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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치권의 프레임 중 하나는 <운동권>이다. 소위 386이라 불리던 세대로, 지금은 686이라 할 수 있는 1980년대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세대를 일컫는다. 우리나라의 부흥기를 이끌고, 그 결과도 함께 만끽하고 있는 세대라고 할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은 이 운동권 세력이 권력의 중심 한 편에 서서, 자신이 그리는 공정한(?) 미래를 위해 최고 권력, 즉 대통령이 되기 위한 싸움을 전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기에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를 담아내면서, 얼핏얼핏 우리 역사 속의 정치가들과 역사적 사건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차용해, 예수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배신을 정치권력을 향한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삼국지의 계략을 떠오르게 만드는 갖가지 술책이 등장한다. 예전 개그콘서트에서 '내 그럴 줄 알고~' 처럼 상대보다 한 발 더 나아가는 전술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물론 예측 가능한 클리셰도 많다.
<돌풍>의 두 주인공 설경구와 김희애는 시리즈 12편 내내 역사의 무게를 홀로 짊어진 양 진중하고 가열차게 그려진다. 그런 이미지의 표현으로 목소리는 짙게 깔려, 간혹 자막을 통하지 않고는 그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정도까지 되어 아쉬운 부분들도 있다.
아무튼 <돌풍>을 보고 있으면 현실을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하지만, 가끔은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과장된 경우도 있으니.... <돌풍>의 핵심 키워드는 설경구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 아니라 더 큰 거짓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목적론적 윤리관 그 자체. 결과를 위해선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 가치관은 시간과의 싸움과도 연관되어 있다. 긴 호흡이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경구는 이 주장과 함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한정된 시간을 달라고 계속해서 부탁을 한다. <돌풍>을 보면서 이내 씁쓸해지는 것은 설경구의 주장이 드라마 끝까지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스포일러 주의-
<돌풍>에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더 큰 거짓말이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힘을 두 가지 꼽을 수 있을 듯하다. 바로 언론과 검찰. 현 정권을 포함한 기존의 권력 집단들이 손에 쥐고 싶어 한, 또는 개혁하고 싶어한 두 세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설경구의 주장처럼 '거짓말을 이기는 더 큰 거짓말'이 성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집단이기도 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더 큰 거짓말이 이기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진실이 이기도록 만들 수 있는 세력일 수도 있다.
<돌풍>에서는 단 한 번도 언론이 더 큰 거짓말을 밝혀 내지 않고-못하고가 아니라- 진실을 파헤치지 않는다. 그저 더 큰 거짓말에 놀아나고 그대로 전달하는 앵무새일 뿐이다. 그나마 검찰은 더 큰 거짓말과 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는 순전히 설경구와 친구 관계인 검사가 진실을 향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마저도 결국 목적론적 윤리관에 자리를 내어주고 말지만.
칸트가 말한 "네가 행하는 규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하라"라는 의무론적 윤리관, 더 나아가 중용에서 말하는 신독(愼獨)까지 나아가는 도덕적 자세는 <돌풍>에서 사치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설경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돌풍처럼 쓰레기 같은 세력을 깨끗이 씻겨낸 바로 그 자리에 무엇이 새롭게 자리잡을 수 있을까. <돌풍>이 불어 깨끗해진듯 보이는 거리가 또다시 쓰레기로 채워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은 더 큰 거짓말의 부작용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돌풍>을 보고나서도 개운하지 않은 기분도 바로 이 부분이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