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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2-0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했어요. ^^ 많이들 모르더라고요. -_- 다음에서 메인에 안띄운데다가, 접속도 잘 안된다 해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고 있다. 3번째 읽는 것 같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 무언가 가슴이 꽉 막힌 느낌이다. 여하튼, 예전 읽었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읽었던 상황만 기억이 난다. 서재에 예전 글이라도 있나 찾아봐야겠다. 이전보다는 물러서서 읽는 것 같다. 

개념을 운동하는 것으로 쓰고 있는 것이 흥미로운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한 국민 내부에서의 분업은 우선 산업 노동 및 상업 노동의 농업 노동으로부터의 분리를 가져오고, 그와 함께 도시와 농촌의 부리 및 양자의 이해 대립을 가져온다." (198) 

영어본을 찾아보면 "The division of labour inside a nation leads at first to the separation of industrial and commercial from agricultural labour, and hence to the separation of town and country and to the conflict of their interests." (43) C.J. Arthur Ed., Karl Marx and Frederick Engles, The German Ideology Part One,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7.(revised edition 1970) 

어찌보면, "한 국민 내부에서의 분업은 산업 노동 및 상업 노동의 농업 노동으로부터의 분리이다"라는 규정식으로 쓰일 수 있는데, 이를 'leads at'이라고 쓴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사유를 전개해 나가는 것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사적 유물론' 자체의 패턴이다. '지금-여기'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사고방식. 이의 전제는 A -> B로 변화했을 때, B를 이해하기 위해서 A를 해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A와 B가 질적으로 다를때, A를 보는 시각 속에 이미 연구자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어, 여기서 A를 해부한 것의 '도구'가 다시 B를 선규정할 수 있다. 

즉, 맑스, 엥겔스가 원시사회부터 추론해 낸 핵심적인 사적 유물론의 전제인 "도덕, 종교, 형이상학 및 그 밖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상응하는 의식 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성의 가상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자립적] 발전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자신들의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한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 현실적인, 살아 있는 개인들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며, 의식을 단지 그러한 개인들의 의식으로서만 간주한다." (202)를 논의했을때, 이는 원시사회에서, 또 어쩌면 고대사회까지 타당할지 모르지만, 분업과 '지식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발생하고 그들 사이의 네트워킹과 담론의 '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담론들은 담론 내부의 질서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으며 운동하기 시작한다. 처음의 관계가, 이제는 질적으로 다른 관계들과 배치들로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A -> B로 변화하였다고 해서, A가 B의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논의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윌리엄스는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식의 논법이 아니라 '전체'에 대한 욕망을 들어내고, '이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윌리엄스를 더 읽어나가면서 비교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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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박사과정이다. 석사 때는 2년 안에 석사논문이라는 과정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하며 '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대문자 '문학'이란 무엇이고, 나는 왜 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했었다. 그 숨겨진 욕망은 결국 '문학 연구'를 특수한 위치에 규정지으려는 욕망이며, 이는 곧 나라는 개인의 삶에 특수한 위상을 부여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공익을 하면서, 국문과와 거리를 두면서 느꼈던 것, 또 '대중지성' 또는 '다중지성'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서 역사를 생생하게 살아내던 것을 보면서, 석사 때 나의 의문들이 사라졌다. 이 또한 '전위-민중/엘리트-대중'이라는 개념쌍 속에서 사고 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제 나는 국문학 연구나 나의 삶을 특권화시키려는 욕망을 많이 버렸다. 횟집하는 아저씨나 외교관이나 국문학을 하는 나나 모두 동일한 권리와 목소리로 삶을 살아낼 뿐이다. 문제는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겠다.

나는 우연히, 나의 기질과 관심상 국문학을 하는 것이며, 이를 잘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이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사회'에 즐거움이나 유익함을 주고 싶다. 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조금 더 내 안을 들여다보면, 나는 문학 텍스트의 세밀한 분석보다는, 거대 담론을 논의하고 싶어한다. 나는 여러가지 언어를 잘 했으면 좋겠고, 이를 바탕으로 거대담론을 논의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이제 박사를 복학하니 이러한 내 욕망들을 충족시키고, 더 펼치기 위해 공부해야 겠다. 

영어, 일어, 중국어로 연구나 텍스트를 무리없게 볼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고,  

서구 문학 이론에 대한 보다 넓은 지식과 이해, 그리고 한국 비평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결합시켜보는 것이 다음학기 목표다. 포스트 맑스주의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를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앞서 말한것처럼 소시민적 의미(?)에서의 내 삶의 자세만을 되뇔 뿐이다.  

물론, 그 와중에 결혼과, 굶지 않고 살아내는 것, MB를 비롯한 부당한 억압에게 날을 세우는 것,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고 더 많은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다. 

이만하면, 요즘 행복하다. 다른 사람들도 보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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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9-02-05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좋을텐데요 :)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고 같이 행복하자. 이렇게요 ^^

프레이야 2009-02-05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공익 마치고 박사과정 복학하시는군요.^^ 축하드려요.
동반자와의 좋은일도 준비하고 계신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대문의 글에도 함께 행복하자고 하시네요.
좋은 생각, 소망,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인 2009-02-05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 혼자만 행복하면, 행복할 수 없는 것 같아요. ㅎㅎ 모두 오랜만이요 :)

2009-02-05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9-02-0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습니다. 숨 한번 크게 쉬고 한 발짝 앞으로. 결혼도, 박사공부도 축하합니다. 천천히 내디디세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저도, 발을 떼어야 할텐데...

기인 2009-02-0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감사합니다... 근데 1번이 제일 어렵다고요? ㅜㅠ 흑 선배들 다 그리 말씀하시던데.. 걱정이네요 >.<;; 이제 결혼 66일 남았습니다 ^^;

hnine 2009-02-0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반듯하시네요.
무얼 하시든 제대로 잘 해내실 것 같아요.

기인 2009-02-05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ㅎㅎ
근데 가끔 문학하기에는 너무 반듯하다는 말을 들어서 ㅜㅠ
그냥 저냥 사는 범생이죠 뭐.. >.<

2009-02-06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8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9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9-02-10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의 컴백을 레이먼드 윌리언스를 통해서 알게되었네요.
오래전에 배우긴 했지만 그의 <장구한 혁명>을 읽어보진 않았지요.그의 제자라고 할 말한 스튜어트 홀은 제가 좋아라해요.^^ 결혼과 다이어트 모두 성공하시고...박사과정 순항하세요.

기인 2009-02-10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ㅎㅎ :) 드팀전님 오랜만이요 ㅎㅎ

모네 2010-12-0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국문학과에 지원서를 넣게 되는데
글 잘 읽었습니다.
 

4. 사회의 이미지. 

이 부분은 감동적이었다. 윌리엄스의 스케일이나 혼자서 사유하고(는 듯 하고), 홀로 서술하는 것의 거대함이 1부 마지막에 와서, 종합된다. 

사회적 이미지, 즉 '조직을 설명하고 관계를 상상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탐구'라고 하기도 흥미로운데, 윌리엄스 1부의 서술은 이론적(추상적)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료분석도 아닌 그 중간에 낑겨있는 듯한 느낌이다. 4장에서야 동의가 되기 시작하는 것도, 4장에서는 경제 결정론이나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왜 '전체'의 시야를 가져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이것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기나긴 혁명"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시야"이다. 

윌리엄스는 이 장에서는 '역사에서 중요했던 사회의 일반적인 이미지들 몇 가지를 점검하고, 그것이 우리가 현재 관계들에 대해 갖는 생각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며, 사회 변화의 실제 과정에서 그들이 지니는 의미'를 따져보기로 한다. 

4.1  

'우리가 물려받은 지배적인 사회 이미지'로 윌리엄스는 '절대적 질서, 조직된 시장, 엘리트와 대중, 권력 투쟁에서 표현되는 형제애'를 거론한다. 기존 개념으로 환원해보면, '왕정' '자본주의' '대중사회'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선 '절대적 질서'에 관해서는 이 사회의 목적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며, 여기서 사회 이미지는 개개인이 모두 해야 할 역할이 있는 단일한 유기체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특히 영국에서 보존되었는데 (프랑스나 한국과 비교해볼만하다. 영국은 '무혈'인 '명예혁명'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수립이 시작되었다) , 국민국가(영국)은 사회에 대하여, 현존하는 질서에서 출발하여 실제 개개인의 요구를 이에 종속시키는 방식의 사고방식을 강력하게 존속시켰다. (갑자기 케네디가 떠오른다.) 

이에 대해 두가지 방향의 도전이 있었는데 "규정된 질서가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활동들을 추구할 권리에 의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또 경제적 개인주의의 발흥으로 더욱 결정적인 사회적 이미지가 나왔다.  

이 경제적 개인주의에서는 사회를 확립된 질서로 생각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시장'으로 생각한다. 이제는 왕이나 기존의 사회질서에서 출발하지 않고 생산과 교역활동에서 출발하게 되며, 점점 더 이러한 활동들이 다른 활동들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사회의 본질적인 목적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사회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했다. (174~175) 

후에 자본주의가 법인 조직의 자본주의 단계로 발달함에 따라 사회는 시장을 제공하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조직 자체가 본질적으로 시장 조직이 되었다. 기존질서에서 출발했던 개인이라는 관념은 본질적으로 '내 위치와 그 의무'로 구성되었으나, 시장사회에서 개인이라는 관념은 우선 책임 있는 자유로운 동인으로서, 그리고 후에는 무엇인가 팔 것을 가진 사람으로 되었다. (175) 

물론 이러한 이미지는 실제 역사에서는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상호작용하기도 했다. 조직된 시장이 절대적인 질서가 되면서 시장과 절대적 질서가 실질적으로 융합할 수도 있다. 

또 사회주의에서는 '인류의 형제애' 이미지가 실제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근본적으로 혼란스럽게 되었다. 

한편 개인의 권리의 주장에서 출발했던 개인주의는 개인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둘 권리를 더 강조했다. 모든 좋은 일은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모든 나쁜 일은 사회가 저지른다는 공식이 합리화되면서 사회적 사고에서 큰 폭으로 후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회의 이미지는 이제 내재적으로 악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대중'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절대적 질서의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풀이한 것이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중들'로서 엘리트들에 의해서 통치되고 조직되고 가르쳐며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시장의 개념을 되풀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들'은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구와 선호도의 패턴을 표현함으로써-이는 새로운 시장 법치기앋-사회의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엘리트들에게는 이것이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대중사회는 본질적으로 몰개성적이다. 필연적으로 엘리트는 개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고, 대중적 패턴의 평균적 수치와 일반화된 풍조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나와 내 가족은 현실적이고 나머지는 그냥 시스템이다. 이는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이 강화된다. 이러한 사회이미지는 사회와 인간을 분리해버렸다.  

 

4.2 

'우리가 물려받은 지배적인 사회 이미지'인 '절대적 질서, 조직된 시장, 엘리트와 대중, 권력 투쟁에서 표현되는 형제애'는 모두 사회를 정치(결정의 체제)와 경제(유지의 체제)라는 두 영역의 이해관계, 두 종류의 사고, 두 가지 해석의 사회관계로 환원시킨다. 지배 집단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권력과 대체로 가까이 연관되어 있는 이 범주를 통해서 삶의 나머지 부분들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83-184) 

윌리엄스는 이어 사회주의의 가장 큰 오류를 '스스로를 자신이 반대하는 편의 용어로 한정한다는 것, 즉 인간적 질서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제안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이 통찰에 동의한다.  

"대안적인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에너지를 충분히 생성하기 위해서는 좀더 넓은 견지에서 제안해야 한다. 이러한 연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면서도 인간적인 질서는 거의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좋은 예는 노동의 정의라는 문제이다. (...) 일과 노력의 관계는 특정한 사회 형태에 의해서 흐려지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한 일 혹은 '자발적인 사회적 목적'을 위해 한 일과 돈을 위해서 한 일을 구분한다. 이것이 단순히 임금노동을 기반으로 조직된 사회의 반영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이와 다른 사회관계라면 이에 근본적으로 도전해야 할 것이다. (...) 일과 삶의 통합,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인 사회 조직에서 문화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을 포함하는 것은 대안적인 사회 형태의 기본 조건이다. (...) '공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적인' 것, '일'뿐만 아니라 '여가'까지 실질적인 이해관계의 실체가 사회적 목적이 된다. (...) 사회사상이란 일과 정치와 재산을 그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필요성에 의해 판단하는 인간적인 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도덕적 몰락은 바로 이렇듯 사회에 대한 낡은 이미지들과 타협했던 것, 대안적인 인간적 질서의 개념을 유지하고 규명하지 못했던 것과 정확히 비례한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논의는 네그리, 하트의 "디오니소스의 노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 형태 비판과 연결될 수 있다. 

 

 

윌리엄스는 결정의 체계(정치)와 유지의 체계(경제)에 뒤이어 두가지 관계를 덧붙인다.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체계. 그리고 삶의 생성과 육성이 기초한 관계들의 복합체로서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특수한 체계로 표현된다.  

기존에 예술은 단지 경제적, 정치적 과정의 반영으로 격하되어 기생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미학이라는 분리된 영역으로 이상화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요소는 그의 인성은 물론 사회의 뿌리이다. 그것은 예술에 한정되어서도 안 되고, 결정과 유지의 시스템에서 배제되어서도 안된다. 

결국 윌리엄스의 목표는 "사회에 관한 진실은 늘 예외적으로 복잡한 결정 체계, 의사소통과 학습체계, 그리고 유지의 체계와 생성, 양육 체계 사이의 실질적인 관계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현실적으로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 체계들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을 지어주며, 각 체계의 역사적 가변성을 보여주고, 그들이 작동하고 경험되는 현실적인 조직의 역사적 가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기존의 '경제결정론'등은 '경제'라는 체계 또는 '정치'라는 체계가 다른 체계를 규정하거나, '최종심급'이라는 개념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해왔다면, 윌리엄스는 이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대안 세계를 '상상'하고 건설하는데 오류에 빠지게 했다는 것. 

감동적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역시, 그 '보여줌'을 제시해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사회를 분석하는 이러한 설명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바로 그것들이 성장의 용어이고, 전에도 그러했다는 사실이다. 정치, 경제, 미학, 심리학은 늘 부분적으로는 한때 경험된 상황에서 학습된 규칙의 체계이며, 그것이 단지 수정되지 않고 영속화된 상태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제각각 새로운 상황을 탐색하고 반응하며 그것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려는 이해에 도달하고자 하는 창조적인 노력이다. 우리가 인간의 조직을 연구하는 데 연관성뿐만 아니라 가변성도 강조해왔다면, 바로 변화의 본질과 근원이라는 이 중대한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191) 

4.3 

윌리엄스는 역사는 대부분 정복에 의한 변화이지만, 이것이 결국 정치, 즉 결정의 체계가 다른 체계들을 장악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가지 다양한 결과를 낯는다고 한다. 결정의 체계는 현실 속의 물질적, 관습적 환경 속에서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변화는 일반적 변화의 전체적인 복합체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 

이러한 주장은 옳은 주장이며, 전 '사회'변화를 어떤 체계(정치나 경제)가 아닌 여러가지 체계들의 상호작용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의 발달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때, 그렇다면 증기기관을 가능케한 경제적 조건이나, 정치적 조건만을 따지고 여기서부터 다른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증기기관이 가능케 한 창조적 학습의 배경 등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지적에도 유의미하다. 

"자본주의사회들도 비교할 만한 각각의 발전 단계들에 따라 여러 측면에서 서로 매우 다른 사회들이며, 이 차이들에 대해서 가장 세련된 정치 경제학적 분석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다른 체계인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체계. 그리고 삶의 생성과 육성이 기초한 관계들의 복합체로서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특수한 체계"를 특권화시키지도 않는데,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현실을 결정하고 유지하는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더러는 결정되기도 한다"는 정도의 주장이다. 또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관습적인 의미와 가치들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와 가치들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창조자를 변화의 열쇠로 분리해내는 것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결정론에 사로잡혀 그들을 간과하느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이제 '전체'를 연구하는 것의 범위나 의의가 어느정도 잡히는 것 같다. 각 체계들의 상호작용과, 그 각 체계들을 특권화하여 다른 체계의 중요성을 억압하지 않는 것. 이를 통해 각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그런데 앞서 인용했던 부분에서 '자본주의사회들'도 각기 다르다는 것도, 윌리엄스식으로 반박해보자면, 결국 이는 세계체제 속에서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하나의 '국민국가사회'라는 것도 다른 '국민국가사회'와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교류하며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즉 전체라면, 윌러스틴 같은 시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은 아닌가. (*이 할아버지는 정말 짱이기는 한데, 언제 완결지으시려나... "제국"출간 이후로 또 이와 싸우시느라고 못 쓰고 계신 것인지... 역시 근대로 올수록 어렵기는 할터이지만, 이제는 완전 맑스다. 당신도 이제 80이라.. 이거 결국 내가 읽고 싶은 것은 20세기나 21세기인데;; ) 뒤에 목차를 보면 일국 영국을 대상으로 논의를 펴는데, 이 또한 '전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다시 전체로서의 조직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조직은 존재하기도 하고 갱신되기도 한다는 뜻에서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체제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학습이 바꾸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바꾸고 바뀔 뿐이다." (195) 

이러한 언명은 bold하다. 이 또한 논증되어야 하는 부분인데, (그 후의 수많은 이데올로기론이나 특히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이나 '구조'등을 생각해보자. 이제 레비스트로스는 안 읽는다지만, 문화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보고 논의한 대표적인 논자가 아닌가. 얼마전에 레비스트로스 100세 생일이라고 해서 깜짝놀랐다. 생일축하!) 그냥 막 쓴다. 이 또한 윌리엄스 식으로 논의할 때, '사람'도 '요소'의 일부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왜 '사람'이라는 것에 특권적 위치를 부여해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 이런 전제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정치적 변화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개방적인 사회와, 실제의 기술과 커뮤니케이션에서 변화의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자유롭게 협조하는 개인들을 내세우는 것이다." 

사실 이 전제부터 출발한다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현실적인 변화란 실제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점점 더 확대되고 강력해지는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수단들을 건설하는 변화였다. (...) 우리는 점점 더 새로운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는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라는 단순한 사실과 그에 따른 확장된 문화 경험에 의한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1부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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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3장 개인과 사회'를 요약하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이를 '살아 있는 과정의 복합체'로 여겨야하며, '인간 조직의 연속적인 과정 자체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연속적인 행위와 적응이며, 이러한 행위와 적응에서 핵심적인 것은 계속되는 변이와 그 변이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학습과 의사소통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선험적으로 파악되는 내용을 길게 써 놓았지만, 이러한 결론 즉 생성하는 주체, 또는 들뢰즈적 의미로 '욕망기계'와 같은 개념을 선취하고 있다고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논의가 너무 풀어해쳐있어서, 왜 이런 식으로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1961년이라는 시간은, 이미 라캉이 활동한지 오래인 때이고, 르페브르가 '일상생활 비판'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들과 비교해보면, 이 논의의 나이브함이랄까, 지적 협소함을 느낄 수 있는데, 뭐 물론 중요한 것은 아직 본론도 읽기 전이라는 것 -_-; 아니면 프랑스 사람들이 항상 주장하는 '영국 사상계의 독자성' 나쁘게 말하면 '폐쇄성/느림'을 보여주는 사례일까. 

 

그러니까, 윌리엄스를 읽는다는 것은, 비슷한 시기 대륙에서 진행되는 논의들과 영국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지체(?)내지는 따로 독특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 

3.1 

논의를 순서대로 조금 따라가보면, 우선 '정신 속에서 학습되고 창조된 패턴과, 관계, 관습, 제도들 속에서 소통되고 작용하게 된 패턴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 진정한 상호 작용의 원칙'으로서 '문화'를 규정한다.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다시 논의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개인'이란 어떤 의미였는지, 어떻게 '묘사'되었는지를 중세사상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살펴본다. 

중세에는 '한 인간이 그 사회적 질서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방식에 중점'을 둔다면, 이제 개신교로 넘어가면서, '전체적 질서에서 관계들의 복잡한 구조'를 통해 이해되던 운명이 '개인과 그의 신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된다. 

즉 '인간-교회-신에서 인간-신으로의 변화는 '개인'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새로운 의미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다. 또 자본주의 성장에 따라 이동성이 증가하고, 최소한 일부의사람들이 자기 지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서, 개인의 사회적 역할과 분리할 수 있는 의미의 개인이 된다는 생각도 힘을 얻는다. 이제 고정된 질서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활동을 시작하고 특정한 방향을 택하는가가 문제이다. 이 때문에 '나는 무엇인가'는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내 노력으로 무엇이 되었는가'하는 정도까지 확장해서 다시 정의된다. "즉 본질적으로 개인의 개념은 그가 이제까지 통상적으로 규정된 관계들의 복합체에서 추상해낸 개념이다."(133) 

사회도 마찬가지로, 홉스에서 공리주의자들에 이르는 체계에서는 발가벗은 존재로서의 인간을 출발로 사회는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파악했다. 대안적인 정통(루소, 헤겔)은 사회를 이상화하였다. 이러한 '개인'과 '사회'의 매개적인 용어로서 '공동체'나 '연관'등의 용어를 덧붙여, '개인'과 '사회'라는 거대한 추상적 개념들이 세부적으로 작용하는 개인 대 개인의 국지적인 관계들을 묘사한다. 이 중 특수한 용어로 '계급'이 있다.  

3.2

이러한 논의 후에 프로이트와 에릭 프롬을 논의하면서, 프로이트는 '발가벗은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로서 '개인'과 '사회'를 이론적으로 분리하여 한계를 보였다고 하고 프롬은 '내밀한 개인적 관계들과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전체'를 연결시킬 가능성을 탐구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결국 개인의 '잠재력'과 역사가 상호작용하면서 자의식이 성장한다고 결론짓는다. 즉 

"자율적인' 자아는 그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과정에서 성장하지만, 획득된 자율성의 정도에 따라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다음 단계, 즉 개인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고 현재도 주고 있는 사회적 과정을 변화시키거나 수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단계가 가능해진다." (143) 

이를 통해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분석이, '개인'은 추상적 설명을 실질적인 성장과정으로 되돌려놓는다면,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하나의 추상을 현실적인 관계들의 실제 복합체로 돌려놓는다. (143) 

사실, 맨 처음부터 지적했던, '문화', '개인', '사회'라는 개념들의 추상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전장에서 윌리엄스는 고군분투한다. 윌리엄스도 언급한 바 '계급'이나 (당시에 이미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도 출간된지 오래인데, 왜 루카치와 직접적으로 대결하려 하지 않는가. 계급의식과 현실의 상호관계, 그 관계의 변증법적 발전으로서의 의식의 발전과 현실의 지양 등등의 논의와 대결하지 않기 때문에, 또는 윌리엄스는 선행 논의와는 무엇과도 대결하려고 하지 않는듯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서 윌리엄스가 튀어나온 것인지 알기 어렵다. 윌리엄스가 말하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만큼, 헤겔이나 루카치가 골몰한 주제도 없을 터인데... ) 여타 선재한 개념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 아쉽다. 흥미로운 것은 각주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가끔 폴드만 같은 논의를 읽어보면,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왜 비판만 하다 끝나는 건지, 자기 이야기가 있기는 한건지 골똘히 들여다보고 생각해봐야 알겠지만, 이 윌리엄스는 모두 다 자기 이야기다. 플라톤도 아니고, 이건 뭐;; (플라톤도 읽다보면 간혹은 당대 논의들을 끌어온 다음에 매우 심하게 난도질하고 깐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당연한 논의를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개념은 없다. 

"한 사회 내에서 '집단들'을 의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진전이다. 물론 단지 추상의 근거를 이동하여 이번에는 집단을 단일한 절대자로 만들어버릴 가능성도 있다. 가장 단순한 집단에서도 마치 '사회'에서처럼 협동관계뿐만 아니라 긴장과 갈등의 관계가 존재한다. (...) 어떤 집단은 척도의 편리한 표식이 될수도 있으나 그것은 표식일 뿐이며, 전체 척도의 연속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근본을 이룬다." (144) 

그렇다면 논의의 단위(계급과도 같은)를 설정하거나, 아니면 접속의 필수 또는 관계맺음 즉 운동하는 과정을 내포하는 개념도구(들뢰즈의 '기계'와도 같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논의 후에 그 개념으로 돌아오는 것은 참 가혹하다. 그렇다면 독자는 윌리엄스를 읽으면서, '개인', '사회', '문화'라는 말이 나올 때, 이것이 단어로서 존재하지만, 추상일 뿐이며, 그 안의 다층적인 관계망을 갖고 있는 '생성하는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3
이러한 논의 후, 윌리엄스는 '개인과 사회'에 대해 생각할 때 단순히 동조-비동조가 아니라 여러가지 어휘를 늘려보자고 하면서 구성원(member), 신민, 하인과 같은 것을 동조의 양식으로, 반역자, 망명자, 부랑자를 비동조의 양식으로 명명하고 각각을 논의한다. 하지만 이는 어휘만 늘리고 '개인과 사회'를 묘사하는 몇가지 방식만을 추가했을 뿐이지, '동조-비동조'라는 단순성을 질적으로는 극복한게 아니지 않을까. 여하튼 분류방식을 보면 이렇다. 

구성원 -자신을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그가 속한 사회의 한 개인으로서 의식하고 있고, 개인의 입장에서 사회를 자신과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자연스러운 수단으로 본다는 것이 구성원 자격의 본질 

신민과 하인 -개인적으로는 수용하지 않는 권위에 복종하고, 개인적 의미가 전혀 없는 사회적 기능들을 수행하며, 그의 실질적인 욕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 중 신민은 -자신을 아무리 어기더라도 속한 사회의 삶의 방식과 그 안에서 자신에게 지정된 위치를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자신을 유지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즉 생존하기 위해서 사회에 동조해야 한다. 

하인- 압력이 신민보다는 덜 가혹하지만, 압력에는 저항할 수 없다. 신민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나 하인에게는 선택의 환상이 주어지며, 자신을 규정한 그 위치의 삶의 방식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도록 유도된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환각일 뿐인데, 그것은 신민과 마찬가지로 거절할 경우 삶을 유지할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환상으로 인해 선택권이 실질적인 것이라는 듯, 자신과 사회를 동일시 할 수 있다. 

반역자 -어떤 사회적 목적에 대해 아주 강렬하게 개인적 헌신을 하고, 그의 개인적인 존재와 특정한 사회적 노력의 패턴을 적극적으로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구성원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가 속한 사회의 방식이 아니라, 사회적 형식에 반발함으로써 또다른 사회적 형식을 확립하려고 한다. 

망명자 -그가 속한 사회의 생활 방식을 거부한다는 면에서 반역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싸우는 대신 떠난다. 

부랑자 - 자신의 사회의 목적들이 무의미하며 가치관도 부적절하다고 여기지만, 망명자의 자존심, 원칙을 고수하는 면이 결여되어 있다. 딱히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기를 원한다. 

이러한 분류 후에 윌리엄스는 "우리가 단지 동조냐 비동조냐 하는 난국에서 벗어나려면 구성원, 신민, 하인, 혹은 반역자, 망명자, 부랑자 같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설명들과 같이 이들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설명들은 단지 특정한 관계의 형식들을 분석할 뿐이다. 이러한 것들이 다양한 적응의 형식이 되는 단일한 '사회'는 없다. 실로 '사회' 자체도 그에 구현된 특정한 관계에 따라 마찬가지의 다양성을 띈다. (...) 구성원과 공동체, 하인과 기존 제도, 신민과 강요된 체제, 반역자와 독재, 망명자와 잃어버린 사회, 부랑자와 무의미한 사회 등은 모두 활동적인 조직과 작용과 상호작용의 형식들이다. 더욱이 실제 사회에서는 여기 설명된 관계들이 거의 항상 다른 집단과 척도들의 존재 때문에 복잡해진다." (156)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조직의 한 형식이지 단일한 실체가 아니기 떄문에 이 조직의 형식들 내에서 앞서 설명한 형식들이 더 결정적일 수는 있어도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좀더 넓은 영역의 현실적 관계들의 복잡한 구현체가 될 것이다." (157)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왜 윌리엄스가 맑스나 루카치 등의 개념과 싸우지 않는가이다. 그는 정말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관계를 매개하는 '문화'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를 부분에서부터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봐야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소크라테스 처럼 혼자 비상하여 내려다보려는 자세는 무얼까. 그러면서도 이 개념들이 추상적이고 "실제로는 좀더 넓은 영역의 현실적 관계들의 복잡한 구현체가 될 것이다"로 계속 돌아오고 있다. 멀리 위로 올라가서 전체를 보면, 전체를 볼 수 있지만, 거무죽죽하게 불빛들만 보이는 것은 아닌가. 전체를 보려고 하면서 세부도 그리려고 하면 이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전체를 보려고 하면, 그리는 것은 전체의 모양새일 뿐이다. 본론에서, 윌리엄스는 뭘 하려고 이런 1부를 쓰고 있는 것일까...  (같은 영국지성으로 뉴튼이 떠오른다. "내가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선 난장이였기 때문"인가 뭐란가... ) 

3.4

"경험을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용어들은 본질적으로 활동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새로운 설명은 다소 신속하게 하나의 대상으로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면 경험을 분명하게 하기도, 경험에 충실하기도 매우 어려워진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설명, 제공된 모든 해석들이 성장하는 용어라는 점이다." (157) 

3.5 

이제 맨처음 요약했듯이,'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이를 '살아 있는 과정의 복합체'로 여겨야하며, '인간 조직의 연속적인 과정 자체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연속적인 행위와 적응이며, 이러한 행위와 적응에서 핵심적인 것은 계속되는 변이와 그 변이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학습과 의사소통의 과정'이라는 논의가 나온다. 

'개인'을 연구하든, '사회'를 연구하든, 결국은 '이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개인을 '육체, 정신, 영혼으로 분리하고 감정, 의지, 사고,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초자아 이드로 분리하고 사회를 집단, 계급, 협회 등등으로 분리하지만, 이들 중 어떤 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역시 그들 간의 관계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실체를 따로 떼어서 서술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이를 규정하고 나면 그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실체는 그 조직이 내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분리해낼 수 없는 관계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164)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인데.. 근대적 기계주의적 세계관에 반해서, 유기체적 세계관의 내용이다. 그래도 끝내, 윌리엄스는 아직도 자신의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체에 대한 욕망은 선적 직관말고, 어떻게 논의할 것인가. 가령 이것이 한 조직과 한 조직의 '관계'라고 할지라도, 그 '조직'이라는 것 또한 분류되고 그 '조직 내'의 관계가 또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알고 싶은데, 계속 윌리엄스는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당연시된 이야기를 계속 서술한다. 

"인간 조직의 연속적인 과정 자체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연속적인 행위와 적응이며, 이러한 행위와 적응에서 핵심적인 것은 계속되는 변이와 그 변이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학습과 의사소통의 과정이다. 우리는 특이한 개인에게 작용하는 사회나 집단에 대해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특이한 개인들이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 자신을 형성해나갈 조직을 창조하고 필요한 경우 확대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개인이 되지만, 개인은 특수한 역사로 표현되는 특수한 유전을 통해서 이루어진 독특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옳다." (165) 

이러한 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로 나아가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학습하고 창조하며 소통하는 존재라면,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유일한 사회 조직은 참여 민주주의다. 참여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 모두는 독특한 개인으로서 학습하고 소통하며 통제한다."
  
"우리가 삶의 과정 전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조직들 사이의 연속성을 인식해야 한다. 어떤 고정된 상태들을 추상해내고 거기에서 논의를 하는 것이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부적절하다. 새로운 개념들은 늘 어려운 것이지만,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거기에서부터 적절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세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듯 하다. (..) 그러한 접근법은 전체적인 과정의 패턴과 관계의 연구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문화의 분석이라고 규정했던 것이기도 하다. 바로 창조와 소통과 제도를 만드는 실제의 작업 속에 개인적-사회적 성장의 공통된 과정이 있는 것이다." (167)
 

마지막으로 이렇게 끝낸다. 그러니까 새로운 개념을 만들라니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전체적인 과정의 패턴과 관계의 연구'라는 의미에서 '문화의 분석'이라고 하면, 결국 1장에서 규정한 것과 별반 다를바 없이 되돌아오게 되었다.... 맨 마지막 줄만 음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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