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첫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번째나 세번째를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첫경험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마디씩 건넨다. 첫경험의 첫은 첫째가는의 첫이 아니라 처음의 첫을 의미한다. 처음의 첫이 둘째와 세째 등과 다른 것은 두근거림 때문이다. 첫은 기대를 불러오고 두려움도 가져온다. 기대와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것이 묘하게 합쳐져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첫경험이 제일 좋은 또는 제일 멋진 경험인 것만은 아니다. 첫경험은 별로였지만 두번째 세번째로 갈수록 더 나아지는 경우도 많다. 또는 두번째 세번째가 첫경험의 짜릿함보다 더한 짜릿함을 선사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기대와 다른, 또는 두려움에 미치지 못하는 그런 첫경험 때문에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첫경험을 말하는 것일까. 

첫만남, 첫사랑, 첫골, 첫홈런, 첫키스, 첫여행...... 

살아가면서 가슴 두근거리는 일은 많지않다. 스트레스로 가슴이 뛰는 건 두근거림과 다르다. 걱정과 근심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슬픔은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마음대로 풀리지 않은 인생에 가슴이 답답해져 오기도 한다. 그러기에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은 그야말로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다. 아니, 기쁨과 환희에 대한 기대, 또는 기다림이 가슴 두근거림으로 나타난다. 첫경험은 그래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주는 기대와 두려움이 주는 기쁨이다.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가슴 두근거림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느끼고자 할 때는 기다려야 한다. 첫경험을 향해서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에 인생의 길목에서 첫경험의 순간들을 계속 마주쳐야 한다. 첫경험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인생을 가슴두근거리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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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구름



빛과 성에 

 

구름 뒤에 가려졌던 빛이 얼마나 급한지 곧게 곧게 뻗어 내려온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들. 눈앞에 있지 않더라도 항상 있을 것임을 믿게 만드는 것들. 그것은 모두 빛이 된다. 말 그대로의 빛이요, 누군가의 빛이기도 하다.  

꽁꽁 언 성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차가움을 전해준다. 그러나 유리창 뒤에서 비쳐지는 빛 덕분에 조금은 따스함을 얻는다. 빛은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차가운 마음을 데워준다. 얼었던 마음을 녹인다.  

빛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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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끝나갈 때면 노오란 은행잎을 비롯해 오색의 단풍잎들이 땅바닥에 나뒹군다. 길을 걷다 그 화려한 색에 놀라 단풍을 하나 집어들어 책사이에 끼워 놓기도 한다. 그 아름다움이 그냥 잊혀지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일 터이다. 단풍은 그렇게 찬란했을 때 땅에 떨어지는 걸로만 알았다.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요즈음. 산을 오르다 갑자기 낙엽이 되지않고 끈질기게 가지에 매달리고 있는 나뭇잎을 보게됐다. 단풍나무의 그 화려한 잎들은 다 어디론가 사라졌고 칙칙한 갈색의 쪼그라든 잎들만이 처량하게 매달려 있었다. 단풍의 색을 유지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색을 다 잃어버리면서도 가지에 매달려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추레한 그 잎은 탐욕에 대한 깨우침을 준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야 했음에도 기어코 자리를 지키려 한 그 잎의 욕망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듯했다. 퇴색의 끝자락까지 버텨보았자 그것은 안타까움조차 자아내지 못한다.

단풍나무 옆엔 소나무가 그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솔잎은 어떻게 독야청정할 수 있을까. 솔잎은 보통 2~3년에 한번씩 물갈이를 한다고 한다. 즉 솔잎 또한 낙엽이 되고 그 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솔잎이 나오는 것이다. 그 순환의 물결이 푸루름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솔잎이 말해주는 청정한 마음이다.

퇴색은 누구나가 겪어야 할 운명이다. 그러나 퇴색이 주는 초라함에서 벗어나 청청하고 맑은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나를 변화시키는 자세에 있다.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언제나 젊은 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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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의 강연 중에 나오는 우화 하나.

한 남자가 자동차를 시속 10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고 있다. 그때 뒤따라온 경찰 오토바이. 자동차를 멈추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자동차와 나란히 서게 됐을 때 땅에 발을 내딛다 그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유는. 오토바이가 정지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속한 자동차와 엎치락 뒤치락 하다 둘이 속도가 같아지자 순간 정지한 것이라 생각한 것.

그렇다면 이 우화가 주는 교훈은? 상대적 비교에서 벗어나자는 거다.

그런데 상대적 비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흔히들 부부싸움에서 가장 피해야 하는 것으로 옆집과의 비교를 꼽기도 한다. 뭐 부부싸움뿐이랴. 오죽 했으면 엄친아가 등장하겠는가. 

흔히들 자신에 대한 평가는 과하기 마련이고 타인에 대한 평가는 과소하게 된다. 이런 평가가 과거로 흘러가면 "왕년에" 라는 단어가 튀어 나오고 미래로 향한다면 "마음만 먹는다면" 이라는 단어를 동원한다. 이것도 일종의 남과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려나. 어쨌든 이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는 타인에 대한 과소평가와 이루어져 헛된 꿈을 꾸게 만들기도 한다. 이때 주위에서 쏟아지는 말 한마디가 '눈높이'다. "넌 눈이 너무 높아" 말이다.

타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그 주위 사람들의 평가를 모아 이리저리 점검해 보는데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평가들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여기서 또 삐딱하게 등장하는 것이 소위 '뒷담화' 아니던가. 그리고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냐에 따라 평가 또한 시시각각 변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 평가를 듣고 있는 당사자에 대한 이해 또는 평가에 따라서 의도가 개입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타인의 평가를 새겨 들어야 하는 것은 내 스스로의 평가는 대부분 과대 포장 됐거나 과소폄하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 맺기는 그래서 너와 나의 문제를 넘어 우리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가 된 순간 상대적 비교는 어디에서나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상대적 비교가 한없이 늘어나게 된다면 조금은 상대적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끊임없이 부딪쳐 소통하는 것만이 그나마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떨어지지 않는 비결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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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엔 가족이 없다. 송혜교도 현빈도 혼자 산다. 그들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분명 서울 토박이일듯 한데 가족과 함께 사는 것 같진 않다. 드라마 속에서 그들이 대화하는 상대에서 가족은 빠져 있다.

그들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회사라는 조직과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는 연인들간의 관계로만 읽혀진다. 물론 이 조직생활과 연애생활은 무척 닮아 있다. 1회와 2회에서 보여진 적과 아군의 경계, 권력다툼은 사회를 살아갈 때도 사랑을 키워갈 때도 부닥쳐야 하는 문제들이다. 모든걸 의연하게 대처할듯한 현빈에게도, 천방지축 뛰어다닐듯한 송혜교에게도 문제는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그들의 대처 또한 시시각각 다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목소리가 아닌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한마디씩 한다. 사는게 그렇게 힘든 거라고. 또는 반대로 이 세상이 그렇게 진중하게 살아갈 만한 것이냐고.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그들이 사는 세상에 가족이 없다는 것은 안타깝다. 하지만 바로 그게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일련지도 모른다. 하나만 낳아져 자란 이들에게도 그렇지만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그렇다. 그들이 날마다 대하는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답도 해답도 알지 못하는 인생살이에 나만의 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답대로 살아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세상이 그리워진다. 비록 외롭고 고달퍼 눈물을 흘릴지라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세상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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