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에 대한 생각 - 세계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우리의 식탁은 왜 갈수록 가난해지는가
비 윌슨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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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잘못 먹어도 죽는다. 그래서 인류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무엇을 먹을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수렵, 채집 시절엔 독성의 여부가 중요했을 것이다. 먹어보고 체득한 것들이 유전적, 문화적으로 이어지는 시대로 보인다. 다양하게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중 건강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맛있다'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지않다면 우리는 먹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어 농경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때 그때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곡물 덕분에 잉여와 보관이 가능한 시대였다. 그 덕분에 인구도 증가했고, 남는 인력으로 문명이 발전하게됐다. 하지만 먹는 종류는 단조로워졌고, 이로 인해 건강은 위협을 받았다. 한두가지 작물에 치중함으로써 환경변화에 취약해지기도 했다.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한 생산력 향상이 필요한 시기였다. 녹색혁명이 문제를 풀었다. 음식의 방점은 양이었다. 모두가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양이 목표였다. 기술적 문제는 해결됐지만, 정치적 문제는 기아를 해결하지 못했다. 


값싼 가공식품의 시대가 도래했다. 가난하더라도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먹을 것을 구하는게 쉬워졌다. 또한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시간을 빼앗아, 최소한의 식사 시간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일하면서 먹든가, 재빨리 먹고 잠깐 쉬든가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은 패스트푸드를 찾았다. 또한 패스트푸드는 문명의 상징이 되어, 개발도상국들의 국민들에겐 현대인이라는 이미지를 먹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음식의 변화는 영양의 전이를 가져왔다. 비만과 성인병, 각종 대사성질환이 전 세계에 퍼져 있다. 건강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책 <식사에 대한 생각>은 13가지 식사전략을 주장한다. 적게 먹고, 간식 대신 식사에 집중하고, 물이 아닌 것을 물처럼 마시지 말고, 다양하게 천천히 먹고, 요리를 배우고,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등이다. 한마디로 장금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진짜 음식의 맛을 음미하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식사에 대한 생각]은 이런 음식에 대한 접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제도적 문제라고 본다. 사회 구성원 개인 각자가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레스토랑의 접시를 작은 것으로 바꾸고, 신선한 식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가게가 걸어서 갈 수 있을만큼 집 근처에 위치하도록 하는 등등. 물론 이런 변화는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다. 내가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 말이다. 


장금이의 말을 떠올려본다. 
"저는, 제 입에서는,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우리는 홍시맛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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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날씨가 매섭다. 찬 공기 때문인지 미세먼지가 없는 날엔 일출이 멋드러진다. 잠깐 하늘을 쳐다보다 개밥을 챙겨주고, 개똥을 치우려했다. 


하지만 흠칫!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털복숭이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살펴보니 꼼짝을 않는다. 죽은척 하는건가? 계속해서 요지부동인 것이 아무래도 죽은 듯하다. 자세히 보니 너구리처럼 보인다. 


요 몇일 전 백구가 집 옆 복숭아밭을 쳐다보며 '컹컹' 짖어댔다. 뭐가 있나 살펴봤지만 눈에 뜨이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슬금슬금 움직이다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도망치는 것이 아닌가. 너구리였다. 설마 지금 눈앞에 죽은 너구리가 그때 봤던 너구리일까. 그런데 왜 여기서 이렇게 죽음을 맞이했지?


딸내미에게 너구리가 죽어있다고 하니 잠이 덜 깬 눈을 한 채 쏜살같이 달려온다. 어라? 무섭다거나 징그럽다며 도망칠 줄 알았더니.... 반대로 너구리가 궁금하다며 다가갔다. 웅크러져 있는 너구리를 뒤집어달랜다. 얼굴과 배 쪽도 보고싶단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아무튼 이래저래 죽은 너구리를 살펴보다 왜 너구리가 이곳에 죽어있는지 의문이 갔다. 딸내미 또한 이렇게 저렇게 추측을 해본다. 



어디에선가 독극물을 먹고 나서 죽었을까. 딸내미가 입에 거품자국이 없다며 아닐 것 같단다. 그렇다고 하필 여기서 얼어죽었을리는 없고...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것은 작은 개가 너구리를 물어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것. 초코라고 부르는 이놈은 올 여름엔 뱀을 물어뜯어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너구리가 죽은 위치는 초코가 묶여 있는 곳에서는 닿지 않는 거리다. 혹시나 초코에게 물린 후 경사진 곳으로 굴러떨어졌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면 너구리는 묶여있는 개조차 피하지 못할 정도로 무뎠다는 것인데... 


알쏭달쏭 미스터리다. 게다가 죽은 너구리를 보고도 신기해하는 딸내미도 미스터리?^^ 하기야 동물을 좋아해서 동물 박제 박물관도 좋아했으니, 겁낼 이유는 없어보인다. 어쨋든 비명횡사한 너구리의 명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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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일 맑음 영하 6도~5도


개밥그릇에 담겨 있는 물이 아침이면 꽁꽁 얼어있다. 벌써 겨울 추위가 매섭다. 어슬렁어슬렁 늑장을 부리다보니 12월이 코앞이다. 



집 주위를 둘러보며 본격적으로 겨울에 들어서기 전에 갈무리해야 할 것들을 살펴봤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감국이었다. 허리춤 이상으로 길게 자란 것들이 꽃이 지고 나니 다소 어지럽고 지저분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리도 할겸 내년에 건강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밑둥까지 잘라내는 작업을 했다. 



감국을 다 쳐내니 진입로가 훤해졌다. 잘려진 가지는 블루베리밭 사면에 두었다. 삭아서 퇴비가 되면서 풀이 자라는 것을 막아주기를 기대한다. 



잘려진 밑둥을 보니 새로 싹을 내서 꽃이 핀 것들이 보인다. 이번주 추위가 찾아오기 전까지 따듯했던 기후 영향인 듯하다. 


감국처럼 보다 건강하게 잘 살아가기 위해 기존의 줄기를 싹~둑 잘라내야 할 때가 있다. 아마도 코로나19가 가져오는 삶의 변화는 이같은 <싹둑>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는 뭇생명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삶,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아닌 균형을 갖춘 삶으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요구는 개개인의 삶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생명과의 조화, 균형잡힌 삶이라는 가치에 공감을 한다면, 지금까지의 내 삶의 태도를 <싹뚝> 자를 각오를 해야하지 않을까. 잘려진 감국은 내년 샛노란 꽃을 더욱 화사하게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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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뉴스로 가끔씩 접하는 보복운전은 재수없는 사람들이 겪는 황당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음 속에 분노로 가득찬 운전자가 시한폭탄과 같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영화 [언힌지드]는 짜증스런 경적 소리가 어떻게 자신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의 목숨을 위협하는지를 짜릿하게 보여준다. 안전운전은 기본, 방어운전은 필수! 그리고 이젠 양보운전을 장착하라~


2. 레이첼은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키려 차에 올랐지만, 고속도로는 꽉꽉 막혔다. 그런데 이게 한두번이 아니다. 엄마는 아이의 지각을 교통정체 탓으로 돌리지만, 아들은 엄마가 늦잠을 잤기 때문이라 여긴다. 꽉 막힌 도로를 감안해 일찍 서두를 생각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첼의 지각은 습관화된 듯하다. 미용사로서 고객과의 약속에서도,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만남에서도 늦는 일이 잦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가 지각을 할 판, 게다가 앞차가 신호등이 바뀌었는데도 꼼짝을 하지 않는다. 짜증섞인 경적을 울리며 추월한다. 그런데 이 차가 자신의 차를 쫓아와 정중하게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주의를 주는 경적이 아니라 짜증을 내는 경적이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레이첼은 사과를 거부한다. 픽업트럭의 운전자(러셀 크로우)는 "힘든 하루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협박한다. 그리고 그 협박은 말로 그치지 않고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서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3. 보복운전을 소재로 했지만,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분노로 가득찬 세상이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직의 두려움, 이혼이나 상실의 아픔을 언제 맞이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다. 이런 불안감 속에서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는듯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 신경이 닳고 닳는 순간 화가 언제 터져나올지는 알 수 없다. 


4. 영화의 제목 [언힌지드]는 경첩이 빠진 문의 상태를 말한다.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문짝이란 얼마나 불안정한가. 현대인이 겪고 있는 삶이란 경첩빠진 문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첩>이다. 문을 꽉 잡아줄 <경첩> 말이다. 그 경첩은 실직을 해도 재기할 수 있는 기반, 가족과 친구를 잃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관계, 여러번의 스타트업 도전이 가능할 정도의 지원 등등 소위 말하는 삶을 견고하게 해줄 수 있는 복지정책이 될 수 있겠다.

안정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양보는 저절로 생기지 않을까. 도로위의 보복은 자신이 손해봤다거나,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했다는 피해망상에서 비롯되었을 테니 말이다. 자신이 조금 손해를 봐도, 피해를 입어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보복심리는 조금도 꿈틀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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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당해 보이는 설정과 어처구니없는 사건들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켤코 현실과 동떨어져있지는 않다. 결말의 궁금증이 영화를 끝까지 지켜보게 만들고, 주인공들의 행위가 메타포가 되어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2. 두 주인공은 오전엔 트럭으로 행상을 하지만, 오후에는 폭력조직의 뒷일을 처리해주는 사체처리일을 하고 있다. 어느날 자신들에게 일을 맡기던 폭력조직의 상무가 아이를 맡아달라고 한 후, 조직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어이없게 유괴사건에 말려들게 된다. 


3. "주어진 일에 감사하라" 창복 역을 맡은 유재명이 태인(유아인 분)에게 하는 말이다. 코로나19로 수많은 일들이 사라져버린 지금의 시기에 절묘하게 들어맞는 말로 보인다. 하지만 창복이 태인에게 건네 말인 즉슨 조직폭력배가 죽인 시체를 처리하는 일에 '근면 성실'하게 임하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영화 <소리도 없이>의 두 주인공의 직업과 일에 대한 사명감이 <분업>에 대한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사체처리라는 일 이외에도 어쩔수 없이 휘말리게 된 유괴사건도 아이를 돌보는 자, 부모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자, 흥정을 하는 자, 돈을 찾는 자가 따로 따로 있다.  


인간은 수렵 채집 생활 때부터 분업을 해 왔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사냥에 나서고 여자는 아이를 돌보며 수렵을 주로 담당해 왔으니 말이다. 이 분업의 양상은 점점 잘게 쪼개어지더니 현대 자본주의에 들어와서는 최종 생산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분화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최종적으로 어떤 목적에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즉 영화 <소리도 없이>처럼 -물론 이렇게 노골적으로 못된 일임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될 가능성을 언제든 품게 된 것이다.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의 생산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자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런 자각이 없으면 소리도 없이 우리는 타인의 목을 조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4. 유괴된 11세 소녀 초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부모가 몸값을 흥정한 탓이다. 초희의 부모는 3대 장손인 남동생이 집에 있기 때문에 초희가 집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초희의 부모는 몸값을 흥정해 낮출 수 있는데까지 낮추고자 한 것이다. 


사람이 거래의 대상이 된 것은 오래다. 노예라는 제도는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존재했다. 아니, 문명의 발전은 노예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인간은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왔고, 조금씩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듯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사람이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단화가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그에 맞추어 몸값이 책정된다. 수단으로서의 인간에 맞추어 몸값이 정해지는 것이다. 마치 초희의 몸값이 흥정의 대상이 된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흥정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평등은 찾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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