로 믿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믿음 또한 본질적 믿음이 아니라, 누군가 믿지 않으면 건재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믿는 척 함으로써 발생하는 믿음일 뿐이다. 즉 포장지를 걷어낸 것은 거짓 믿음이며, 이것 또한 또 다른 포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결국 우리는 진짜 사물에 한발짝도 다가서지 못하고, 진실보다는 거짓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서글프다. 살아간다는 것은 진실과 하등의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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