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흥미로운 통찰들이, 근대(성)을 바라보는데 새로운 시각을 준다. 특히 근본적인 측면에서. 

그는 modern을 일종의 비유라고 파악하며, 이것은 늘 '다시쓰기'를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는 리비도적인 충동과도 연결시킨다.  (1장의 3)

이러한 근본적 사유를 접할 때, 내 기존 생각들이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modern은 항상 '시기'구분과 연결되어 있음으로 '처음'이라는 욕망과 연결된다. 이 modern 또한 담론이며, 그 속에서 일종의 'narrative category'라 볼 수 있다. 

대학교육의 근본이 비판적 사고일지언데, modern을 알게 모르게 구체적 실재를 지시하는 '개념'으로 무비판적으로 가정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ow few people really know what a past is: There can in fact be no past without a powerful present, a present achieved by the disjunction [of our past] from ourselves. That person incapable of confronting his or her own past antagonistically really can be said to have no past; or better still, he never gets out of his own past, and lives perpetually within it still. (pp24~25) 

'과거'와 대면하게 되는 순간, 이는 과거로 정립되며 동시에 현재를 부각한다. 얼마전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선배로서 미안했었다는 이야기를 해서, 나를 당혹하게 했다. 너는 국문과에 들어오지 않았어야 했는데라는 말.

박사논문에,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 아비로 산다는 것에, 그 밖의 이런저런 일상의 피곤함들에, 과거는 잊혀진 채 있었다. 선배로서, 선배가 해주었어야 했지만 아무것도 못해주었다는 그의 발언은, 내가 방기하고 있었던 많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임성모 옮김),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원전, 󰡔飜譯と日本の近代󰡕, 1998)
 

 

 

 



실망이다. 대가들의 대담집은 유용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방향성이 없다. 번역과 근대, 특히 동아시아에서 번역과 근대라는 주제는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관련 논저로 특히 문학분야에서는 김병철, 󰡔한국현대번역문학사 연구 상, 하󰡕(을유문화사, 1998), 조동일,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지식산업사, 1994)를 들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과학관: 메이지 시기 일본인의 전통적인 사유구조에서 생물학보다 뉴턴적인 수학적 물리학의 충격이 컸다. 사농공상도 에도 중기부터는 상호의존적인 세포처럼 유기체의 구조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無機的인 뉴턴 역학의 자연은 일본의 자연관에는 없던 것으로서, 주관과 객관을 완전히 대립시켜서 모든 의미성이나 가치성을 박탈하고 보는 시각이 유교나 불교에도 없던 것이었다. 또 자연과학에서의 ‘실험’이라는 것 또한 새로운 것이었다. 동양은 음양오행이라는 선험적인 범주로 이해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실험은 존 듀이의 도구주의에 가깝다.

흥미로운 지점은, 메이지시기 번역의 문제를 다루면서, 단 한번도 ‘오역’이나 번역의 질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이 문제로 나름 떠들썩한 한국의 상황과 대조된다. 특히 얼마전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이 일본번역된 칸트를 ‘당당히’ 인용했다고 해서 부럽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래서 집에 둘러보니 󰡔트랜스크리틱󰡕은 어디있는지 보이지 않고, 고진의 다른 책들을 들춰보니(󰡔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윤리21󰡕) 직접 인용하는 모든 사상가들을 직접 번역해서 인용하는 것 같다. 인용의 출처를 󰡔자본론󰡕과 같이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별로 이것이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번역 수준문제의 논의가 생산적이기 이전 시기를 대상으로 논의하고 있어서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일본번역의 수준도 그다지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팀 에덴서, 박성일 옮김, 󰡔대중문화와 일상, 그리고 민족 정체성󰡕, 이후, 2008. 

(National Identity, Popular Culture and Everyday Life, 2002)

 



3부 민족 정체성의 퍼포먼스 Performing National Identity


이 장에서는 민족 정체성 형성에 사람들의 행위를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보고 분석하고 있다. 국가/지방 전통 의식이나 대중 드라마, 일상생활, 습관,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민족적 맥락에서 어떻게 ‘연기’를 함으로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지를 분석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장에서도 계속 그러하듯이, 에덴서는 이론과 분석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함으로서, 추상적 수준에서 수준높은 이론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분석으로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추상적 수준에서 에덴서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민족 정체성이란 유동적이며 다층적이며 수행적이며, 대중문화나 일상에서 조직되는 면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이론적으로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과 빌리히의 민족 정체성을 (재)생산하는 “신념, 가정, 습관, 재현, 실천의 총체”가 일상의 평범한 영역에서 민족 특유의 조건으로 재생산된다는 󰡔평범한 민족주의󰡕를 따른다.
 

 


3부에서는 민족 기념식, 스포츠, 축제, 관광, 일상 등을 다루는데 각 예는 앞서 말한 것처럼 얼마나 민족 정체성이 유동적이고 다양한 분파에 의해서 전유되고(특히 국가), 다층적인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관광을 ‘민족의 무대화’라고 표현한 것은 흥미롭다. 관광객에게는 ‘어떻게 행동할지, 무엇을 봐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들어야 할지에 관한 상식화된 생각을 뒷받침하고 현실적 규범을 유지하기 위한 담론적이고 규율적인 질서’가 존재한다. 또한 많은 부분 서구 관광객에 대한 비서구 지역은 과거 식민지 시대의 관광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형태의 무대화는 원초성, 이국성, 성애화와 관련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반면, 전통적이고 민속적인 민족문화가 무대화됨으로써 종족성과 민족 정체성을 재구성함과 동시에 관광객을 위한 진정성 없는 구경거리를 전달할 수도 있지만 죽어 가는 전통을 다시 되살려서 이를 새롭게 표현된 정체성에 주입할 가능성도 있다. 늘 하는 결론처럼, ‘민족의 무대화는 민족 주체들이 상품화된 문화를 동적인 방식으로 재전유하는 것 또한 가능하게 하는 복잡한 문제’라고 한다.

일상적인 퍼포먼스 또한 주제는 흥미롭다. 사회생활은 본질적으로 연극적이고, 우리는 언제나 그 안에서 특정한 역할들을 담당한다. 이러한 일상적 퍼포먼스는 특정한 환경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 주는 일련의 기법과 기술에 의해서, 그리고 실용적이며 구체적인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런 퍼포먼스들은 공동체적으로 공유된다는 점에서 적절한 행위 실연과 부적절한 행위 실연에 대해 문화적 지침이 존재한다. 이러한 지침, 공유된 규범들은 어떻게 민족 주체가 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일상에서 획득된 습관은 규범적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이며, 무의식적으로 몸에 각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이 몸에 체화됨으로써 자아에 일관성이 주어진다. 이런 습관이 공유되서, 정서적이고 인식적인 유대가 강화되며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공동 행동과 통념이 견고해진다.  
 

 

4부 물질문화와 민족 정체성 Material Culture and National Identity
 

이 부분도 ‘사물들이 익숙하고 상징적인 물적 세계에서 어떻게 조직되고 분배되어 문화적, 공간적, 수행적 환경을 구성하는지’, 그래서 ‘사물이 민족 정체성에 내재한 일상 세계와 상징적 상상력,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에 속한다는 점’을 살펴본다고 시작하고, 제목도 그럴듯하지만, 별 내용은 없다. 사물이 어떻게 민족 정체성과 연관되는지를 논의하는 것인데, 앞서 논의한 ‘일상생활’이 어떻게 민족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는가라는 논의에 ‘사물’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라 하겠다. 핵심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것은 자동차, 자동차 산업과 민족 정체성 정도이고 나머지는 개략적으로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다. 자동차 부분에서 기억해 둘만한 것은, (앤더슨의 논의처럼 획기적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 앤더슨의 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자동차 여행이 대중화되면서 국내의 낭만적 경관을 보러 가거나 명승지를 찾아가기가 쉬워졌으며 민족이 무엇인지 알 기회도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민족을 응시하게 될 가능성은 더 커졌다’. 여기서도 원문과 대비가 필요한데, 지적한 것처럼 Nation(al)을 민족(적)으로 번역하니, 이런 번역이 된 것 같다. 이보다는 (상상적 공동체)인 ‘국가’를 응시하게 될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이해된다. 어쨌든 이는 앤더슨이 인쇄매체의 등장과 함께 상이한 공간들을 같은 시간, 같은 지면에서 상상가능하게 만듦으로서 ‘민족/국가’라는 것이 상상될 수 있었다는 논의와 함께 생각해볼만하다. 자동차 여행이 보편화되면서, 이런저런 곳에 다니면서 ‘국가’라는 것의 부분들을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민족/국가’ 정체성의 (재)생산과 관계는 물론 있겠지만, 여기서 소략하고 만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한계인 것 같은데, 논의는 시작/소개로 끝이 난다. (마치 학부 1학년 때 들었던 ‘심리학 개론’ 같은 한 학문 분야를 개설적으로 소개하는 듯하다) 어쨌든 이는 당연히 계급적인 구분를 고려해야 하고, 과연 이를 ‘우리’로 인지하게 되는 과정을 더 철저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가령 ‘불국사’를 보고나서, 우리는 이를 ‘한국’이라는 정체성의 (재)생산에 기여하는가, 아니면 서울/지방, 지금/과거라는 이분법으로 타자화하는지 등, 복잡다단한 그야말로 ‘수행적’이고 ‘다층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이론적인 배경은 ‘사물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사물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예측하는 것은 곧 감각을 이용해 이를 몸에 각인시키는 일’이고, 이는 민족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기술이나 사물과 상호작용하게 되면서 사물은 점점 더 자아나 관계의 친밀함의 원천이 되고 있으며 공동의 주체성과 사회적 통합의 근거가 되고 있다.’ 앞서 ‘일상생활’과 똑같다. 외국에 가면, 다른 사람들이 같은 물건을 가지고도 다르게 사용하고, 다른 물건을 가지고 다르게 사용한다는 것. 부르디외가 계급적 속성(문화자본, 자본 등의 소유에 따른 xy좌표평면)에 따라 샴페인이나 포도주를 위치시켰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지영, 「허무주의의 초극과 현실에 대응하는 전복적 시적 인식의 두 얼굴 -70년대 시 동인지론」, 민족문학사연구소 현대문학분과 편, 󰡔1970년대 문학 연구󰡕, 소명출판, 2000.
 

꽤 괜찮은 글인데, 제목과 제일 처음 인용방식이 마음에 안든다. 1970년대 <<70년대>>와 <<반시>>, <<자유시>>를 ‘민중시와 무의미시의 양극화 현상’이나 ‘순수/참여’의 경직된 구도로 파악하는 것을 지양하고, 70년대 후반 시인들의 근원적 고민을 파악해보겠다는 시도이다.

우선 <<70년대>>는 60년대 <<현대시>> 동인과의 대타항을 통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조합에 자족적인 만족만을 만들어내는 미적 기능 대신에 형이상학적인 인식적 기능’을 부여하려 하고, 이를 통해 난해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고 평가한다. 내용의 핵심적 주제는 죽음, 허무였고, 이 허무를 피하지 않고 응시하여 이에 대응하는 힘을 얻었다고 평가한다. 이는 ‘주체가 환멸에 몸을 맡긴 채 언어유희에 빠지고 말았던 <<현대시>> 동인’과의 차이점이다.

궁극적으로 이 논문의 핵심은 <<반시>>와 <<자유시>>의 비교이고 <<70년대>>는 일종의 전사로서 다루어졌다. 다음과 같이 이 둘을 비교해 놓았다. “<<자유시>> 동인들의 경우는 ‘언어의 자유’를 꿈꾸고, <<반시>> 동인들의 경우는 ‘언어로써의 자유’를 꿈꾼다. 전자의 경우는 이미 언어가 현실을 드러내 줄 수 없다는 절망을 기반으로 일상 언어의 파괴를 통한 현실로부터의 가상적 자유인 ‘언어의 자유’를 꿈꿀 수 있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언어가 현실을 드러내줄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여 언어를 통해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현실의 부조리함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근저에 가지고 있는 것은 훼손된 세계 속에서 훼손된 인간성을 구원해야 한다는 당위”(351)였다는 것이다.

역시 <<자유시>>보다는 <<반시>>가 더 구미에 맞는데, <<자유시>>는 ‘소통이 단절된 인간소외 현상과 발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 상황을 고발’하며 ‘자아와 세계의 화해 불가능한 분열’을 전제하는 모더니즘적 세계관 속에서 세상의 부정성을 드러낼 뿐이다. 즉 ‘억압받고 있는 주체 내적인 상황을 주관적으로 재구성하여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러면서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는 세계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저항하고 비판하면서 유토피아적 희망을 길어 올리는 것’. 사실 이들 시쓰기의 ‘목적’을 세상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하면, 이들의 시는 말도 안되는 것이 된다. 보다, 주된 ‘목적’이란 결국 자아의 근원적인 상처, 세상과의 단절감 등이 될 것이고, 시쓰기를 통해 치유나 세상과의 연결을 도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해는 되는데, 읽거나 연구하기는 꺼려진다. 아직 ‘미성숙’한 느낌때문일까, 이는 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반시>>는 민중지향적이며, ‘언어 세공 중심인 난해시의 관념적 세계인식을 거부한 채 현실의 구체적인 진실에 충실하려 한다’. ‘위대한 단순성’을 표방한 쉬운 시를 지향하는 것이다. “<<자유시>>는 이미 파괴된 공동체 속에서의 의사소통을 포기한 채 개인적인 내면적인 육성을 발산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제로 시를 선택했으며, <<반시>>는 공동체라는 이념을 포기하지 않고 쉬운 시로 현실의 모순을 공유하는 의사소통의 기제로 시를 선택했다.” 이 지점이 문제적인데, 결국 <<자유시>>도 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어떤 층위에서든 ‘의사소통’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서적 차원에서, 한 자폐적 세계가 다른 자폐적 세계를 공감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도. 그러나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간 것이 <<반시>>적 인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정말 ‘자아와 세계의 화해 불가능한 분열’을 전제한다면, 어떻게 ‘시쓰기’라는 실천이 가능하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모더니즘’에 대한 공감과 공부가 부족하다.

마지막 <<자유시>>와 <<반시>>의 한계에 대한 박지영 선생의 지적은 새겨둘만 하다. “<<자유시>>의 경우 이들의 시에서는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다. 단지 괴롭다는 상황만이 존재한다. 그 불투명한 현실 인식은 <<70년대>> 동인들로부터 줄기차게 이어오는, 7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의 ‘막연하고 일반적인 불행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은 그 환부가 치료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 근원이 불명확한 불행의식은 그들의 시에서 절실성을 삭감시키고 있다. <<반시>>의 경우도 안타까운 면이 존재한다. 물론 이들에게는 <<자유시>>동인의 시에서 결여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 적극적인 실천이기보다는 김명인의 시에서 드러나는 ‘떠남’과 정호승의 시에서 드러나는 ‘기다림’과 같은 막연한 태도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 역시 이들의 사회적 인식이 분석적 인식이 아니라 정호승의 ‘슬픔’과 같은 정서적 인식에 가깝다는 데서 파생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그들이 표방했던 ‘위대한 단순성’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한데 이는 그들이 현실모순의 핵을 바라보는 시선이 ‘위대한 단순성’이라는 표제아래 지나치게 단순화되었던 것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이러한 원인을 ‘70년대 현실의 모순’이 ‘너무나 순식간에 중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극복의지가 ‘이 충격과 그로 인한 상처에 눌려 다소 소극적이고 관념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80년대에 가서 “<<반시>>의 경우는 좀더 이론적으로 무장되고 시적 경향도 좀 더 견고해졌으며, <<자유시>>의 경우도 문학과 사회와의 연관성에 대한 보다 깊은 고민을 시작하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경래 2009-07-0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뭔가 전문적이고 심오한 내용이라 3문단 읽다가 마우스를 스크롤 해버렸다 -_-;
낼 아침에 시험보러 갈 것보다 시험보러 가는 길에 아침으로 에그맥머핀을 먹을까 소시지에그맥머핀을 먹을까가 더 고민된다. 맥모닝 3000원 할인 행사가 끝나서 안타깝다.
기인도 주말 사랑하는 마눌님과 함께 잘 보내셈~~

2009-07-05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