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엽문>은 실제 역사적 인물인 엽문에 대한 이야기다. 절권도 창시자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엽문의 영춘권 세계를 살짝 엿보게 되는 이 영화는 <황비홍><정무문><무인 곽원갑>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일개 개인으로서의 무인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에 쫓기어 또는 역사적 흐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반청 또는 반일을 위한 도구로서 무술을 사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란한 손동작을 자랑하는 영춘권의 멋에 빠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술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도 하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엽문이 자신이 무술만 수련한 헛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무술이 타인들 또는 국가를 위해서 쓰일 수 있게 됨으로써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 바로 생각의 시발점이 된다.  

무(武)란 그 뒤에 어떤 글자를 덧붙이느냐에 따라 상반된 이미지를 갖게 된다. 힘 력(力)자냐 큰 덕(德) 또는 길 도(道)냐에 따라 무는 우리에게 억압과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깨우침과 평안의 길이 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일본의 가라데는 무력이 되고, 영춘권은 무도 또는 무덕이 된다. 물론 무술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쓰는 사람이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또 이와는 아주 다른 길도 있다. 영화 <소오강호>에서 절대무공을 지닌 임영영(?)은 세상에서 벗어나 은거하고자 한다. 자신의 연인의 목끝에 드리워진 칼날 앞에서는 그 어떤 절대무공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세상과의 연을 끊은 것이다. 그러나 무림이 말하듯, 또는 세상살이가 이야기하듯 혼자만의 것은 결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것이 의미를 갖으려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드러나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임영영의 무 또한 결국 무도의 이미지로 세상에 모습을 내비치게 된다.  

무는 쌓아가는 것이다.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쌓아진 무가 정신적 성장까지 가져다 주었을 때 무는 뒤에 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도는 무뿐만이 아니라 우리네 삶에서 성장해 가는 모든 것들의 뒤에 붙어야만 할 숙제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결코 개인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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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다. 그럴 때에는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이 덜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통의 순간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은 "나보다 더욱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라"일 것이다. 즉 자신의 고통은 더 큰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비교를 통해서 안도하는 마음을 얻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의 관점으로 바라본 통증 완화 비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위치는 비교를 통해서만 찾아질 수 있다. 

반면 슈바이처의 관점은 그야말로 나눔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나의 고통은 나의 잘못때문이라는 자기 반성적 자세보다도 한발 더 나아가 이 고통이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는 마음가짐은 그야말로 범부의 태도를 뛰어넘는다. 그렇다고 마치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고 있다는 시혜의 자세인 것은 아니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나누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왔을 것이다. 날개없는 천사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세상이 힘들어질 떄면 슈바이처를 떠올릴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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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다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와 함께 각성의 의미도 갖는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눈이 머는 바이러스가 퍼지고, 이 와중에 인간이 집단 속에서 어떻게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지, 반대로 현재의 힘의 균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눈을 뜨게- 해준다. 그리고 다시 느닷없이 시력을 회복하면서 과연 살아남은 자들이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지, 암울한 미래로 떨어질지 관객 스스로 상상하게 만든다.  

힘의 균형이 깨져 나가는 것은 먼저 개인과 국가간의 관계에서부터다. 여기에서 힘이란 부와 권력보다 더 근원적인 물리적 힘, 즉 폭력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란 군대와 경찰과 같은 물리적 힘을 갖고 있는 대상이다. 그들은 눈이 먼자들을 격리 수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한다. 격리에 저항하는 자들은 군의 총에 의해 사살당한다.  

격리수용된 눈먼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의 문제다. 특히 먹을것에 대한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 과정에서 수용인구가 늘어나자 힘의 불균형이 생기게 된다. 한쪽 집단은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여자가 힘의 중심에 서게 되고, 다른 한쪽은 총을 든 남자가 힘을 발휘한다. 총은 곧바로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권력을 휘어잡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리고 이 총을 쥔, 즉 힘을 꿰찬 권력은 이 힘을 과용해 성상납과 패물과 같은 재산을 빼앗는다. 눈이 멀었다는 그 한가지 점만으로도 인간은 도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민주적 집단보다 총을 쥔 집단이 그들만의 세상에서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하지만 눈먼 총이라는 힘은 결국 그 눈멈 때문에 파멸에 이른다. 유일한 눈뜬 자에 의해 권력의 치우침은 깨지고, 그 와중에 격리수용을 담당했던 사회마저 무너져내린다. 이제 모든 세상이 눈 멀어 있는 셈이다. 그 속에서 과연 인간은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한 믿음만이 그 결과를 예측가능하도록 해 줄 것이다. 영화는 눈먼 자가 다시 눈을 뜨는 것을 통해 암울한 전개과정에서 한줄기 빛을 내비친다.  

그런데 정녕 우리는 눈을 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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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정말 호르몬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최근의 과학적 성과는 사랑의 유효기간을 겨우 2년 조금 넘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랑을 좌지우지하는 호르몬이 이 기간이 끝나면 멈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이별을 맛보기도 하고, 반대로 2년이 아니라 20년을 넘게도 사랑에 빠져 살기도 한다.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콩깍지가 씌여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콩깍지가 씌여 있는 기간만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어쩐지 과학이 밝혀낸 호르몬이라는 것은 현실과 더욱 거리가 있어 보인다. 때론 구체적이며 실체적인 어떤 작용보다는 감상적이며 추상적인 것이 보다 현실을 잘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영화 <쌍화점>이 인기다. 고려왕과 친위부대 건룡위 수장 홍림, 그리고 왕비라는 세 인물을 둘러싼 사랑과 갈등이 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이다. 세 명의 캐릭터는 나름대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만 개인적으로 주진모가 열연한 고려왕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홍림은 남자들만의 세상에 갇혀 살면서 오직 왕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여자(왕비)와의 몸섞임이 가져다 준 사랑의 열정에 휩싸이면서 나락으로 떨어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소원했던 왕비와의 관계가 대리합궁 한번만으로 사랑으로 발전해가는 장면은 어쩐지 과장돼 보인다. 왕비는 그나마 왕이 관계를 계속 거부해온 터에 홍림을 만나면서 사랑에 눈을 떴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고려왕의 갈등이 사랑의 진면목 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이 사랑했던 홍림을 믿고서 왕비와의 대리합궁을 주선했건만 그에게 돌아온 건 배신의 칼날이었다. 여기에서 사랑은 신뢰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신뢰의 문제는 진실과 거짓말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인다.  

왕은 홍림의 첫번째 거짓말에 충격을 받는다. 왕비를 만나러 간 걸 다 알면서도 그의 입에서 진실이 말해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에게 들려진건 거짓말이다. 홍림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홍림은 정말로 진심을 다해 왕에게로 돌아가려 했는지 모른다. 그 진심이 왕을 움직였다. 하지만 홍림은 그 진실을 진실되게 간직하지 못했다. 왕비 앞에서 진실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그는 거짓이라는 복수의 칼날을 꺼낸다. 왕이 자신을 불러들이기 위해 거짓 처사를 만든 것에 대한 분노였다. 왕은 마지막까지도 홍림의 진실된 말을 듣지 못한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어떤 칼끝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후벼팠을 것이다.  

사랑은 진실을 대들보로 삼아 나와 연인의 관계를 굳건하게 버티도록 만들어준다. 거짓은 대들보를 갉아먹는 벌레다. <쌍화점>은 홍림과 왕비의 사랑이 호르몬의 작용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왕과 홍림의 사랑 속에서 진실과 거짓말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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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1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농담으로 말하곤 하지만, 정말 신이 아무리 전지전능하더라도 60억에 육박하는 인간사를 모두 관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어디 우주가 지구뿐이던가. 그렇다면 신도 한 명이 아니라 각자 관장하는 영역이 존재하는 다수이진 않을까 의심해 볼 일이다. 물론 이 신에도 위계질서는 있어서 신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통과했을 때만이 자격이 주어질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두를 관장하는 대표신이 따로 있을지도.

베르나르의 이번 소설 <신>은 바로 이런 신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선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창조.파괴해 가면서 인간의 문명발전을 지켜보는 교육도 포함된다. 이 교육은 실습교재인 인간을 생명으로 바라보는냐, 아니냐에 따라 신으로의 승격과 도태가 갈리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발생한다. 신의 길로 가는 과정에서 실패한 실습은 행성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끔찍한 일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바로 이 부분에서 갈등의 골이 심화될 수도 있겠지만, 그저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고 신 연수생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마치 인간이 전쟁과 폭력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처럼 말이다.  

신이 되는 과정은 마치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신에 의해 조종되어지는 인간들 또한 우리 사회를 떠오르게 만든다. 즉 지구인의 모습과 신의 모습 모두를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쥐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영역과 위계에 집착하는 동물입니다. 영역과 위계, 이는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예요. 모든 인간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죠... 인간은 노예상태를 좋아하고 우두머리를 숭배합니다. 그리고 우두머리가 공포감을 많이 주면 줄수록 자기들이 더욱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죠. 312쪽 
 

쥐 실험에서 드러나는 위계란 착취자, 피착취자,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자,천덕꾸러기를 말한다. 어느 집단에나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이 위계질서는 인간사회에서도 통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다시 신 연수생들에게도 적용된다.  

공포감을 직시하고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할까. 벼룩이 자신의 점프 능력보다 낮은 유리천장에 부딪히면서 점프를 낮추어 자신의 능력이 본래 낮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 개개인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에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유리천장을 볼 수 있는 눈, 그것이 진정 신으로부터 독립되는 길이며,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이 신이 되는 길은 아닐까. 위계질서로부터 자유롭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능력은 내가 자꾸만 부딪히는 그 한계점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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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행복을 건설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불행을 줄이기 위해 애쓴다. 43쪽 

우리의 불안은 미래를 상상하는 우리의 능력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위험을 예감하게 되고,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에가스 모니스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는 길이다. 222쪽 

피터의 원리-
한 위계 조직에서 각 종업원은 자신의 무능력이 드러나는 단계까지 승진하는 경향이 있다. 이 원리는 1969년 미국의 교육학자 로렌스 J.피터가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는 기업이나 공공조직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무능화 현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위계 조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창시하고자 했다. ...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들이 전혀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지위까지 올라가려고 애쓴다. 262쪽 

협력. 지배, 중립- 

여러분의 씨족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다른 씨족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음의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남과 함께 남과 맞서서 남과 무관하게 305쪽 

먼저 힘을 키워야해요. 관대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다음이에요. 327쪽 

인간은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를 사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자식의 출생이나 자기 자신의 노화를 미리 내다보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죠. 앞으로 게임을 하면서 확인하게 되겠지만, 인간은 농사를 짓게 됨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며 살게 되고, 나아가서는 사후의 삶을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농업과 더불어 종교가 탄생하는 셈이죠. 366쪽 

원숭이 실험-바나나 매달린 천장. 사다리 올라가면 찬물. 다섯마리 원숭이 경험 통해 못올라가도록 막음. 새로운 원숭이 들어오면 폭력행사로 저지. 이후부턴 바나나와 찬물세례라는 원래 작동계기를 잊고 폭력이 기정사실화 됨. -기업의 집단행동 연구 위한 실험 401쪽 

실패하는 자는 핑계를 찾고 성공하는 자는 방법을 찾는다.409쪽 

일리히 법칙-수확체감의 법칙이 인간의 행위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학자. 인간의 활동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효율이 감소하며 나아가서는 역효과를 낸다. 농업노동의 양을 배로 늘린다고 해서 밀의 생산량이 배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노동의 양을 늘리는 만큼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노동의 양을 늘려도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추가적인 스트레스가 역효과나 파괴적인 효과를 낸다. 458쪽 

벼룩은 자신의 점프능력보다 낮춘 유리천장에 부딪히면 점프를 낮추다 그 낮춘 정도가 자신의 원래 능력이라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 관찰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만 하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게 되고 남들이 주입하는 의견에서 벗어나게 되죠.488쪽 

한 쌍의 남녀가 있다면 어느 한쪽은 고통을 받고 다른쪽은 권태를 느끼기 마련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쪽이야. 5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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