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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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된 홍세화씨가 생존을 위해 택시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를 직접 쓰고 있다. 파리의 고단한 생활을 일기장 써내려가듯 써가면서 간간히 한국에서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은 그의 현재 생활이 얼마나 고단한 것이며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면서도 결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홍세화씨는 프랑스 삶 속에서 그들의 똘레랑스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다. 똘레랑스란 타인의 다른 의견을 용납하는 자세, 법과 탈법사이의 허용되는 반법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프랑스가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평등적으로 대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똘레랑스라는 것이 바로 이성적 사유의 확장으로 가능한 것임을 우리의 정적 관념과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

반면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 똘레랑스라는 것이 어찌보면 공자의 말씀중의 한대목과 똑같은 사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즉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정신은 똘레랑스와 같은 자리에 놓아도 되지 않을까?

아무튼 그의 이 똘레랑스 정신에 대한 찬가외에 독자의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는 바로 개똥 3개에 대한 우화. 서당 선생님과 3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바른 소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땐 자신이 개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나의 양심을 찌른다. 침묵도 저항의 한 수단일 수 있음을 주장하며 외치지 않고 지나온 지난 세월에 대한 부끄러움이 문득 내가 개똥 처먹는 인생을 살아왔지 않나 하는 자성의 시간을 갖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이 자성을 요구하는 개똥이야기는 앞으로도 나에게 그 개똥을 계속 처먹고 살것인지 끊임없이 물어볼 것이다.

침묵과 개똥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책장을 덮으며 새로운 물음이 내 몸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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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풍차
시드니 셀던 지음 / 청목(청목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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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이 거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드니 셀던에게 있어 지구는 부처님 손바닥 안인가 보다. 물론 미국이라는 국적을 지닌 사랑에게 있어 세상은 세계경찰인 자신의 나라가 지키고 있는 하나의 마을일뿐일련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은 인간 대 인간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루마니아의 새 대사로 촌 구석의 여교수를 임명한다. 여교수는 처음엔 가족들 때문에 고사했지만 뜻하지 않은 남편의 사고사로 대사직을 응낙한다. 루마니아로 떠난 새 대사는 아무추어적 신선한 바람으로 새로운 변혁을 조금씩 이루어낸다.

한편 미국의 새 프로젝트는 좌, 우 이데올로기의 유지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는 부류에게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물인 루마니아 대사를 암살하려 한다. 하지만 전문 킬러는 이 일에 실패하고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바로 아깝게 대통령직에 오르지 못했던 대통령의 친구임이 밝혀진다.

이 소설은 전문 킬러가 누구일까? 루마니아 대사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해 흥미를 자아낸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소설을 읽어가는데 있어 조금 부담스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루마니아 대사의 인간 대 인간 프로젝트라는 것이 자본주의를 지탱해주는 기본 법칙 중 하나인 교환의 법칙을 토대로 하고 있음에 과연 교환이라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가?라는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동서를 넘어서 하나의 인간세계로 나가자는 데 있어 그 기본은 바로 무역에 있으며 이 무역이 그들간의 전쟁을 예방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이 물질의 노예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본주의적 물물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평화는 없다라는 생각은 왠지 자신들이 생활하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자신감을 넘어 오만으로 느껴지기도 하다.

반면 이 소설의 장점 중의 하나는 조직과 개인에 있어 개인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 루마니아 대사직을 수행케 하기 위해 그 남편을 사고사로 위장시키는 부분에 있어서는 소름이 돋는다. 주변의 사고라는 것도 어찌보면 위장된 우연일뿐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한 갓 인형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또 기득권의 세력 집단을 구성하던 구성원들이 사라진다 해도 또 다시 그 집단은 새로운 구성원을 만들어간다는 암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그 벽을 깨뜨리려 해도 그것을 허물어뜨릴 수 없는 두꺼운 벽인지를 실감케 한다. 아무튼 세계를 배경으로 호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이 추리물은 미국적 색채를 조금 벗겨내고 읽는다면 흠뻑 빠질만한 재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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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얼굴 - 시드니셀던시리즈 8
시드니 셀던 지음 / 청목(청목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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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의 매력은 독자가 그 범인을 알아챌 수 있는 충분한 힌트를 주지만 결코 쉽게 그것을 알아내지 못했을 때 갖게되는 흥분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범인이 쉽게 드러나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리송하지도 않은 정도로 그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을 때 추리소설은 그 빛을 발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힌트주기와 딴청피우기라고 표현하고 싶다.

적절한 힌트를 줌으로써 범인을 추적하게 만들다가도 갑자기 딴청을 피움으로써 확신이 가던 범인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추리소설이 지녀야 할 미덕인 것이다. 만약 어느 한 쪽이 더 강하게 소설 속에 드러난다면 그 소설은 매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시드니 셀던의 <벌거벗은 얼굴>은 그런 점에서 조금은 추리소설로서의 빛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힌트주기가 딴청피우기보다 과다해 쉽게 범인을 짐작케 하고 게다가 그 결말까지 일사천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읽는 재미를 떨어뜨리게 만든다. 또한 딴청피우기란 정말로 엄격한 계산하에 이루어져 그 딴청에 독자가 놀아나도록 해야하는 엄밀함이 필요한 것인데 이번 소설 속에선 그 딴청을 딴청으로 쉽게 받아들임으로써 긴장의 강도가 떨어지고 말았다.

즉 범인은 바로 환자와 관계된 가족일 수 있다는 힌트는 금새 누구의 가족인지 알게 만들어버리기에 딴청은 도저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이 자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을 걸 하며 딴청피우는 것은 도리어 딴청피우고 있군 하며 바로 이 놈이 범인이야 하고 가르쳐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책을 읽게 만든건 아마도 주인공과 환자 앤과의 로맨스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기대는 그냥 기대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책을 놓지 못하는 것, 아마도 그게 바로 시드니 셀던이 가지고 있는 글쓰기의 힘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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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 속의 뼈 -상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대산출판사(대산미디어)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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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는 많이 봤지만 그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영화에 익숙하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영상이 떠올랐다. 아~ 이건 이렇게 표현이 되겠군 하며 그의 묘사 실력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이야기는 처음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전혀 연관이 없을 듯한 이야기들이 하나 둘 씩 얽혀들고 또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면서 그 결말을 향해가는 과정이 정말 숨막히게 전개된다. 초반부 조금은 지루한 듯 펼쳐지던 주인공의 심리상태는 초현실적 존재와 부딪히면서 점차 그 긴장의 강도를 더해간다.

소설은 미국의 역사 초창기 시절 흑인에 대한 차별대우와 한 마을사람들간의 유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유대라는 것은 유대라는 단어가 감추고 있는 배타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 울타리를 가지고 있으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비밀을 갖게 되고 그 것을 침해하는 모든 것들을 배격하기 마련아니겠는가?

실은 사회라는 것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이런 울타리 사이사이마다 수많은 문들을 만들어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런 문이 없이 모든 걸 삼켜버릴 때 비극은 탄생하게 되고 그 비극은 복수로 화하여 울타리의식에 치명적 상처를 입히게 된 것이 바로 소설 속 사라가 아닐까?

복수나 사랑이나 인간의 감정이란 때론 워낙 강렬해서 그 삶의 길을 어디로 흘러들어가게 할련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바로 운명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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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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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모리교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이자 모리교수인 제자 미츠. 미츠는 어느 날 TV를 통해 모리교수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 뵙는다. 이 책은 이 둘의 만남과 강의를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한번쯤 뒤돌아보게 만드는 이책은 한마디로 마음의 문을 열고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런 그의 삶의 아포리즘은 다음과 같은 옛 강의 내용에서 강렬하게 전달된다.

눈을 감고 자신의 짝을 믿으며 뒤로 넘어지는 행위. 대부분의 학생은 쉽게 뒤로 넘어가지 못한다. 눈을 뜨고 주춤거리며 뒤로 넘어가려다 돌아서버리거나 엉거주춤 발로 버틴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지긋이 눈은 감은 상태에서 그대로 뒤로 넘어지고 그녀의 짝은 그녀가 땅에 부딪히기 전에 머리를 잡아 일으켜 준다. 모리 교수는 바로 이 순간이 삶의 진실된 순간임을 강의한다. 남을 온전히 믿고 그에게 의존할 수 있는 삶.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이 되고 사랑이 될 수 있는 삶. 돈과 명예, 권력을 쫓는 행위에선 절대 만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언제나 혼자일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리 교수의 가르침 또한 헛된 메아리가 될 공산이 크다. 절대적 자아만을 가르쳐 온 현대의 교육. 즉 자아의 정체성이란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관계속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세뇌되어 버린 현대인들에게 남을 온전히 믿는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미 현대인들은 관계라는 루비콘 강을 건너버리고 독립된 개체의 땅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땅으로부터의 탈출은 사랑에 의해서 가능하겠지만 어디 그런 사랑도 쉬운 세상이던가?

타인의 존재, 그리고 나의 존재라는 것이 아니 모든 만물이 서로 관계의 그물망속에 얽혀 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리고 사랑만이 그들을 온전히 하나되게 할 수 있다고 말해줘도 그것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세상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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