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혹성탈출>은 1968년 개봉을 했고, 이후 시리즈로 1편을 포함 5편이 상영이 됐다. 이후 팀 버튼 감독이 2001년 리메이크를 했고, 2011년부터 리부트 시리즈가 시작됐다. 이번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그 네 번째 리부트라 할 수 있다. 


리부트 시리즈는 유인원 시저를 주인공으로 해서 진행된다. 이번 네번째 시리즈는 시저가 죽고 나서 그가 남긴 말과 법이 어떻게 계승되는지가 중요한 내용이라 보여진다. 인간과의 공존을 위해 애썼던 시저와 달리 그의 사후 인간의 시대가 저물고 유인원의 시대가 오면서 새롭게 리더가 된 프록시무스는 인간을 완전히 제압하고 유인원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꾼다. 반면 독수리를 길들이며 함께 살아가던 독수리 종족의 유인원 노아는 프록시무스에 잡혀간 동족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리고 도중에 시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인간 노바와 동행하게 된다. 하지만 노바는 프록시무스는 물론 노아와도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이번 네 번째 영화는 그야말로 그래픽 수준에 감탄하게 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유인원들의 표정은 살아 있고, 다양한 감정을 표출한다. 또한 동작도 자연스럽고 털 한 올 한 올까지 생생히 묘사되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원경을 표현하는 장면의 경우엔 그래픽 느낌이 살짝 묻어난다.


1. 계승

새로운 생각을 일깨워 세상을 이끌어 가던 리더가 죽고 나면, 그 리더를 계승하는 자가 나타난다. 꼭 1인이 아니더라도 그 뜻을 이어받기 위한 무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리더의 뜻은 여러가지로 해석되거나 또는 곡해된다. 그래서 새로운 파가 줄줄이 생겨나고 이들 간의 진실 다툼이 벌어진다. 이런 경로를 통해 리더의 생각은 시대에 맞추어 새롭게 재탄생하기도 하지만, 처음 본 바탕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또한 거세진다. 

아무튼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지능이 발달한 유인원들을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일깨운 시저의 생각이 어떻게 변모되어 전파되는지를 보여준다. 계승의 어려움을 실감케 하며, 우리가 항상 처음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 공존

<혹성탈출> 1편이 준 충격은 지구에서 인류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것, 그것도 바로 인류 자신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에 있다. 그 이후의 시리즈 또한 인류의 오만이 어떤 일을 불러왔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런데 이번 리부트 4편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인간의 오만함을 반성하지 않고, 인류가 다시 지구를 정복하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음을 살짝 보여준다. 아마도 이후 5편이 나온다면 이런 인류와 유인원과의 전쟁이 주된 내용이지 않을까 싶다.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는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개인을 넘어 종으로까지 이어진다. 권력을 나눠갖는 평등한 공존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혹성탈출>은 인간과 유인원 간의 끝이 없는 권력 다툼으로 그 시리즈와 리부트 또한 끝이 없을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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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팬더 시리즈가 4편까지 이어졌다. 단언컨데 이는 '포'라는 주인공의 캐릭터 덕분일 것이다. 팬더가 주는 귀여움에 자신도 알지 못했던 쿵푸 능력을 쌓아가며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2008년 첫 편이 나왔을 때 465만명, 2011년 2편은 506만명, 2016년 3편은 398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하지만 8년 만에 나온 2024년 4편은 170만 명을 모으는데 그쳤다. 시리즈가 주는 피로함인지, 너무 오랜만이어서인지, 취향의 변화인지는 분석해볼 일일 것이다. 


관객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포의 활약상은 여전하다. 게다가 이번엔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고, 영적 지도자로 거듭나야 한다. 자신의 제자가 될 젠이라는 여우와 용의 전사로서의 마지막 전투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게다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복잡하고 숨가쁜 도시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1. 씨앗을 뿌리는 자의 의무

사람들은 편안함을 추구한다. 아무래도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 편안함에 머무르는 안주는 어찌보면 안분지족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양분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점차 만족감은 줄어들고 정체 또는 퇴보하는 삶이 될 수도 있다. 

포는 이제 용의 전사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후계자를 지목, 영적 지도자로 변화를 꾀할 시기가 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면의 평화'가 '냉면의 평화'가 되는 먹탐어린 팬더다. 과연 그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를 맞닥뜨릴 수 있을까. 제자라는 씨앗을 키워낼 수 있을까. 씨앗을 뿌리는 자는 현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자이다. 씨앗을 키워내 수확을 거둘 때까지 보살필 줄 아는 지혜와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이는 어른이 된다는 또다른 이름이다. 씨앗을 품은 포가 어떻게 어른이 될 것인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2. 아전인수가 주는 웃음

요즘 정치권에서는 '문자 논란'이 거세다. 똑같은 문자를 보고서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하는 아전인수가 판을 친다. 현 정권에서 특히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이런 아전인수 해석을 보며, 그것에 정답을 선언할 수 없다는 현실이 도리어 한글이 얼마나 어려운 문자인지를 실감케 한다. 

영화 <쿵푸팬더4>에서도 주니퍼시의 지하 은신처의 범죄인 친구들이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폭력을 멈추고 사건을 해결하자'는 이야기에 '폭력을 멈추고 나중에 더 큰 폭력으로 선물하자'고 해석하며 포 일행을 풀어주는 장면 등은 실소를 넘어 큰 웃음을 준다. 우리 정치권의 해석도 이와 같아 웃음을 준다면 다행이겠지만, 이런 해석이 정쟁을 낳고 있어 안타깝다. 아무튼 웃음을 주는 아전인수 해석이 현실을 은유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대한민국의 현재를 떠올리게 만들어 쓴웃음도 함께 지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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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녀가 죽었다>를 보고나서 첫 느낌은 '이거 웹툰 원작이 있는 거 아니야?'였다. 하지만 원작은 따로 있지 않았다. 실제 사건에서 가져온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떤 느낌이 이 영화를 웹툰 원작으로 느끼게 만든 것일까. 이야기 전개의 신선함, 또는 사건 전개의 빠른 속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이야기의 반전은 어느 정도 예상이 됐지만, 그렇다고 그 재미를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영화는 전반부 공인중개사인 구정태(변요한)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구정태는 고객이 맡긴 집 열쇠로 몰래 고객의 집을 방문해 인증샷을 찍고 타인의 비밀을 훔쳐본다. 일종의 관음증. 관음은 남들은 모르는 사실을 자기만 알고 있다는 우월성과 함께 몰래 행하는 짜릿함이 주는 쾌감, 즉 도파민 샤워를 맞는 일이다. 따라서 이것이 지나치면 중독에 빠질 수도 있다. 구정태는 관음중독자라 할 수 있다. 


영화 후반부는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의 시선과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오직 돈을 필요로 한 한소라는 초기엔 명품으로 치장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실제 명품을 구입하고 이용할 만큼의 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계속하기도 힘들고, 돈벌이에도 한계가 있다. 인생 자체를 포기하려는 순간 자신의 사진 속 배경의 헌혈 포스터 사진이 눈덩이 효과를 가져온다. 명품만 아는 '된장녀'에서 버려지고 다친 애완동물을 구하는 개념있는 여자로 변신한다. 여기에 더해 구독자들로부터 기금을 모아 사치스럽게 살아간다. 


문제는 관음증 구정태가 관종 한소라를 만나면서부터다. 구정태는 한소라의 숨겨진 모습을 발견하고자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한소라는 자신의 가면, 페르소나가 벗겨진 민낯을 구정태가 봄으로써 자신의 관종 활동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한 가지 계략을 쓴다. 이 계략으로 인해 구정태는 위험에 빠진다. 과연 구정태는 이 위험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스포일러 주의-

관음과 관종이 충돌하면서 빚어진 사건. 그리고 관음과 관종을 일으키게 만든 도파민의 과잉. 사건이 끝나고 매듭지어질 즈음, 감독은 갑작스레 형사의 입을 통해 시니컬한 한마디를 던진다. 관객의 마음 한 구석에 구정태가 누명을 벗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 즈음, 관객들을 정신 차리게 만든 호통이다. 관음증 또한 결코 가벼운 범죄가 아니라는 것을. '어디서 피해자 코스프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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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터져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적이라는 이름으로 또다른 인간을 쉽게 죽이곤 한다. 평상시라면 절대 가능하지 않을 일이지만 적이라는 명칭이 부여되면, 그는 인간이 아닌 적일 뿐이다. 


만약 공상과학영화에서처럼 휴머노이드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인류는 인간을 꼭 닮은 그들을 쉽게 죽일 수 있을까. 아마도 전쟁에서 상대를 죽이듯 쉽게 방아쇠를 당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닌 우리의 동반자마저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고장나거나 지겹다며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을까. 영화 <크리에이터>에서는 AI를 죽이는 군인들이 머뭇거리는 병사들에게 "AI는 인간이 아닌 프로그래밍 된 것"들이라며, 인간이 아님을 되풀이해 강조한다. 


-스포일러 주의-

영화 <AI소녀>는 한 프로그래머가 음지에서 소아성애를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을 소탕하고자, 인공지능 소녀를 만들어 미끼로 사용하다 정부 기관에 들켜  심문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부기관은 이 소녀가 진짜가 아닌 인공지능인 것에 놀라며, 함께 소아성애자를 발본색원하자는 제안을 하고, 프로그래머는 이 프로젝트에 합류한다. 영화는 후다닥 10년 20년 세월이 흘러감을 보여주고, AI소녀는 스스로 진화를 해 간다. 젊었던 프로그래머가 늙어 갈 즈음에는 인공지능이 휴머노이드 로봇과 결합해 인간 소녀와 꼭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능은 이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있다. 하지만 이 AI소녀에게는 올가미가 씌여 있다. 바로 프로그래밍, 즉 프로그래머가 정한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소녀가 즐기는 취미는 춤이지만, 목적과 맞지 않기에 제대로 출 수가 없다. 프로그래머는 이 소녀에게 주어진 목적성을 없애 준다. 소녀는 자유로이 춤을 춘다. 


인류에게 주어진 권리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백인 남성 중심에게만 주어졌던 인권의 개념은 점차 인종을 넘어서고, 여성, 아동에게 확장되어졌다. 그리고 최근엔 동물권으로까지 넓혀졌으며, 기후위기로 인해 환경권까지도 거론되고 있다. 이제 AI의 발달로 인간과 다름없는 인공지능 캐릭터들이 등장하게 된다면 이들에게도 AI권이 주어질지도 모르겠다. 영화 <AI소녀>는 어떤 선택의 상황에서 AI에게 스스로 자신의 결정을 취할 권한을 준다. 프로그래밍을 넘어선 결정, 즉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개념을 도입한다면, 유전자로 프로그래밍 된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인간은 그 프로그래밍에 완전히 얽매이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도래할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인공지능의 자유의지를 인정해주어야 할까. 영화 <AI소녀>가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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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치권의 프레임 중 하나는 <운동권>이다. 소위 386이라 불리던 세대로, 지금은 686이라 할 수 있는 1980년대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세대를 일컫는다. 우리나라의 부흥기를 이끌고, 그 결과도 함께 만끽하고 있는 세대라고 할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은 이 운동권 세력이 권력의 중심 한 편에 서서, 자신이 그리는 공정한(?) 미래를 위해 최고 권력, 즉 대통령이 되기 위한 싸움을 전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기에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를 담아내면서, 얼핏얼핏 우리 역사 속의 정치가들과 역사적 사건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차용해, 예수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배신을 정치권력을 향한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삼국지의 계략을 떠오르게 만드는 갖가지 술책이 등장한다. 예전 개그콘서트에서 '내 그럴 줄 알고~' 처럼 상대보다 한 발 더 나아가는 전술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물론 예측 가능한 클리셰도 많다. 


<돌풍>의 두 주인공 설경구와 김희애는 시리즈 12편 내내 역사의 무게를 홀로 짊어진 양 진중하고 가열차게 그려진다. 그런 이미지의 표현으로 목소리는 짙게 깔려, 간혹 자막을 통하지 않고는 그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정도까지 되어 아쉬운 부분들도 있다. 


아무튼 <돌풍>을 보고 있으면 현실을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하지만, 가끔은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과장된 경우도 있으니.... <돌풍>의 핵심 키워드는 설경구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 아니라 더 큰 거짓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목적론적 윤리관 그 자체. 결과를 위해선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 가치관은 시간과의 싸움과도 연관되어 있다. 긴 호흡이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경구는 이 주장과 함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한정된 시간을 달라고 계속해서 부탁을 한다. <돌풍>을 보면서 이내 씁쓸해지는 것은 설경구의 주장이 드라마 끝까지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스포일러 주의-

<돌풍>에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더 큰 거짓말이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힘을 두 가지 꼽을 수 있을 듯하다. 바로 언론과 검찰. 현 정권을 포함한 기존의 권력 집단들이 손에 쥐고 싶어 한, 또는 개혁하고 싶어한 두 세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설경구의 주장처럼 '거짓말을 이기는 더 큰 거짓말'이 성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집단이기도 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더 큰 거짓말이 이기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진실이 이기도록 만들 수 있는 세력일 수도 있다. 


<돌풍>에서는 단 한 번도 언론이 더 큰 거짓말을 밝혀 내지 않고-못하고가 아니라- 진실을 파헤치지 않는다. 그저 더 큰 거짓말에 놀아나고 그대로 전달하는 앵무새일 뿐이다. 그나마 검찰은 더 큰 거짓말과 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는 순전히 설경구와 친구 관계인 검사가 진실을 향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마저도 결국 목적론적 윤리관에 자리를 내어주고 말지만. 


칸트가 말한 "네가 행하는 규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하라"라는 의무론적 윤리관, 더 나아가 중용에서 말하는 신독()까지 나아가는 도덕적 자세는 <돌풍>에서 사치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설경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돌풍처럼 쓰레기 같은 세력을 깨끗이 씻겨낸 바로 그 자리에 무엇이 새롭게 자리잡을 수 있을까. <돌풍>이 불어 깨끗해진듯 보이는 거리가 또다시 쓰레기로 채워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은 더 큰 거짓말의 부작용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돌풍>을 보고나서도 개운하지 않은 기분도 바로 이 부분이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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