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노말 액티비티 - Paranormal Activit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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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인류의 역사는 어찌보면 통제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열망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의식주에 대한 해결은 통제영역의 확장을 위한 기본 전제였으며, 이것이 해결되기 시작하면 통제는 그야말로 경계를 잊기 시작한다. 시공의 확장도 바로 통제 영역의 확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점과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도 이런 측면의 일부일터다. 일기예보도 마찬가지다. 로봇이란 것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인간의 통제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른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다. (물론 초자연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통제의 바깥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어떻게든 설명하고자 애를 쓴다.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원작 영화를 보고 한눈에 반해 저작권을 산 후 결말만 자신의 뜻대로 고쳐 찍었다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면 마지막 2~3분 정도의 결말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어떻게 사람이 귀신에 들리는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문이 스스로 닫혔다 열리고, 알지 못할 발자국이 찍히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끌려나가고... 어찌보면 다소 황당한 내용들 뿐이다. 하지만 다큐를 찍듯 리얼타임으로 찍힌 화면과 빠르게 돌린 화면 덕분에 생생함을 얻는다. 이 영화의 장점은 오직 이것뿐이다.  

주인공인 여자가 결국 귀신에 들리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결말짓는 영화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세상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라고 주장하기 위한 증거물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꽤나 지루한 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거의 대부분 믿는 경향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것은 꽤나 힘을 얻는다.(우린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것이 긍정의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눈에 보여줌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또 무슨 경우일까)  

그러나, 이것은 영... 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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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꽃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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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의 다른 작품들, 특히 '검은집'과 '천사의 속삭임'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푸른 불꽃'에까지 손을 뻗게 만들었다. 개인들의 사건 뒤에 감추어져 잘 보이지 않던 사회적 맥락까지 파고 들었던 두 작품들에 비해 푸른 불꽃은 개인적 느낌이 더 강해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푸른 불꽃이 흥미로운 것은 범죄자의 입장에서 그 심리를 쫓아간다는 것이다. 17살 고등학생이 2건의 살인사건을 완전범죄로 꾸미고자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정의를 가진 힘만이 가장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야. 애당초, 힘 이외에 효과가 있는 해결방법이 어디 있다는 거지? 132쪽 

슈이치는 의붓 아버지의 횡포로 동생인 하루카와 어머니를 잃을까 조마조마해 한다. 변호사의 도움을 빌려 보고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위에서 도와 줄 사람도, 사회 시스템에 기댈 구멍도 없다고 느낀 슈이치는 결국 아버지를 죽일 결심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살인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를 친구였던 다쿠야에게 들키고 만다. 다쿠야는 그것을 빌미로 돈을 달라는 협박까지 해온다. 한번 살인을 저질렀던 슈이치는 다시 완전범죄를 꾸민다. 오직 어머니와 동생을 지키겠다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살인을 정당화 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살인자의 마음을 철저하게 괴롭히는 것은 신에 대한 외경도, 또한 양심의 가책도 아니다. 더구나 세상에 대한 체면이나 소문 따위는 쓰레기통에나 들어갈 시시껄렁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주의 톱니바퀴처럼 마음을 옭아매는 것은 단지 사실일 뿐이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그 사실에서는 평생 도망칠 수 없다. 는 걸로 괴로워 한다.  

슈이치의 친구인 다이몬과 노리코는 그를 이해하고 그의 거짓된 알리바이를 지켜주려 애쓴다. 범죄를 계획하던 슈이치에게 다이몬은  
 

분노는 3독 가운데 하나야. 한번 불을 붙이면 분노의 불꽃은 끊임없이 타오르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 모두 태워버리고 말지. 361쪽 

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슈이치는 끝내 그 불꽃에 자신까지 타버린다.  

소설을 다 읽고나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분노에 대해서도 우린 분노의 불꽃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분노를 삭여야만 하는 것일까. 정당한 분노란 없는 것일까. 때론 분노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까.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그리고 어디까지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 슈이치가 동경한 정의를 가진 힘은 그저 망상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분노를 정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또는 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과연 슈이치는 좋은 사람이었을까, 나쁜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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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2010-01-1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조인스 닷컴에서 보고 주문할려고 알라딘에 왔더니....알라딘 회원이시네요. 반갑습니다.

하루살이 2010-01-14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우연이. 정말 반갑네요 ^^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 박찬일의 이딸리아 맛보기
박찬일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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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요리사에게 꿈이란 없으며, 오직 남은 것은쫓겨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생존본능이었다.282쪽 
  

이 책은 이탈리아 요리 유학을 떠난 요리사의 이야기다. 이탈리아 북부의 한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남부 시칠리아 음식점에서의 견습생활을 담고 있다. 이탈리아의 북부와 남부의 차이. 이탈리아 음식과 프랑스 음식의 차이, 한국 음식과의 유사성, 전쟁터같은 주방의 모습 등등이 생생하면서도 코믹하게 담겨 있다. 저자의 경쾌한 문체와 글솜씨 덕분에 마치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드라마 '파스타'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이탈리아 주방에 여자가 없는 이유, 기름통에 얼음이 빠진 에피소드는 물론이요, 이선균이 금지한 세가지도 책 곳곳에 숨겨 있다. 푸아그라를 절대 요리하지 않고, 소스를 듬뿍 바르는 것을 미국 음식이라고 혐오하는 주방장에서부터 피클을 먹지 않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영락없이 드라마에 투영되어 있다. 또 주방장의 절대권력과 요리사들간의 시기, 방해하는 사건 등등도 사뭇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는 아무 생각없이 음식에 마구 쏘스를 치는 걸 아주 싫어했다. 쏘스는 프랑스 것이지, 이딸리아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재료에 자신이 없으면 쏘스로 까므쁠라주 위장하는 거라고 핏대를 세웠다. 요리보다 쏘스가 더 많이 나오는 미국 요리를 보면 그는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면서 "접시는 캔버스가 아니야"라고 외쳤다. 접시는 요리를 담아야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221쪽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선입견도 여지없이 깨뜨린다. 마늘은 그저 향으로만 이용하기 위해 볶은 후 버린다거나, 고추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다. 이탈리아에서 피자를 먹으려면 저녁에 식당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땅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요리에 대한 깊은 성찰 때문이다. 

쥬제뻬의 요리법은 확실히 달랐다. 그는 요란한 요리법은 몰랐다. 그러나 재료의 근본에 더 충실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의 요리가 이딸리아에서 주목받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슬로우푸드 운동의 씨칠리아 협회 창립자였다. 135쪽 
 

로마 스페인광장에 맥도널드가 생기자 패스트푸드 반대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슬로우푸드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면서 진정한 음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가 내게 유전자처럼 심어준 건 요리하는 영혼이었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는 나의 재료로, 가장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먹는 요리를 만들라는 요리의 삼박자를 깨우쳐주었다. 모양이나 장식으로 멋을 내는 줄만 알았던 서양요리, 이딸리아 요리의 진정한 승리는 이 삼박자에 있었다는 걸 그는 알려주었다.  
 

그는 좋은 재료를 직접 구하지 않고 그저 전화통을 붙들고 배달받는 미슐랭급 스타 요리사를 경멸했으며, 멀리서 수입한 재료를 자랑하는 요리사에게 호통을 쳤다. 공장화 기계화되는 재료의 역사를 슬퍼했으며, 돼지나 닭이 항생제와 호르몬의 늪에서 신음하는 걸 참지 못했다. 아이들이 먹는 음식이 사료가 되고 있는 현실을 분노했으며, 항상 지역 어린이들이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 가르치고 연구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284쪽
 
육식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천천히, 그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세상의 쓸모를 기꺼이 마련해주는 게 바로 요리사의 몫이다. 쥬제뻬는 그 역할을 흔쾌히 맡았다. 요리사란 요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한 그릇의 요리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통제하고 감시하는 관찰자여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138쪽 
 

"유기농의 의미도 이미 퇴색했어. 도시 사람들이 저 한몸 건강하게 살자고 농약이며 항생제 따져서 구입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유기농이 아니지. 그 사람들은 유기농조차도 벌레 먹었다고 항의를 하는 멍청이들이니까." 하긴, 미국 캘리포니아의 거대 유기농 기업들은 최저임금에 멕시칸들을 고용하여 땡볕 아래서 쌜러드용 채소의 벌레를 손으로 잡도록 시킨다. 그 채소는 다시 경유를 펑펑 쓰며 수천 마일을 달려서 미국 동부로 간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유기농일까.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건강한 개념의 진짜 유기농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구를 태우는 기름을 마시는 것일까, 샐러드를 먹는 것일까.  
그는 또한 기업적으로 만들거나 하우스 재배한 유기농도 배척했다. 땅주인인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작물이나 가축은 공장 생산품이라고 생각했으며, 하우스 재배에 들어가는 기름을 저주했다. "이것 보라구, 한겨울에 웬 오이야? 이게 오이로 보여? 오이 부피보다 몇배의 기름으로 기른 이게 오이냐구. 오이 속에 기름이 가득 차 있어. 이건 진짜 오이가 아냐. (122~123쪽) 

우리가 먹고 있는 것. 그것은 생명의 힘을 지닌 음식일까, 공장에서 찍어낸 것과 다를바 없는 기름덩어리일까. 머나먼 유럽 이탈리아의 전쟁터같은 한 주방장이 전하는 가르침이 우리의 일상을 깨우친다. 
 

스스로 진짜라고 생각한다면 인증서 같은 걸 이마에 붙일 필요 없이 점잖고 묵묵하게 피자를 구워내면 된다. 진짜배기인데다가 맛있으면 인증서 없이도 줄을 서게 마련이다. 진품은 누가 봐도 알아주니까 겁먹을 건 없다네.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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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의 그 한결같은 마음을 멋들어지게 노래하고 있는 국민가요 <님과 함께>의 한대목이다. 생각해 보자,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랑하는 님과 함께 소박하게 농사짓고 사는 일이라니! 가던 길 멈추고 상상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런데 노래야 모두가 즐겁지만, 그런 마음의 울림에 깊이 공명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귀농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실제 농사를 지으러 농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지경이다. 왜 그럴까?
귀농은 간단히 말해, 농(農)촌으로 돌아가는(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많은 오해와 숨겨진 진실, 막막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그리움, 주변의 반대와 또 한편의 격려, 현실적 생존의 문제와 실존적 가치관의 문제 등등. 하나하나 확실히 짚어서 역으로 튼튼한 징검다리로 만들어야 할 문제들이 너무도 많다.

도시에서 귀농을 준비하는 단계를 포함해서, 실제 귀농을 해서도 필요한 덕목들을 정리해 보았다. 이 글은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짧고 부족한, 게다가 다소 과격한 길잡이일 뿐이다. 귀농이라는 아름다운 꿈이자 냉정한 현실을 내 것으로 만드는 길고 긴 과정에 대한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다. 어쨌든 수년간의 경험이 녹아든 결과물이고,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정을 담은 글이기도 하다.
 
 
귀농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텃밭농사 - 주말농사를 시작하라.
귀농을 해서 백평 농사를 하건 만평 농사를 하건, 무언가를 심고 거두게 될 것이다.
도시생활 내내 흙과 멀어진 채로 살다가, 귀농을 하면 그때 가서 거창하게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이라면 문제가 있다.
재를 묻혀서 심는 씨감자의 경험, 알이 맺히지 않는 배추농사의 경험은 부지런하면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건을 탓하지 말고 좀 멀어도 좋으니, 아이들과 주말마다 교외로 나가보자. 옥상이 있다면 화분에 고추나 배추를 심어보자.
지하철에서 스포츠신문을 볼 때가 아니다. 영농서적을 외우듯이 읽어보자. 5평 농사의 풍성함을 만끽해 보자.
귀농의 필수조건이다.
 
준비 기간 동안 귀농교육을 받고, 내가 원하는 정보를 모으라.
도시에서 귀농 준비를 하는 순간 귀농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운영하는 생태귀농학교에 참여하면 많은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를 얻게 된다. 간혹 귀농교육을 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강의나 다른 이들의 사는 이야기보다는 내가 직접 부딪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농사만큼은 혼자서 되는 일이 없다. 농사는 원래 하늘이 짓는 것이고, 이웃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시작할 수도 없다. 하늘이든 이웃이든,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는 농사건 귀농이건 불가능하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귀농은 고달프기만 하다.
귀농과 관련된 정보나 영농정보도 넘쳐난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인터넷 덕분에 정보의 홍수라, 오히려 옥석을 가리는 일이 더 힘들 지경이다. 그 중에 내가 원하는 정보만 집중해서 찾고 스크랩해 보자.
정작 귀농해서는 자료나 정보를 폭넓게 모으는 일이 쉽지 않다. 철을 좇아 사는 일로만 하루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준비하는 두툼한 자료뭉치는 분명히 큰 자산이 된다.
 
철학적 고민, 시대와 호흡하는 정신적인 무장이 중요하다.
철학적 고민이라니, 좀 생뚱맞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말하지만, 귀농은 삶의 전면적인 전환이다. 단순히 샐러리맨에서 농부로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내 가족의 생활양식이 농촌생활에 어울리게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 무수한 철학적 고민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 도시 친구들에게 감자 한 박스를 팔아보자.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그 친구는 나의 수고와 땀을 모른다. 감자가 알이 작다느니 남아서 썩었다느니, 속 썩는 이야기 듣기 십상이다. 어쩌다 생산을 많이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아볼라치면, 시장에 비집고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농민들이 왜 수확 철에 더 속이 터지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게다가 수해나 태풍이라도 얻어맞으면? 그래도 나는 귀농을 행복하다 할 것인가? 그 때, 나의 준비된 철학, 단단한 가치관이 필요하다.
이 글 처음에 적은 노래가사에 나오는 저 푸른 초원도, 그림 같은 집이 서 있을 곳도,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의 농촌일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농촌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다. 노래에 나오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의 농업 순환은, 다름 아닌 WTO 체제 아래의 한국농업 위의 순환이다. 귀농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는 시공을 초월한 순백의 종이가 아니다. 바로 오늘의 힘겨운 농촌과 무너져 가는 농업, 그 위에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민을 가서 농사짓고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부터 달리 생각하고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농업?농촌의 역사와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되, 애정을 가지고 해야한다.
 
귀농을 경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지 말라.
결론적으로, 귀농을 해서 도시생활과 같은 경제적 수준을 유지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자연이 주는 수많은 기쁨과 혜택이 또 다른 수입이다. 이걸 누릴 수 있으려면 앞서 말한 철학적 고민이 받쳐주어야 한다. 도시에서는 식의주와 건강문제, 교육문제에 들어가는 돈은 밑도 끝도 없다. 모두 돈과 맞바꾸어야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다르게 접근할 수 있고 풀 수 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하는 이야기들은 귀농본부에서 펴내는 계간지 <귀농통문>에 가득하다.
대체 자금이 얼마정도 있어야 귀농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물론 답은 없다. 그렇지만 굳이 답을 해야 할 때는, 몸 누일 집과 50평 텃밭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 이상은 옵션이다. 황토집을 짓든 시설농사를 하든 소를 키우든 그건 모두 옵션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다들 웃는다. 전혀 웃을 일이 아닌데 말이다.
도시생활을 고스란히 이동한 귀농을 생각하면 자금은 수억이 들 것이다. 도시에서 바쁘게 일하던 것처럼 농촌에서도 일하려고 한다면, 우선 좀 멈추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귀농설계는 그곳에서 다시 해야한다. 물론, 도시에서의 설계도 필요하지만, 농촌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특히 땅 사는 일, 집 짓는 일은 되도록 천천히 신중하게. 귀농은 치킨집 신규창업과는 전혀 다르다. 속도와 경쟁이 아니라 느리게 천천히 사는 일이다. 자금을 많이 들이면, 그만큼 바빠지고 고달프다.
 
농사로 돈 벌 수 있다는 생각은 접어라.
간혹, 농업을 통한 성공사례가 소개된다. 부디 현혹되지 마시기를. 농사꾼 1~2%의 특출난 사례가 우리의 것이 되기는 어렵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꿈도 꾸지 않는 것이 건강에 좋다. 그런 분들의 경우,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한다. 아니면, 정말 시기적절한 아이템이 있어야 한다. 귀농을 하려는 이들은 그 줄의 맨 끝에 서 있다.
농사는 투기가 아니다. 한탕으로 되는 농사는 없다. 사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귀농을 하지 않아야한다. 수십 년 유기농업을 하시는 선생님들 가라사대, 돈 버는 작물은 없다. 땀 흘린 만큼만 거두고 먹는다는 진리에만 충실하면 된다. 귀농을 해서는, 돈을 번다는 개념이 달라야한다. 자급자족만 할 수 있어도, 좀 거칠게 말하면 ‘시골에서 붙어 있을 수만 있어도’ 성공적인 귀농이라고, 귀농자들은 말한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다면, 이를테면 소를 규모 있게 키우거나 시설작물 같은 것을 해보고 싶으시다면, 좀 천천히 바닥부터 일을 익힌 후에 투자를 하시라고 곡 말씀드리고 싶다. 프로 농사꾼들이 자기 노동을 최대한 들여서 농사지어도 될까말까 한 일이다. 농업은 계산 잘 해서 투자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며, 거기 내 땀이 깃들여야 한다.
농업소득에 관해서 유념할 일은 유통에 관한 문제이다.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제때 제값에 팔지 못하면 그만큼 허탈한 일이 없다. 귀농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유리한 면도 있다. 도시 연고를 잘 활용하면 되지만, 그게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 유통망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기존 농민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작목반에 가입하거나, 유기농 생산자로 인정을 받아 생협이나 한살림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채우려면 게으를 수가 없다.
농사로 돈 버는 방법! 그 어떤 작목이든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능력이 있으면 가공을 해서 부가가치를 높이고, 친지든 조직이든 든든한 유통망에 기대라는 말 외에 더 보탤 말은 없다.
 
농촌에는 농사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농촌에서 직업을 이어가라.
귀농을 하게 되면 꼭 농사를 지어야 할까? 꼭 농사꾼이 되어야만 할까?
아니다. 농촌에는 농사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귀농도 농사를 지어야만 귀농은 아니다. 시골에서는 그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10평 채마밭 가꾸는 일은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예를 들면 더 좋을 것 같다. 우선 교사들은 그런 면에서는 유리하다. 부부 중의 한사람이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일을 하면 여러모로 수월한 법이다. 아내는 읍내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남편은 농사꾼으로 땀 흘리는 부부들도 있다.
남자들은 지역 내의 농업관련 활동을 전업으로 할 수도 있다. 영농조합법인이나 생산자공동체 사무 일을 보거나, 트럭을 몰고 배송을 하러 다니는 귀농자들도 있다. 수입도 수입이지만, 지역 정보를 두루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여자들은 여성농업인센터 등에서 방과 후 아이들을 지도하거나, 면사무소에서 농민들 컴퓨터교육을 계약직으로 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런 일들은 도시에서 일을 해 온 귀농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농촌에는 젊은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농번기에 품을 팔거나 산불감시원 등을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마을 일원으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아야 가능하고, 생활의 보조 수단이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일들도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매이지 않고 자원봉사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몇 평 농사이든 평수는 상관없이, 역시 귀농은 역시 내 농사가 제 맛이다.
 
지역 관공서나 기관 및 조직을 적극 활용하라.
귀농을 지원하는 안정적인 지원시스템은 없다. 스스로 돌파해 나가야 한다.
시골 면사무소는 도시의 동사무소와 같은 레벨이지만, 농촌생활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면사무소 직원과 통하면, 상당한 지역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농업기술센터의 역할도 무시 못 한다. 도시에서야 가급적 관공서 안 가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농촌은 관공서와 친해질수록 좋다. 실질적인 귀농자 지원 방안은 각 면 단위에서 쥐고 있다. 속된 말로 자꾸 찔러야 한다.
농촌의 특징은 무수한 민간조직이 있다는 것인데, 웬만한 촌부들은 이장이나 무슨무슨 모임 회장을 안 해본 분이 없다. 생활과 직결되는 작목반부터, 대체 무슨 일들을 하는지 알길 없는 동호회와 오래된 농촌조직들이 있다. 이를 활용할 수 있다면 정착에 도움이 된다. 후견인들을 얻는 것이다.
귀농자들은 붙박이 농민들과는 달라서, 좋은 교육이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간다. 또 도시에서의 경험 때문에 무슨 박람회니 교육이니 하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대충 알아본다. 근래에는 모든 군에서 친환경농업 육성을 과제로 삼고 있어서, 상당한 교육과 투자를 하기도 한다. 여기 잘 참여하고 활용하기만 해도 의외의 수확을 얻을 수 있다.
 
귀농지 선정은 연고지와 인맥을 적극 활용하고 인내하라.
귀농지 선정만큼 막막한 일이 있을까 싶다. 심지어 지도를 펴고 눈감고 찍은 곳부터 돌아보았다는 분도 있다. 어디를 어떤 방식으로 다녀야 내 귀농지를 찾을 수 있을까.
고향으로 귀농을 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고향을 피하는 이유야 알지만, 고향은 또 다른 면으로 품어주는 곳이다. 이제는 농촌 어르신들의 귀농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아는 귀농자가 있는 지역이면 좋다. 귀농자의 마음은 귀농자가 아는 법이다. 서로 의지할 수 있다. 그런데 꼭 주의할 점들이 있다. 우선, 귀농자라고 해서 나를 도와줄 의무는 없다. 그런데도 용케 인연을 얻어 귀농자와 함께 마을을 돌아보고 술 한잔 나누게 된다면 정말 감사할 일이건만, 당장 내 목표가 급하다고, 그런 소중한 인연을 허술하게 생각하고 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한번 만난 귀농자와는 자주 안부도 묻고, 농산물도 앞장서서 팔아 주면서 더 깊이 만나기를 바란다. 행여 사귀기도 힘들고 할 이야기가 없을까 걱정 마시라. 농사 이야기만큼 사시사철 무궁무진한 주제가 어디 있으랴.
그 외 몇 가지 요령은 있다. 우선 대상 지역을 최대한 좁히는 것이 좋다. 하나의 군만 집중 공략하라. 지역 부동산정보지 같은 것도 활용하고, 면사무소 직원을 잘 만나면 같이 다니기도 한다. 마을 이장을 찾아갈 때는 빈손 말고 음료수 한 박스는 사들고 가기 바라고, 그 지역 토박이 농사꾼을 알면 제일 좋다. 귀농지를 찾는다고 차 몰고 다니는 마음이야 절절하지만, 시골 사람들 눈에는 부동산 투기하려는 사람과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 제발 땅값부터 묻는다든지 할 일이 아니다. 뭐 좀 있는 행세는 제발 하지 말기를.
우선 땅은 빌려서 농사를 짓기를 권하고 싶다. 마을 어른들은 한해 농사 하는 것 보고서야, 이 사람이 농사를 짓겠다는 것인지 아닌지를 믿는다. 그러니 첫해 농사는 정말 열심히 해야한다.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면 된다. 그 다음부터는 농지를 빌려주겠다는 사람, 내 땅을 싸게 사라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년이면, 옆 마을이나 산너머 마을 정보도 얻게 된다. 사실 일개 면 범위의 정보면 충분하건만, 우리는 천여평 농지를 얻기 위해 전국을 헤매는 것이다.
땅을 사는 일과 집을 짓는 일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촌생활 속에서 얻는 정보는 살아있는 정보이다. 또, 살면서 내가 어떤 형태의 귀농을 할 것인가가 좀더 구체화되면, 농지와 집에 대한 시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실제로 많은 귀농자들이 거처를 옮긴다. 밀려나는 경우도 있지만, 더 좋은 선택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귀농지를 찾는 일은 배필을 찾는 일과 같다. 아주 극적인 인연이다. 노력하는 필연과 하늘이 내리시는 우연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한다. 내 맘에 꼭 맞는 귀농지는 없다. 직업상 수백 동네를 다녀 보았지만, 집과 농지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정말 기막힌 곳이라 생각한 집은 서너군데에 불과하다. 고향은 어디인가? 정들면 고향이다. 나의 귀농지는 어디인가? 정들면 그곳이 최고다.
 
 
귀농을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을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성공적인 귀농의 최후 비결도 여기에 있다.
귀농과 전원생활의 차이도 여기에 있고, 귀농의 최종 목표도 여기에 있다.
그 마을 사람이 되는 것. 귀농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마을 사람이 되기 위해 중요한 점은, 마을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몸과 마음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열쇠는 애정과 믿음에 있다. 농촌이라는 이름 안에 있는 수많은 요소들에 대한 애정과 그 중에서도 농민에 대한 믿음. 결국 사람을 믿지 않으면, 귀농이고 뭐고 풀릴 일도 없다.

흙이야 늘 정직하다. 땀 흘린 만큼 돌아온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내가 사람에게 기대고 사람들이 내게 기대는 아름다운 관계를 위한 노력은 꼭 뿌린 대로 돌아오지는 않지만, 힘들지만, 즐거운 숙제이다. 그 과정이 귀농이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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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이가 전하는 태평농 이야기
이영문 지음 / 연화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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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적의 사과'는 농약 한번 치지 않고 키워낸 사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잡초라고 부르는 풀들을 함께 '놔 둠'으로써 흙을 살려서 사과를 살리는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반성하게 한다. 기적의 사과가 더욱 놀라운 것은 수확된 사과가 쉽게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적의 사과같은 이야기들이 우리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한 농부가 키워낸 오이는 썩지않고 그대로 마른다. 농약 한번 거름 한번 주지 않았다. 오이가 자라난 곳의 흙을 검사해봤다. 연구원은 흙의 성분을 보고 도저히 작물이 자랄 수 없는 곳이라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오이는 먹음직하게 자랐고, 게다가 썩지도 않는다.  

흔히 농약을 친 작물들은 잘 썩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반대다. 방부제에 목욕을 시키지 않는 한 농약의 도움을 받고 자란 작물들은 쉽게 썩고, 유기작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연 속에 '방치'된 채로 자란 작물들은 한참동안 제 모습을 지켜낸다.  

태평이가 전하는 태평농 이야기는 한마디로 자연에 맡기는 농사법이다.  

작물은 자연이라 인위적인 간섭함이 없을 때 본래의 모습대로 존속할 수 있건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그들의 자생력을 쉬 믿으려 하지 않는다. 

겨울에 볏짚을 깔아주는 정도가 인위적인 일이다. 애써 해충을 잡으려 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의 자연농엔 해충이란 이름도 없다. 익충과 해충이란 인간적 관점에서 바라본 분류일 뿐 자연에서 결코 해충도 익충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물은 익충과 해충을 가르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도움'으로 더욱 씩씩하게 자란다. 벼와 함께 피도 자라고 그 위엔 온통 거미줄 투성이인지라 남들이 보기엔 게으른 농부의 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자란 벼는 강한 생명력으로 넘쳐난다.

농사 역시 화학농법으로 농사짓던 땅에서 태평농법으로 전환하려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 만큼 화학성분이 물씬 배인 흙을 되살리려면 지켜보고 기다릴 수 있는 흙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자연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일까. 땅에 거름을 주고 비료를 주고 보살펴주어야지만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우리 머리속을 지배한 것일까. 

잘 썩지않는 과채가 신기하다거나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자연스러운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세상. 그 생각의 근원부터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태평농이라는 이름으로 작물을 재배해 온 저자는 우리 종자와 우리 흙에 대한 생명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 생명력에 대한 믿음을 과연 지켜내고 키워낼 수 있을까. 그의 성공적인 작물 재배법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농약과 거름이 판을 치는 세상이 하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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