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류시화 지음 / 열림원 / 199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인도를 꿈꾸었던 적이 있다. 그곳에선 무엇인가 인생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듯 싶기도 했고, 마음의 평화를 선사받을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곳은 아직도 계급이라는 악령이 횡행하고 가난과 병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끔찍한 곳으로도 다가왔다.

인도는 그랬다. 내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나라.

수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냐, 혁명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냐에 따라 그곳은 천지차이다. 류시화처럼 구도자로서 바라본 인도는 만나는 이 모두가 구루가 되는 것이며, 혁명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뜯어고쳐야 할 악습으로 가득찬 곳이기도 하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은 오히려 인도로의 여행을 꿈꾸어 왔던 나에게 현실감을 심어주었다. 정말 내가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모든 걸 노 프라블럼 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들, 그 속엔 수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좀 더 나아지고자 하는 <이성>이 자리하지 못하는 사회, 즉 이성적이지 못하는 사회가 바로 인도일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의 뜻을 화이트헤드처럼 정의한다면 종교라는 것 또한 이성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도는 노 프라블럼이다. 그것이 이성이든 종교든 노 프라블럼이다.

물론 류시화가 만났던 문둥병 환자이면서 화장터 인부로 사는 쿠마르와 같은 경우는 이 노 프라블럼의 마음이 중요할 것이다. 정말 신이 준 것으로밖에 설명이 안되는 시련을 우리가 어떻게 견뎌낸단 말인가? 그것은 그저 노 프라블럼 하며 이런 시련에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땐 인도인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진정 경이롭다. 하지만 현실 제도가 가져오는 문제에 대해서도 노 프라블럼을 외쳐서야 되겠는가? (가난과 병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의 개선을 통해 그것은 개선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서도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잠시 맡고 있었던 것이라는 논리를 펴는 배짱, 맞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어느 기간동안 임시로 쓰겠다고 한 약속이다. 그 기간을 훔쳐간 것은 분명 도둑이지 않는가? 물건을 훔친 것이 아니라 그 기간에 대한 약속을 훔친 것이다. 기차 시간이나 버스 시간의 연착에 대해서도 무사태평. 아마도 기관사나 운전사가 친구를 만났을 것이라는 아량, 그렇지만 지금 내가 연착하지 않고 갔더라면 만났을 수도 있는 친구는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푸하하하, 간단하지. 그건 운명이다. 오랜 시간 전에 정해져 있던 운명.

그래 문제는 운명이다.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거역하느냐.  제도가 가져다준 운명은 바꾸려 노력하고 삶이 주는 운명은 받아들이자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모두가 운명으로 취급되어지는 인도인과는 그래서 이제 그 만남조차 두렵다. 정해진 길로만 걸어가는 사람들이지 않는가? 나는 때론 길이 아닌 곳을 가고 싶은데, 그들은 운명이라는 길로만 나를 인도할테니까.

편안한 마음을 갖을 수 있는것. 그것은 운명을 거역했을 때인가, 운명에 순응했을 때인가?

인도는 그래서 아직도 나에겐 물음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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