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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 박찬일의 이딸리아 맛보기
박찬일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평점 :
견습요리사에게 꿈이란 없으며, 오직 남은 것은쫓겨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생존본능이었다.282쪽
이 책은 이탈리아 요리 유학을 떠난 요리사의 이야기다. 이탈리아 북부의 한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남부 시칠리아 음식점에서의 견습생활을 담고 있다. 이탈리아의 북부와 남부의 차이. 이탈리아 음식과 프랑스 음식의 차이, 한국 음식과의 유사성, 전쟁터같은 주방의 모습 등등이 생생하면서도 코믹하게 담겨 있다. 저자의 경쾌한 문체와 글솜씨 덕분에 마치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드라마 '파스타'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이탈리아 주방에 여자가 없는 이유, 기름통에 얼음이 빠진 에피소드는 물론이요, 이선균이 금지한 세가지도 책 곳곳에 숨겨 있다. 푸아그라를 절대 요리하지 않고, 소스를 듬뿍 바르는 것을 미국 음식이라고 혐오하는 주방장에서부터 피클을 먹지 않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영락없이 드라마에 투영되어 있다. 또 주방장의 절대권력과 요리사들간의 시기, 방해하는 사건 등등도 사뭇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는 아무 생각없이 음식에 마구 쏘스를 치는 걸 아주 싫어했다. 쏘스는 프랑스 것이지, 이딸리아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재료에 자신이 없으면 쏘스로 까므쁠라주 위장하는 거라고 핏대를 세웠다. 요리보다 쏘스가 더 많이 나오는 미국 요리를 보면 그는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면서 "접시는 캔버스가 아니야"라고 외쳤다. 접시는 요리를 담아야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221쪽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선입견도 여지없이 깨뜨린다. 마늘은 그저 향으로만 이용하기 위해 볶은 후 버린다거나, 고추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다. 이탈리아에서 피자를 먹으려면 저녁에 식당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땅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요리에 대한 깊은 성찰 때문이다.
쥬제뻬의 요리법은 확실히 달랐다. 그는 요란한 요리법은 몰랐다. 그러나 재료의 근본에 더 충실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의 요리가 이딸리아에서 주목받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슬로우푸드 운동의 씨칠리아 협회 창립자였다. 135쪽
로마 스페인광장에 맥도널드가 생기자 패스트푸드 반대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슬로우푸드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면서 진정한 음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가 내게 유전자처럼 심어준 건 요리하는 영혼이었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는 나의 재료로, 가장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먹는 요리를 만들라는 요리의 삼박자를 깨우쳐주었다. 모양이나 장식으로 멋을 내는 줄만 알았던 서양요리, 이딸리아 요리의 진정한 승리는 이 삼박자에 있었다는 걸 그는 알려주었다.
그는 좋은 재료를 직접 구하지 않고 그저 전화통을 붙들고 배달받는 미슐랭급 스타 요리사를 경멸했으며, 멀리서 수입한 재료를 자랑하는 요리사에게 호통을 쳤다. 공장화 기계화되는 재료의 역사를 슬퍼했으며, 돼지나 닭이 항생제와 호르몬의 늪에서 신음하는 걸 참지 못했다. 아이들이 먹는 음식이 사료가 되고 있는 현실을 분노했으며, 항상 지역 어린이들이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 가르치고 연구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284쪽
육식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천천히, 그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세상의 쓸모를 기꺼이 마련해주는 게 바로 요리사의 몫이다. 쥬제뻬는 그 역할을 흔쾌히 맡았다. 요리사란 요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한 그릇의 요리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통제하고 감시하는 관찰자여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138쪽
"유기농의 의미도 이미 퇴색했어. 도시 사람들이 저 한몸 건강하게 살자고 농약이며 항생제 따져서 구입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유기농이 아니지. 그 사람들은 유기농조차도 벌레 먹었다고 항의를 하는 멍청이들이니까." 하긴, 미국 캘리포니아의 거대 유기농 기업들은 최저임금에 멕시칸들을 고용하여 땡볕 아래서 쌜러드용 채소의 벌레를 손으로 잡도록 시킨다. 그 채소는 다시 경유를 펑펑 쓰며 수천 마일을 달려서 미국 동부로 간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유기농일까.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건강한 개념의 진짜 유기농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구를 태우는 기름을 마시는 것일까, 샐러드를 먹는 것일까.
그는 또한 기업적으로 만들거나 하우스 재배한 유기농도 배척했다. 땅주인인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작물이나 가축은 공장 생산품이라고 생각했으며, 하우스 재배에 들어가는 기름을 저주했다. "이것 보라구, 한겨울에 웬 오이야? 이게 오이로 보여? 오이 부피보다 몇배의 기름으로 기른 이게 오이냐구. 오이 속에 기름이 가득 차 있어. 이건 진짜 오이가 아냐. (122~123쪽)
우리가 먹고 있는 것. 그것은 생명의 힘을 지닌 음식일까, 공장에서 찍어낸 것과 다를바 없는 기름덩어리일까. 머나먼 유럽 이탈리아의 전쟁터같은 한 주방장이 전하는 가르침이 우리의 일상을 깨우친다.
스스로 진짜라고 생각한다면 인증서 같은 걸 이마에 붙일 필요 없이 점잖고 묵묵하게 피자를 구워내면 된다. 진짜배기인데다가 맛있으면 인증서 없이도 줄을 서게 마련이다. 진품은 누가 봐도 알아주니까 겁먹을 건 없다네. 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