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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범의 파워 클래식 1 -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신 클래식 강의
조윤범 지음 / 살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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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격과 기발함으로 무장한 음악계의 괴물', '폭발적인 반응' '뛰어난 글솜씨'라는 수식어 때문인지, 내가 국문학 전공자라 읽은 글들의 '글솜씨'나 '괴물'같은 정도가 높아서 그런지, 글은 그냥저냥하다.  

그래도 별 세개라는 범작 수준이 아니라 별 네개를 주게 된 것은,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음악가들의 삶이 새로웠다기 보다는, 이 책을 통해 콰르텟엑스의 음악에, 콰르텟엑스가 재해석해낸 클래식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이들의 음악은 단연 별 다섯개이기 때문이다. 

콰르텟엑스의 앨범은 필청, 그 후에 이 책을 봐도 좋다. 이 책을 읽으며 과도한 카피에 비해 실망했다면, 그 후에 앨범을 들어볼 것.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전에 강유원 선생이 공개적으로 내 글솜씨가 형편없다고 비판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석사논문 쓴 이후로는 서평에 공을 안 들이고 드라이하게 쓴다. 쩝; 2006년 이전의 서평들은 하나의 '글'로 썼다면, 그 이후는 그냥 끄적이고 말뿐. 그래도 적어둔다는 일념하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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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09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2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2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East of Eden (Paperback, Deckle Edge) - Steinbeck Centennial Edition
존 스타인벡 지음 / Penguin U.S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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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서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스타인백의 원서를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읽기 쉽다.

이 소설은 3대에 걸친 가족사 소설이며, 자전적 소설이라는 장치를 곳곳에 삽입한 (필립 르죈의 의미에서)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소설 내에서 '존 스타인백'의 이야기는 간혹 'I'로 등장할 뿐 서사에서 중요하게 기능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사실'이라는 뉘앙스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이 소설의 중심 키워드는 '자유의지'이다. 기독교 성경을 미국적으로 재해석했다는 널리 알려진 해석은 인간에게는 왜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유일하다라는 기독교적 언명을 미국이라는 배경하에서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아담으로 하여금 이브에게 유혹당하여 에덴동산에서 좇아내게 만들었을까? 이러한 질문은 소설에서 되풀이된다.

소설 속 Cathy는 태어날 때부터 '양심'이라는 것이 없는 괴물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순수한 악의 표상인 그녀는 아담을 이용하기 위해 아담과 결혼하고 그의 동생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마침내 아담에게 총을 쏘고 달아나서 포주가 된다. 이브-뱀-사탄이라는 연쇄!

아담은 카렌을 한없이 사랑했기에 절망의 늪에 빠져들지만, 지혜로운 두 남자, 샘과 리(중국인 하인)에 의해 다시금 의지를 회복하게 된다. 이 와중에 중요한 것이 성경의 한 구절이다. Timshel! 이는 'thou mayest' 라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신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 자유의지를 부여한 것.

인간은 물론 환경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자신의 유전자에 의해 상당부분 결정된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말 속에, '주체'라는 단어에는 '선택'의 책임이 있다. 즉, 다시금 떠오른 '주체'의 문제이다. 철학, 사회학이 발달될 수록,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고, 이는 즉 인간'현상'을 외부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현상과 관찰이라는 이분법은, 결국 인간을, 인간 행위를 남김없이 설명하려는 시도이고, 설명은 궁극적으로 모든 조건을 부여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과학'을 지향한다. 한 인간의 유전자, 성장배경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면,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과학'의 꿈이 아닌가?

그러나 그 와중에, 연구자-인간에 의해 결국 '인간'은 '현상'으로 떨어지고 만다. 구조속의 효과로 환원되어, 원자들의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예측되고 분석될 수 있는 존재로 된다. (*그렇지만 주지하듯이, 원자의 정확한 위치를 현대 과학은 '알 수 없음'을 그 '가능성'만 추정할 수 있음을 말한다. 원자를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빛, 즉 광자의 개입이 있어야 하는데, 연구자가 광자를 원자에게 쏘아보내서 이의 반사된 것을 가지고 원자의 위치를 추정하려고 하면, 이미 그 원자는 광자와의 충돌 때문에 그 위치에 있지 않은 것.. 이는 '연구자'라는 개입이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에 반하는 것, 다시금 '주체'를 말하고 '자유'를 의미화하는 작업들. 그러한 '자유' 때문에 인간은 위대하다는 언명. 스타인백의 소설은 그러한 '인간주의'의 한 극점을 감동적이고도 아름다운 소설로 재구성하였다.

그러나 기실, 나는 이러한 인간주의에 대해 한편으로는 감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발 물러나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러한 '인간주의'의 효과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 그가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데에 복무할 수 있다. 노숙자나 비정규직 종사들의 문제를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속삭이듯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렇게 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것을 '혁명적 주체성'의 문제로, 자발상을 넘어선 의식성의 문제로, (레닌 식으로) 전유할 수도 있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이란 무엇일까,를 묻는 나는 무엇일까. 인간이란 과연 유적존재일까. '인간'이라는 것은 있을까? 스타인백은 심지어 Cathy마저도 인간임을 보여준다. 모두가 <인간>이라고, 모두는 자유의지의 선택가능성이 있다고. 그래,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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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원 독서법과 학문의 9단계
원동연 지음 / 김영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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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독서법과 공부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은, 너무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을 집어들고도 별반 기대하지 않았는데, 중고등학생들에게 꽤나 적절하고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고 있다.

특히 글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읽는 법을 체계적으로 잘 가르치고 있어서, 종합적인 한국어 읽기-쓰기 교과서로 손색이 없다. 이러저런 논술 교양 '글쓰기' 책을 살펴보았지만, 이 책처럼, 읽기, 쓰기, 사고방식 까지 종합적이고 기본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는 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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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ker16 2007-03-14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동연 박사는 DY 학습법으로 유명하신 분이지? 기독교 내에서도 유명한 분이지..흠흠..괜히 이런 것 읽어보고 싶다.

기인 2007-03-15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ㅋ 약간 사기같은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런 유형의 책들 중에는 최고로 효용성 있는 것 같아요 ^^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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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36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한국어 번역은 그 후 '회갑'을 맞은 2000년에 출간. 완역처럼 보이지만 완역은 아니고 이 책이 쓰여진 당시의 소련에 관한 한 장은 빠져있다. 역자는 이것이 '오늘날에 비추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번역에서 제외했다'라고 한다.

참고문헌을 보면 맑스, 레닌의 저서들이 눈에 띈다. 특히 참고문헌 375면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역사학도들에게 주는 자료의 보고'라고 하면서 레닌 선집을 꼽는다. 레닌 사후 10년, 스탈린 집권시기인 1936년에 쓰였는데,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될 무렵이다. 스탈린 관련 내용은 참고문헌에 업고, 트로츠키의 러시아혁명사에 대해서는 간략히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생생하게 묘사한 드라마'라고만 나와있다.

1936년에 휴버먼은 소련에 대해 긍정적 시선으로 평가했을 것이, 이 책 전체적 논조로 보아 짐작할 수 있고, 이것이 '오늘날에 비추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번역에서 제외'한 것은, 아마 이 책이 남한에서 대중 또는 고등학생용 교양서로 읽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판단된다.

이런 점을 제외하고는, 번역은 흠 잡을 데 없이 잘 읽히고, 내용도 술술 잘 넘어간다. 실제 외국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많이 읽는다고 하니, '자본주의'라는 것을 역사화하고 상대화하여 파악하려는 고등학생들은 꼭 읽어볼 만 하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후 70년 동안, 양극체제의 종언 이후 이른바 '포스트모던'과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어떻게 자본주의가 변화되었는지를 공부해야 오늘날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가 가능해 질 것이다.

이 책은 중세 봉건제에 대한 서술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이것이 붕괴되고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가기 시작하는지를 알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 이를 간명하게 알고 싶은 이들이라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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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짐승 2007-03-22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형> 이 책... 1학년들하고 세미나 할 때 애용되는 책이죠. 소련에 관한 장이 빠진 건 저도 몰랐네요... 최근에 경제사를 배우다보니 설명이 너무 단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처음에 배울 때는 최고의 교재 ㅎㅎ

기인 2007-03-22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ㅎㅎ 고딩한테 읽히기도 괜찮은 것 같아요 :)
 
나는 아프리카로 간다
야마모토 토시하루 지음, 문종현 옮김 / 달과소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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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고 저자의 사유를 복원한다고 이를 평가한다기 보다는, 그 사유 속 혹은 그 맥락에 대해 생각해본 흔적이다.

이 책의 지은이, 야마모토 토시하루는 국경없는의사회(이하 MSF)에 소속되어 시에라리온이라는 세계 최악의 의료상황을 겪고 있는 나라에서 6개월 동안 국제의료봉사활동을 하다가 왔다. 이에 대한 기록이 이 책이다.

이런 말만 들으면 남한사람들은 어떠한 생각이 들까?

일본인. 의사. 국경없는 의사회. 국제의료봉사활동.

그렇다. 오만함과 자기만족. 어짜피 자기만족을 위해서, '6개월'동안 한 것 아니냐고.

이것을 야마모토 토시하루는 경계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는다. 이것이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없더라도 현지인들이 의료시스템을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도록 현지인 교육과 시스템 확립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또한 '외부'에서 일방적 계몽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문화, 언어, 역사를 배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하면서 그는 '서구' 의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음을, 그들이 무오류성과 폭력적 계몽(이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을 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 또한 한반도와 동남아시아에 못된 짓을 저질렀고 그것이 폭력적 계몽과 무관하지 않음을 내비친다. 이 부분은 짧게 서술된 것이지만, '일본적 정체성' 또한 완전한 계몽적 주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계몽적 주체이자 객체로서 동요하는 것임을 보인다. 그들 또한 '서구'에 의해 계몽되었던 객체이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를 계몽시키려 했던 주체이다. (적어도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그러하다.)

이에 대해 무반성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현 일본의 우경화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랑스런 일본'은 군국주의 일본과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그 '군국주의'가 자랑스럽다는 것. 히틀러, 무솔리니와 동맹을 맺고 '자랑스럽게' 미국 자본주의와 싸웠다는 것. 그들은 다만 '힘이 약해서' 2차 대전에서 패전했다. 그런데, 그 '대일본제국', '대아시아주의'를 내세운 일본이라는 주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반성은 일본 학계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를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거듭했고, 이는 일본 국가가 스스로 자신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표상하는 일본의 '평화 헌법'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 헌법 개정을 하고자 하는 것, 이는 자기반성적 주체에서, 다시금 폭력적 (계몽의) 주체로 정립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과오' 또는 서구의 과오는 다시금 묻히고 만다. 그만큼 계몽이라는 것은 매혹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계몽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서구 근대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음과 이는 직결된다.

그래서 토시하루(이하 토시)는 서구 근대와 아프리카라는 특수를 단지 보편과 특수라는 또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대립항으로 설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근대를 포기한다면, 서구 근대 의학(근대의 힘을 가장 실질적으로 비근대인에게 보여주는!)을 매개로 비근대에 개입하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근대로 비근대에 개입하는 것. 그것이 국제의료봉사활동의 행위이다.

인도주의. 계몽. 서구의학. '우리'가 국제의료봉사활동, 또는 NGO들의 활동에 동의하는 이유는 '인도주의'에 동의하기 때문이고 이를 우리는 '보편적 가치'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서구 근대에 의해 정립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일 터. 그렇다면 문제는, 아프리카의 특수성을 존중하면서도 어떻게 우리는 개입할 수 있는가이다.

우선은 첫째, 현 아프리카의 내전과 온난화로 인한 사막화 등은 분명 역사적으로 그 책임이 서구에 있다.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아프리카 사람들의 행위를 '정지'시키고 개입한 후에 빠져나가서 '복귀'시키는 것으로?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병주고 약주고이기는 하지만, 개입 시점부터, 아프리카인들은 동화되며 '근대'라는 것의 막강한 힘에 의해 그들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미국 제국주의의 세련된 형태를 보여주는 '스타트랙'에서는 새로운 문명을 만나도 절대로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아프리카를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하면서도, 그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주체라고 하면 그들 스스로 판단하고 행위하며, 이에 대해 일체의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인 중 일부가 또는 그들의 '정부'가 개입을 희망한다고 했을 때도 문제는 따른다. 우선은 그들이 대표할 수 있는가의 문제. 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대표한다는 것도 근대적인 인식과 제도가 아닌지의 문제. 그리고 개입 자체가 막대한 영향을 미쳐서, 결국에는 아프리카 자체가 주체가 아니라 종속된 객체로, 그야말로 '제3세계'로만 기능하게 될 것인지의 문제.

이런 복잡하고,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이론적으로 탈식민주의적, 탈근대적 문제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버마스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들.

계몽하지 않으며 개입할 수 있는가. 계몽하지 않으며 대화할 수 있는가. 계몽은 결국 주체들간의 대화가 아니라, 진리를 가진 주체와 객체 사이의 동일화로 끝나는, 차이를 드러내며 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지우는 행위. '보편'으로의 행진, 하나인 '진리'로의 변증법. 그러나 그 '진리'를 계몽하는 주체 바깥에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에 가장 핵심적 문제가 있다. 보편성은, '지금-여기'라는 우리에 의해 합의된 '보편성'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에 대해 토시하루는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않고, 이런 문제를 명시화하거나 사유하지 않는다. 그는 의사이다. 그럼에도 이를 개념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최대한 '덜 개입'하며 근대의료만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가 최대한 '그들'의 문화, 언어, 역사를 배우고자 하며, 그들을 존중하고자 하면서도, 항상 혹시 내 의견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반성하는 것. 그것이 아직, 우리 '근대인'들이 아는, 또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터이다.

여성 할례, 태아가 태어나자 마자 탯줄을 땅에 비벼서 여러 질병의 전염 가능성을 높이는 것 등에 대해 토시는 '그것은 틀렸어'라고 '그것을 고쳐'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설명을 한다. 이것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안 하는 것이 좋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판단을 그들에게 '하게끔 한다'.

물론 이는 형식적이다. 근대의학의 '힘'을 갖고 이를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준다는 것. 결국에는 설득, 계몽이다. 그럼에도 우리 근대인들은 이것 이상으로, '동일화'로서의 이성, '하나인 이성'이 아닌 것으로 어떻게 아프리카에 개입할지 알지 못한다.

ps. 이 책을 추천해주신 가을산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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