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장생의 약을 찾기 위해 떠난 서복처럼 영화의 의도는 결국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볼거리★★ 생각거리★ 마음거리


2. 시한부 인생인 전직 요원 민기헌(공유 분)은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복제인간 서복(박보검 분)을 옮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기헌이 서복과 함께 이동 중 급습을 받고, 둘은 살아남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3. 영화<서복>은 얼핏 기헌과 서복의 로드무비처럼 보인다. 도망다니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이 신기한 서복과, 오직 자신의 임무만을 빨리 완수하려는 기헌의 갈등이 소소한 재미를 준다. 기헌과 서복의 대화는 마땅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왜?라는 질문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 서복을 빼앗으려는 집단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기헌에게 "왜 당신을 따라가야하죠?"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죠?"라는 식의 질문은 우리가 마주하는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엄청난 에너지 낭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린 서복처럼 왜 그래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왜?라는 질문없이 살아가는 것은 프로그래밍된 로봇과 다르지 않아서다. 그 대답엔 과학적 이유가 아닌 가치가 숨겨져 있다. 


4. 사람이 영원한 삶을 꿈꾸는 것은 왜일까?(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 아마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즉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두려운 것이다. 죽음 이후 우리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있다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죽음을 알 수 있을까. 공자는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삶도 알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답한다. 즉 알수 없는 죽음을 알기 위해 애쓰기 보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현재에 충실하자는 의미일 터이다. 천상병 시인이 <귀천>에서 이 세상을 소풍왔다 가듯 생각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 그리고 욕망하는 것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하는 욕심의 발로가 불멸의 존재를 꿈꾸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의 충족은 끝이 없고, 욕망의 크기는 더욱 커지며, 결국 욕망을 좇는 그림자로 영원히 살아갈 수도 있다. 물론 불멸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에 불멸의 삶이 축복일지, 재앙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 불멸의 삶을 다룬 소설, 드라마, 영화들은 작품 속 주인공들이 죽음을 꿈꾸는 것으로 묘사한다. 특히나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내는 고통을 끝도 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에 치를 떤다. 그렇다면 모두가 영원한 삶을 누기게 된다면 이런 고통도 없을테니 괜찮을까. 문득 친구의 어머니께서 돌아기시 전에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사는게 지겹다"

영화 <서복>에서도 서복을 제거하려는 이유는 모두가 불멸의 삶을 살게된다면 재앙이라 여기기 때문인듯하다. 


5. 영화 <서복>은 영원한 삶이라는 소재와 함께, 인간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복제인간이나 유전자 조작 인간이 과연 인간일 것인지, 도구일 것인지 묻는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굉장히 많다. 그리고 대부분 답이 정해져 있다. 그들도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 그런데 우리는 장기 이식을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동물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동물은 그저 인간이 아니기에, 마치 우리가 고기를 먹듯, 생명체라기 보다는 수단과 도구로 여기는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반려동물로 애정을 쏟는 대상과, 고기를 제공하는 대상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 의도와 목적이 기준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것도 의도와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까. 영화 <서복>에서는 이런 질문을 넌지시 내뱉지만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를 수단으로 여길 때 그 존재의 분노가 우리를 집어삼킬 수 있음을 액션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영화 마지막 10여 분 간 서복의 분노가 터지는 액션은 공을 들인만큼의 특수효과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너무 낯익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낯익은 액션 만큼이나 우리 영화에 등장한 유전자 조작 및 복제 인간 '서복' 또한 신선하기 보다 낯익게 다가온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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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아이가 되는 것이다. 볼거리★★ 마음거리★생각거리


2.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의 이야기. 자신의 아파트에 나타난 여자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여자는 딸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몇일 후 다른 여자가 딸이라며 이것저것 챙겨준다. 도대체 이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내 재산을 훔쳐가려는 자들의 음모일까. 알츠하이머에 걸린 한 남자의 삶을 미스터리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재미가 솔솔.


3. 영화 <더 파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남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온통 뒤죽박죽 되어버린 그의 기억들로 말미암아 평온한 일상은 음모로 가득찬 세상이 되어버렸다. 기억을 잃어가는 그는 아직 기억을 쌓지않고 있는 아이와 같아진다. 그가 아이가 되어가는 모습이 짠하다.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는 그야말로 최고다. 


4.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나빌레라>에서도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나빌레라>는 비록 기억을 잃어간다 하더라도 차마 꿈꾸지조차 못했던 어릴적 동경을 실현하려는 할아버지의 분투를 통해, 지금 당신이 어떤 처지에 있다하더라도 한번쯤 날아오를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비록 기억을 잃을지언정 몸은 기억하리라. 


5.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한 이야기 중 단연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압권이라 생각한다. 김혜자 주연의 이 드라마는 마지막 부분에서 앞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김혜자가 만들어낸 상상이었음을 밝히는 반전으로 시청자들을 깜짝 놀래켰다. 더군다나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찬란한 시간인지를 깨닫도록 만드는 감동의 힘까지 지녔다. 


6. 영화 <더 파더>에서는 소품 중에 시계가 등장한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는 시계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다. <더 파더>에서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안소니의 상태를 시계에 대한 집착을 통해 보여준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을 잃어버린 것과 같을지 모른다. 


7. 기억을 잃은 사람에겐 지금까지 함께 해 온 모든 사람들이 처음 본 사람들로 둔갑하는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셈이다. 그렇기에 기억을 잃는 것은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기억을 잃은 이들에게 어깨를 내주고 품을 내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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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4월 20일 4도~25도 맑음



블루베리 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제 하루가 다르게 꽃들이 빠른 속도로 피어날 것이다. 블루베리 나무 주위를 돌다보니 벌 날개짓 소리가 들린다. 윙~윙~ 거리는 소리가 여간 반갑지 않다. 누군가에겐 공포를 자아내는 소리일 수 있겠지만 꿀벌 한두마리가 내는 작은 날개짓 소리는 달콤한 열매를 상상하게 만드는 음악과 같다. 



묵은 가지는 꽃눈과 잎눈의 구별이 쉬운데, 새로운 가지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떤게 꽃눈이고 잎눈인지 아직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꽃봉오리가 통통해질 때까지 꽃눈을 솎지 않고 있었다. 이제 꽃눈과 잎눈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꽃눈을 많이 단 키가 큰 새 가지는 꽃눈 2~3개를 포함해 성장점까지 한 번에 잘라주는 일을 했다. 위로만 크지 말고 옆으로 가지를 치라는 의미와 함께, 꽃눈도 솎아주는 것이다. 


지난해까지는 이런 상태로 마르지않도록 물만 꾸준히 주었는데, 올해는 꽃눈에서 열매를 맺기까지 필요한 양분을 추가로 공급할 계획이다. 유기물이 풍부한 토탄이나 균배양체 중 구할 수 있는 것 하나를 선택해 조금씩 줄 생각이다. 사람이 열매를 취해가는 것만큼, 나무에게도 돌려주어야 하는게 마땅한 것일테니 말이다. 이렇게 양분을 추가로 공급할 경우 성장이나 열매의 당도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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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4월 19일 1도~21도 맑음



올해는 풀 깎는 일을 일찍 시작했다. 예전처럼 길게 자라게 놔두었다 자르지 않고 틈나는 대로 낫질하는 방식으로 바꿔보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풀을 뽑거나 자르면서 애를 먹었던 것 중에 하나는 가시가 달린 것들이다. 자칫 무심코 손으로 잡아채다가 긁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환삼덩굴같은 경우엔 긁히는 수준을 넘어 베이기도 한다. 그렇게 풀에 베인 경우엔 얼마나 따가운지.... 


올해는 가시가 달린 것들을 더 크기 전에 재빨리 없앨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인이 가시 달린 것 중 하나를 보며 멍석딸기라고 알려준다. 흔히들 말하는 산딸기와 비슷한 종류인데, 멍석을 깔아놓고 털어서 수확할만큼 열매가 많이 달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열매도 제법 크고 맛도 달다고 한다. 그래서 멍석딸기는 복분자가 자라는 곳 근처에 옮겨심기로 했다. 일종의 딸기밭^^



옮겨심어서 잘 살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죽는 경우도 많다. 생명력이 강한 풀이라고 해도 한 번 옮겨 심으면 그만큼 몸살을 겪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구근의 경우 잘 살아남지만, 나무는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뿌리를 내리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보통 활착이라고 하는데, 그 땅에 뿌리를 내려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대략 1주일에서 2주일의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우리 인생은 어떨까. 우리에게도 활착하기까지 인내심을 갖고 버텨내야 한다. 우리에게도 몸살의 시간은 필요하다. 살아남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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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4월 18일 5도~16도 맑음



아이쿠야! 순간 깜짝 놀랐다. 혹시 뱀? 자세히 보니 지렁이다. 한뼘이 넘게 큰 지렁이가 나타난 것이다. 땅 속에 있지 않고 왜 밖으로 나왔는지... 


3년째 약이라고는 일체 쓰지않고, 풀을 키워 땅에다 되돌려 준 덕분인지 지렁이가 무척 많아졌다. 흙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지렁이가 늘어난 덕분인지 두더지가 이곳저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지렁이를 밥으로 삼는 아이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땅 속을 헤집고 다니니 공짜로 경운을 해주는 셈이다. 그렇지만 아직 어린 싹 주위로 다니면, 이 싹들이 몸살을 겪어 죽는 경우도 많다. 마냥 좋지도, 마냥 나쁘지도 않다. 


두더지가 많아졌다는 것은 머지않아 뱀도 자주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뱀에겐 두더지가 밥이니 말이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야 뱀이 나타나도 상관없겠지만, 잘못해서 독사에게라도 물리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리 겁을 먹고 근심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만,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어디 삵이라도 한 마리 키워야 할려나.^^; 주위에 가끔 돌아다니는 고양이가 있는데, 이 녀석이 활약해준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다. ^^ 


밭의 최상위 포식자가 누가 될련지. 자연의 흐름에 온전히 맡기지만, 가끔은 농부의 개입도 필요하다. 농부 또한 자연의 흐름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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