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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프리카로 간다
야마모토 토시하루 지음, 문종현 옮김 / 달과소 / 2005년 7월
평점 :
이 글은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고 저자의 사유를 복원한다고 이를 평가한다기 보다는, 그 사유 속 혹은 그 맥락에 대해 생각해본 흔적이다.
이 책의 지은이, 야마모토 토시하루는 국경없는의사회(이하 MSF)에 소속되어 시에라리온이라는 세계 최악의 의료상황을 겪고 있는 나라에서 6개월 동안 국제의료봉사활동을 하다가 왔다. 이에 대한 기록이 이 책이다.
이런 말만 들으면 남한사람들은 어떠한 생각이 들까?
일본인. 의사. 국경없는 의사회. 국제의료봉사활동.
그렇다. 오만함과 자기만족. 어짜피 자기만족을 위해서, '6개월'동안 한 것 아니냐고.
이것을 야마모토 토시하루는 경계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는다. 이것이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없더라도 현지인들이 의료시스템을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도록 현지인 교육과 시스템 확립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또한 '외부'에서 일방적 계몽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문화, 언어, 역사를 배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하면서 그는 '서구' 의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음을, 그들이 무오류성과 폭력적 계몽(이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을 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 또한 한반도와 동남아시아에 못된 짓을 저질렀고 그것이 폭력적 계몽과 무관하지 않음을 내비친다. 이 부분은 짧게 서술된 것이지만, '일본적 정체성' 또한 완전한 계몽적 주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계몽적 주체이자 객체로서 동요하는 것임을 보인다. 그들 또한 '서구'에 의해 계몽되었던 객체이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를 계몽시키려 했던 주체이다. (적어도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그러하다.)
이에 대해 무반성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현 일본의 우경화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랑스런 일본'은 군국주의 일본과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그 '군국주의'가 자랑스럽다는 것. 히틀러, 무솔리니와 동맹을 맺고 '자랑스럽게' 미국 자본주의와 싸웠다는 것. 그들은 다만 '힘이 약해서' 2차 대전에서 패전했다. 그런데, 그 '대일본제국', '대아시아주의'를 내세운 일본이라는 주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반성은 일본 학계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를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거듭했고, 이는 일본 국가가 스스로 자신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표상하는 일본의 '평화 헌법'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 헌법 개정을 하고자 하는 것, 이는 자기반성적 주체에서, 다시금 폭력적 (계몽의) 주체로 정립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과오' 또는 서구의 과오는 다시금 묻히고 만다. 그만큼 계몽이라는 것은 매혹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계몽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서구 근대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음과 이는 직결된다.
그래서 토시하루(이하 토시)는 서구 근대와 아프리카라는 특수를 단지 보편과 특수라는 또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대립항으로 설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근대를 포기한다면, 서구 근대 의학(근대의 힘을 가장 실질적으로 비근대인에게 보여주는!)을 매개로 비근대에 개입하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근대로 비근대에 개입하는 것. 그것이 국제의료봉사활동의 행위이다.
인도주의. 계몽. 서구의학. '우리'가 국제의료봉사활동, 또는 NGO들의 활동에 동의하는 이유는 '인도주의'에 동의하기 때문이고 이를 우리는 '보편적 가치'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서구 근대에 의해 정립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일 터. 그렇다면 문제는, 아프리카의 특수성을 존중하면서도 어떻게 우리는 개입할 수 있는가이다.
우선은 첫째, 현 아프리카의 내전과 온난화로 인한 사막화 등은 분명 역사적으로 그 책임이 서구에 있다.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아프리카 사람들의 행위를 '정지'시키고 개입한 후에 빠져나가서 '복귀'시키는 것으로?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병주고 약주고이기는 하지만, 개입 시점부터, 아프리카인들은 동화되며 '근대'라는 것의 막강한 힘에 의해 그들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미국 제국주의의 세련된 형태를 보여주는 '스타트랙'에서는 새로운 문명을 만나도 절대로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아프리카를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하면서도, 그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주체라고 하면 그들 스스로 판단하고 행위하며, 이에 대해 일체의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인 중 일부가 또는 그들의 '정부'가 개입을 희망한다고 했을 때도 문제는 따른다. 우선은 그들이 대표할 수 있는가의 문제. 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대표한다는 것도 근대적인 인식과 제도가 아닌지의 문제. 그리고 개입 자체가 막대한 영향을 미쳐서, 결국에는 아프리카 자체가 주체가 아니라 종속된 객체로, 그야말로 '제3세계'로만 기능하게 될 것인지의 문제.
이런 복잡하고,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이론적으로 탈식민주의적, 탈근대적 문제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버마스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들.
계몽하지 않으며 개입할 수 있는가. 계몽하지 않으며 대화할 수 있는가. 계몽은 결국 주체들간의 대화가 아니라, 진리를 가진 주체와 객체 사이의 동일화로 끝나는, 차이를 드러내며 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지우는 행위. '보편'으로의 행진, 하나인 '진리'로의 변증법. 그러나 그 '진리'를 계몽하는 주체 바깥에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에 가장 핵심적 문제가 있다. 보편성은, '지금-여기'라는 우리에 의해 합의된 '보편성'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에 대해 토시하루는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않고, 이런 문제를 명시화하거나 사유하지 않는다. 그는 의사이다. 그럼에도 이를 개념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최대한 '덜 개입'하며 근대의료만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가 최대한 '그들'의 문화, 언어, 역사를 배우고자 하며, 그들을 존중하고자 하면서도, 항상 혹시 내 의견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반성하는 것. 그것이 아직, 우리 '근대인'들이 아는, 또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터이다.
여성 할례, 태아가 태어나자 마자 탯줄을 땅에 비벼서 여러 질병의 전염 가능성을 높이는 것 등에 대해 토시는 '그것은 틀렸어'라고 '그것을 고쳐'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설명을 한다. 이것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안 하는 것이 좋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판단을 그들에게 '하게끔 한다'.
물론 이는 형식적이다. 근대의학의 '힘'을 갖고 이를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준다는 것. 결국에는 설득, 계몽이다. 그럼에도 우리 근대인들은 이것 이상으로, '동일화'로서의 이성, '하나인 이성'이 아닌 것으로 어떻게 아프리카에 개입할지 알지 못한다.
ps. 이 책을 추천해주신 가을산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