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 하버드대 종신교수 석지영의 예술.인생.법
석지영 지음, 송연수 옮김 / 북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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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살 이민. 세상을 이어주던 끈인 언어를 잃자 혼란에 빠졌다. 0퍼센트의 이해도에서 시작하여 극도의 고생 끝에 상황을 장악하는 지난하고 아픈 과정은 배움과 인생에 있어서 나의 고통스런 모델이 된 것 같다. 35쪽

 

 

조언을 반길 준비가 된 학생에게, 특별한 스승이 적절한 시기에 선사하는 격려의 힘은 매우 강력할 수 있다. 거의 하룻밤 사이에 나는 수업에 신경을 쓰고 도서관에서 예습을 하는 학생으로 변했다.  141쪽

 

스스로에 대한 통찰을 손에 넣기란 어렵다. 하지만 일단 손에 넣으면 그 참혹한 모습에 차마 실체를 바라볼 수조차 없다 이러한 투쟁은 평생 동안 지속된다. 우리가 모든 것을 파악했다고 믿는 바로 그때, 그제서야 우리가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흔하다.

학부과정이 끝나갈 무렵, 나는 십대 시절의 내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분노와 슬픔을 여러 해 동안 모른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껍데기가 아닌 나 자신처럼 느끼게 했던 소중한 발레 공부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빼앗겼으면서도 그로 인한 분노와 슬픔과 대면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아픔도 풀지 못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나는 겁을 먹은 채,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을 꺼리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을 건다는 것도,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너무나 두려웠다. 탁월함을 추구하고 그에 걸맞는 높은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런 시도를 했다가 힘없이 빼앗기고 말았던 발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적당히 일하고 너무 마음을 쏟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러한 벽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알기는 힘들다. 하지만 나의 경우, 끝까지 돕겠다는 의지로 나를 세게 밀어붙인 스승들이 있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사족 없이, 그저 넌 할 수 있어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나에게 건넸던 선생님들이었다. 143~144쪽

 

글쓰기는 배움의 한 방법이지, 학습을 마친 마지막 단계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글을 쓰겠다는 시도는 감히 모든 것을 안다는 주장이 아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번에 조금씩 배운다는 불완전한 과정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173쪽

 

법대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다. 정보는 학생들이 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우리 법대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고의 방법이다.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본원칙들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게 만드는 논리적 사고의 습관이다. 233쪽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이 또한 연습이 필요하다. 쉬워질 때까지, 아니 즐길 수 있을때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여 하고 또 하고 반복해야 한다.

 

내 이야기에서 뭔가 전해진 것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성장이 요구하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내 생의 여정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은 점차 커졌던 자유였다. 즉, 생각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놀 자유. 완벽하려고 애쓰는 이가 자유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프기만 할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발전시키는 단련은 매우 보람차다. 하지만 완벽해서가 아니다. 나는 완벽할 수 없다. 내 아이들에게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일하며 삶을 건사하고 삶을 건사하며 일을 한다. 일과 놀이는 같이 간다. 일이 가끔 놀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나는 내 일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은 상상하기가 매우 힘들다. .. 우리는 생활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생활한다. 여기에 공식은 없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의 추구와 기쁨과 고통과 실망이 함께 어우러지는 일상적인 삶이 있을뿐. 그것은 무척 불완전하다. 우리는 다음날 일어나 다시 생활을 시작한다. .... 그 누구도, 남성도 여성도, 모든것을 가질 수는 없다.   254쪽

 

어떤 길을 가든지, 갈등과 실패는 세상의 끝이 아니다. 갈등과 실패의 공포가 슬며시 찾아들 때도 기꺼이 모험하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무엇에 실패한다고 해도, 도망가지는 말자.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록 너무 힘들다면, 한 발짝 살짝 내딛어 보고, 또 한 발짝 내밀어라.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타인의 기대를 거스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두려움이나 수치심에 휘둘리게 된다면 성공은 불가능하다. 263쪽

 

나는 즐기고자 한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는 것을 열망한다. 일을 놀이로 만들고자 한다. 가능한 한 자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으려고 한다. 스스로를 농담거리고 삼고자 한다. 재미는 전염되는 것. 재미만 있다면 아무리 힘든 일도 할 만하다. 재미 없이는 난 살 수 없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물어보라. 너무나 재미있어 내 능력껏 시도해 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가능하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추진하라.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하라.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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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프로그램이 TV의 대세가 된지 몇년이 흘렀다. 슬슬 이 프로그램들의 승패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특히 <K팝 스타>와 <위대한 탄생>은 개인적으로 그 선호도가 극명해졌다. 물론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시간대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프로그램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이미지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위대한 탄생>을 보고 있자면 잠이 슬슬 몰려온다. 참고 볼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래서 리모컨으로 전원 스위치를 누르고 잠을 청한다. 반면 <K팝 스타>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하다가도 TV앞으로 가게 된다. 너무 재미있어서다. 물론 이 둘에 대한 선호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호불호의 엇갈림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절박함이 꼭 최고인 것은 아니다

<위대한 탄생>을 보면 그 첫 시즌부터 마치 영웅담을 대하는 느낌이 든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잃지않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은 감동을 준다. 성공한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절박함'이 묻어나 있는 것이다. 절박하지 않고서는 즉,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정신으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충고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노래를 대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주먹을 쥐고 의지를 단단히 하는 결연한 자세를 떠올린다. 그래서 감동을 전해주지만, 가끔은 너무 부담스럽기도 하다. TV가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그런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절박한데 TV속 인물들까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니 더 힘이 든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성공하는 모습을 통해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꿈속이나 몽상 속에 빠져보고 싶기도 하는 것이다. 지치고 힘든 현실을 잊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탄생>은 시즌이 진행될수록 그 진중함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작용하는 듯하다.

 

순수함으로 돌아가고 싶다

<K팝 스타>를 보는 것은 흥겹다.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어린 나이라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한 것같다. 어리기 때문에 진중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절박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겐 좌절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젊음이 있다. 그래서인지 절박함보다는 흥겨움이 묻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흥겨움이 TV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손을 쫙 펴고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듯 훨훨 가벼운 마음으로 쳐다보게 만든다. 더군다나 이들의 노래는 꾸밈이 별로 없다. 원석을 보는듯하다. 솔직히 청자의 입장에서 정말 노래를 잘하는 것인지를 판별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이들의 노래에 귀가 쏠리는 것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래를 즐기는 것만큼 보는 이도 즐겁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떤 절박함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절박함이 진저리치도록 물리고 싶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부박할 순 없다. 절박하되 절박하지 않게, 즉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것으로 절박함을 잊는 마음이 필요해 보인다. '난 절박해'라고 외치며 입을 앙다물고 주먹을 꽉 쥐기보다는, 손을 쫙 펴고 춤추고 웃는 가벼움이 마음을 끈다. 절박함이 웃음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가끔은 꽉 쥔 주먹을 펴고 살고싶다. 보는 바위를 이기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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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그겨울 바람이 분다>는 타인의 행세를 하는 동명이인 오수(조인성)가 주인공이다.라고 말하기엔 오영(송혜교)의 역할이 크다. 당연히 오수와 오영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를 이끄는 이야기의 핵심은 오수의 사기적 행위다. 그런데 이 사기가 가능했던 것은 오영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감히 믿는 것과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오영은 오수에게 "너를 믿어도 돼?"냐고 묻고 오수는 "나 믿어도 돼"라고 답한다. 이 순간 둘은 진짜 오누이가 된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고들 한다.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고 그래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현실은 아느 만큼 보이기 마련이고 믿는대로 보이기도 한다. 오영이 가짜 오수를 믿는 순간 그녀는 진짜 오수를 보게 된 것이다. 가짜가 진짜로 되는 순간이다. 믿음은 이토록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들은 대부분 깨지고 만다. 믿는대로 보이기 마련인만큼 어느 순간 진실이 다가올 때 그 믿음의 장막이 걷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이 깨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믿음으로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은 바로 그 대상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의 또다른 표현이다. 필요할 때 항상 옆에 두고 싶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믿음이 깨지면 한없이 슬퍼지게 된다. 세상이 무너진듯 말이다. 기대고 의지할 버팀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을 놓아버리는 게 나을까. 절대 깨지지 않을 믿음이라는 단호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나을까. 한번쯤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렇게 기대고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이었던가를. 그래서 홀로 서고 싶어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하는 것이다. 다만 믿음 대신 공감의 능력만을 남겨둔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리라. 홀로 있되 함께 하는 그런 삶이 가능할지 모르니까. 그런 '믿음'으로 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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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공부하는 인간>을 방영중이다. 그런데 방송에서 말하고 있는 공부라는 것이 조금 요상하다. 공부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또 학문이란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힘. 또는 그런 지식'이다. 즉 공부란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그런데 방송이 다루고 있는 것은 기술은 빠져 있다. 또한 익힌다는 부분, 그 중에서도 특히 몸을 통해 익히는 것도 제외되어 있다. 공부란 모름지기 문자를 통해 암기하고 토론하는 것으로만 비쳐진다. 그래서 당연히 문자가 갖는 속성이 바로 공부를 하는 이유로 변질되어 버린다.

 

2. 문자란 정보와 관련되어 있다. 현대 이전에는 문자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었다. 특히 성경과 같이 종교적인 메시지를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정보를 제한하고 이것을 이용한다는 것은 곧 힘이었다. 공부란 곧 권력의 획득인 것이다. 2011년 방영됐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과 정기준이 맞섰던 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한글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문자를 접하고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면 사대부가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문자와 관련된 공부는 결국 힘에 대한 동경으로 표출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남들보다 위에 서기 위해 공부를 한다. 강남 대치동을 다니는 학생들의 인터뷰는 가히 충격을 넘어 경악이라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공부를 잘 하지 못하면 왕따당할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니 말이다.

 

3. 힘이란 개인을 위해 사용되면 독재가 되지만 남을 위해 사용한다면 호혜가 될 수 있다. 공부를 통한 힘의 획득은 가난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인도에서는 계급적 차별을 뛰어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식을 이용해 타인에게 유용한 일도 가능하다. 중국의 아이들처럼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한국의 아이들은 안정된 직장을 갖기 위해 공부를 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직원이나 고위 공무원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럴싸한 가정을 꾸리고 무난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마저 갖게 만든다. 반면 유대인들은 신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공부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달라보이지만 결국 힘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닮아 있다.

 

4. 공부란 이런 것일까. 역사와 지역을 떠나 소위 상위계층에 대한 욕망이 공부를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냐는 소리다. TV 다큐멘터리 속 '공부하는 인간'은 이렇게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바라보는 하버드대학생들만이 이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모양새다. 그들은 세계의 다양한 아이들이 이렇게 공부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니까. 놀랐다는 것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정녕 힘에 대한 동경이나 욕망이 이끄는 것이 아닌 다른 공부란 없는 것일까. 바로 앎에 대한 호기심말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이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그래서 삶을 알아가는 것. 앎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향한 공부 말이다. 그것은 꼭 문자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다르게 '공부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몹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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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여비 2013-03-1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초등학교 2학년을 둔 학부모이자 일상과이상 출판사 대표입니다. 요새 이 방송을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해 성공만을 위해 공부하는 우리날가 학생들 모습이 슬프게 다가오는데요. 방송 출연자 릴리 마골린의 아버지인 힐 마골린 씨가 유대인의 공부법을 다룬 책을 냈습니다. 제목은 <공부하는 유대인>입니다.
 

꿈을 꾸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한다. 혹시 그 과정에서 좌절과 상처를 겪을지라도 굴하지 말고 전진하라고 한다. 그러면 꼭 꿈은 이루어진다고. 해피엔딩을 맞이할거라고. 미디어 속 멘토들은 그렇게 꿈을 건네준다. 그런데 정말 꿈은 인생의 묘약일까.

 

MBC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 성룡이 나왔다. 그의 진실된 모습과 꾸밈없는 유머, 겸손이 TV를 보는 내내 봄바람을 맞은 것처럼 온몸을 따듯하게 감싸왔다. 자신의 이름이 영화의 한 장르가 되어버린 사나이. 조 단위의 자산가. 또한 한없이 베푸는 자선가. 성룡은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사람이다. 어릴 적 굶기를 밥먹듯 했기에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던 영화촬영장이 좋았다는 그. 과연 그는 이런 고난 속에서 지금과 같은 성공을 꿈꾸었을까. 그 꿈이 그를 이 길로 이끌고 왔을까. 아니다. 성룡은 말한다. 자신은 꿈이 없었다고. 뭐, 꿈이 없었다고? 이게 말이되나. 그렇다면 도대체 꿈을 꾸어야 성공할 것이라고 말하는듯한 우리 시대의 슬로건은 뭐란 말인가.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그의 책 '몸과 인문학'에서 꿈은 병이라고 말한다. 청춘들에게 꿈을 꾸라는 것은 우주의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막 언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을에게 가을의 열매를 강요하는 격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꿈의 내용을 한번 들여다보자. 돈과 권력, 인기 같은 세속적 성공에 있지 않던가. 그래서 그는 가차없이 말하는 것이다. 꿈은 생명의 활동이 아니라 자본의 명령이라고.

그럼 어떻게 살란 말인가. 고미숙은 무엇이든 '되고싶음' 그 자체가 청춘이라고 한다. 꿈은 주변의 모든 것을 수단화하기에 괴로운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나무의 목표가 열매가 아니듯, 나무가 잘 살다보니 열매가 달렸듯, 그렇게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살다 보니 어떤 성취를 이루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냐고? 보지 않았는가. 성룡이 해낸 일을.

 

성룡은 이제서야 꿈을 꾸고 있다고 한다. 청춘의 열정이 꺼져가는 환갑의 나이에 꿈이라니. 그런데 그 꿈이라는게 이거다. "세계 평화" 뭐라고? 세계 평화? 수퍼맨같은 만화 속 주인공들이나 몸을 바쳐 이루고싶어하는 그 세계 평화가 꿈이라는 것인가. 그렇다. 그의 꿈은 세계 평화란다. 세계를 돌아다보니 세상이 얼마나 많은 전쟁과 싸움 속에 있는지 지켜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꿈이라면 이런 꿈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성공을 향한 청춘들의 꿈은 자신을 죽이는 독이 될 수 있지만, 남을 살리고 싶어하는 발원으로 이루어진 꿈은 세상을 치유하는 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꿈이라면 한번쯤 꿀만하지 않을까. 무릎팍 도사가 거듭 강조하듯 성룡은 진정한 '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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