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라는 것은 집게와 클립에 의해 여러 겹으로 덮였던 장막처럼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했던 기관이 노출되는 것이다. 밀림 속의 사냥꾼처럼 발자국을 더듬어 가노라면 파괴된 조직이나 응어리진 종기나 종양의 틈바구니에서 별안간 거대한 맹수인 <죽음>이라는 것과 부딪치게 된다. 거기서부터 싸움은 시작된다. 침묵의 미친 듯한 투쟁이, 그 싸움에는 오직 가냘픈 메스와 한 개의 바늘과, 그리고 무한히 정확한 솜씨만이 무기일 뿐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극도로 긴장한, 눈이 부시게 흰 육체를 통해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핏속에 어릴 때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메스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바늘을 흐트러뜨리며, 손을 지치게 하는 당당한 비웃음을.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불가사의하고 맥박치는 것, 생명이 인간의 무력한 손에서 홀연히 물러나 부서져서 걷잡을 수 없는 무서운 암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때를. 바로 조금 전만 해도 숨을 쉬고 자기라는 존재를 지니고,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얼굴이 딱딱하고 이름 없는 마스크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을. 그런 의미도 없는, 걷잡을 수 없는 무력함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설명될 수가 있을까?-26쪽
"제가 천박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들의 저주받은 생활 속에는 천박한 점이 너무나도 적었어요! 전쟁, 굶주림과 파괴를 지긋지긋하리만큼 체험했지요. 혁명이니 인플레이션이니 해서 말예요. 그렇지만 한번이라도 조그만 안정이라든가, 홀가븐한 기분이나 휴식, 또는 여유 같은 건 조금도 맛본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까지도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시니, 정말 우리들의 부모는 우리들보다 훨씬 평온하게 산 것 같아요, 라비크." "그렇소." "우리들 인생에겐 오직 하나의 찰나적인 짤막한 인생이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그대로 지나가 버린다니...." (...) "저는 하잘것없는 무가치한 여자예요, 라비크. 제가
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뽐내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다만 행복하고 싶어요. 그리고 세상만사가 이렇게 난해하고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겐 오직 그것뿐예요."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지, 조앙"-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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