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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소녀 - 소설로 읽는 사랑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이정순 옮김 / 현암사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15세된 게오르그라는 소년이 11년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마치 대화하듯 써내려간 글이다. 아버지의 편지는 액자소설 형식으로 들어가 있고, 그것에 대한 감정, 느낌 등을 아들인 게오르그가 덧붙여 써내려가는 글은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다. 사는게 우울하다거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사람들일지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삶과 사랑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볼 것 같다.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감동보다는 눈시울이 잠깐 젖는 잔잔함, 폭소보다는 입가에 얇은 미소를 띠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아버지의 편지는 당신이 20대 초반이었을적, 운명이라 여기게된 오렌지 소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전차 안에서 마주친 오렌지를 가득 담은 종이봉투를 들고 있는 소녀.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미 아버지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채 헤어진 그. 다시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해 갖은 추측과 상상을 해대기 시작한다. 오렌지를 그렇게 가득히 산 것은 극지방을 여행하기 위한 비상식량일것이라거나, 대가족에게 쥬스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라거나 등등. 그리고 다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전차를 연신 타보기도 하고, 오렌지를 그렇게 살만한 곳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이 자주 가는 카페에서 마주친 그녀. 이번에도 그 만남은 짧은 한마디만을 나눈채 끝난다. 아, 그리고 또 얼마나 수많은 상상 속에서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재회를 기다리던가!
오렌지 소녀에 대한 정체를 여기서 밝힐 필요는 없을듯하다. 다만 운명이라고 생각되었던 만남들이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애타게 찾아헤맸기 때문에 가능했다라는 것에 어떤 거룩함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자식에게 남겨주고자 했던 것들을 통해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삶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갖게 만든다.
자연이 기적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거라. 세계가 동화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란 말이다. 그걸 꿰뚫어보지 못하는 사람은 동화가 끝날 무렵에 가서야 겨우 알게 될지도 모르지.(161쪽)
우리는 누구도 알지못하는 어떤 커다란 동화속에 함께 살고 있는 거라고. 우리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어떤 세계에서 춤추고 놀이하며 수다떨고 웃으며 살아간다고, 이 춤과 이 놀이는 삶의 음악이라고 너에게 얘기해주었단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 음악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172쪽)
허블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알게되는 과학적 지식들이 신화적 세상을 망가뜨릴 수는 없다.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지식으로 세상을 분리하고 뜯어본다고 해서 자연의 그 신비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과학자의 눈 보다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풍부한 감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아들에게 바랬다. 비록, 이별이라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얼마나 신비로우며 살만한 곳인가를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서 차분히 전한다. 아버지는 이별도 고통도 없이 그저 영원한 존재로 남을 것인지, 이별을 기약해야 하지만 사랑을 할 수 있는 한정된 삶을 살 것인지의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선택해보라고 한다.
게오르그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나서 한츰 성숙해진다. 새아버지에 대해 더욱 애정을 갖고, 어머니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고, 짝사랑했던 바이올린 소녀에게 고백할 것임을...
청소년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메마른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는, 아름다운 사랑과 삶의 철학이 담긴 동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