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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한국 소설의 위기는 비평가들에게도 있다?

* 뉴스메이커(2007. 6. 6)

[커버스토리]‘주례사비평’이 한국소설 죽인다

총애하는 작가 띄워주는 수단… 단편장르 집중현상도 한 요인

우리 문학, 또는 우리 소설에 활력이 사라진 이유로는 작가 못지않게 비평가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있다. 인간적으로 친해진 호의적인 안목이 작품에까지 연장되어 이른바 끼리끼리 잘 봐주기의 행태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독자의 반응은 시큰둥한데 평론가들의 비평은 종종 호들갑이다. 중견 평론가 구룡모씨는 “비평가가 시인·작가를 경배하고 그들이 생산한 작품을 무조건 예찬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의 문학적 장이 활력을 잃어가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비평권력’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어려움을 겪는 한국소설의 이미지. (정지윤 기자)


한 조사에서 중앙대 문창과 학생의 37%가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15%가 게임시나리오와 장르문학을 교과목에 포함해주기를 희망했다. 학생들의 대중문화에의 쏠림 현상이 커지고 있어 문단의 대응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구씨는 비평가에게 부여되는 권력은 ‘필요악’이라면서, 문제는 비평권력 자체가 아니라 권력의 바르지 못한 사용이라고 말했다.

“한국 작가들 자의식 너무 강해”

비평은 대상을 교육시키려는 태도가 아니라 작품을 해석하고 그것에 대해 시비를 가려 작품의 진가를 밝히려는 태도다. 그러나 한국의 소설 비평은 비록 전부는 아니라 해도 종종 자기가 총애하는 작가를 띄워주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작가에게 영합하는 이른바 ‘주례사 비평’은 출판사의 매출 전략과 맞물려 한국 소설을 죽이는 촉매제 역할을 해왔다는 지적이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 역시 한국 소설의 위기를 ‘비평의 신뢰성 상실’로 꼽고 있다. 그간의 한국 소설 비평이 작품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담과 주례사로 일관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발언을 신뢰했던 독자들이, 오히려 지금 한국 소설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소설의 단편장르 집중현상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우선 각종 문학상제도가 단편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양대 문학월간지 ‘현대문학’과 ‘문학사상’이 주관하는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이 수상대상을 단편 내지 중편으로 제한하고 있다. 역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황순원문학상’과 ‘이효석문학상’ 역시 대상을 중·단편으로 한정하고 있다.

물론 장편을 대상으로 하는 상도 적지 않다. 문학동네소설상, 한겨레문학상, 세계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삼성문학상 등 장편공모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상은 대체로 출간된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행본 출판’을 목표로 한 신인급 작가에 대한 공모의 성격이 강하다. 문학전문기자 최재봉씨는 그 서글픈 결과를 이렇게 지적한다.

“작가들은 막상 장편소설을 쓰려다가도 잡지에서 단편 청탁이 오면 거절하기 어렵다. 문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잡지 편집위원들의 심경을 거슬렀다가는 그나마의 청탁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한다. 한편으론 중·단편에 주어지는 주요 문학상의 상금과 명예가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한다. ”

한국 문단과 문학상제도가 단편소설에 편중됨으로써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장편소설의 미학적 혁신과 문학성이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소설 독자층의 변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는 현재 한국의 소설 독자층은 대단히 협소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지망생 그룹과 20~30대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이지만, 1970∼80년대의 소설시장의 활황을 가능하게 했던 30대 이상의 남성 독자들과 소설에서 ‘재미’ 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계몽독자 또는 지식인 독자들이 대거 소설시장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소설보다는 역사 전기물과 인물평전류가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씨(71)는 작년 여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호되게 비판하며 한국 대학생들의 독서 성향을 질타했다. 유씨는 ‘현대문학’ 2006년 6월호에 기고한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을 놓고’라는 글에서 대학생들이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노르웨이의 숲’(한국어판 제목은 ‘상실의 시대’)을 가리켜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 지적했다. “무라카미의 소설은 작가가 이미 사회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상실했거나 예술적 포부를 가질 수가 없는 시대의 언어상품”이라는 것이다.

유씨의 이런 단호한 지적은 “지난 10년간 대학 초년생의 문학독서 성향을 조사”해 온 결과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맞닿아 있다. 인구 대비 대학생 수 전 세계 1위(1997년)라는 통계와 젊은이들의 문학적 교양의 결여 사이의 불일치를 겨냥해 그는 “그들(=젊은이들)이 매우 부실한 문학교육의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한다.

계간지 ‘문학수첩’ 2006년 여름호의 특집 ‘대학에서 문학은 살아남을 것인가?’도 유씨의 비판적 시각과 일맥상통한다. 특집에서 다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김원일·조정래 최근 장편 긍정적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학생들의 대중문화에의 쏠림 현상이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의 경우 응답자의 37%인 24명이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교과목에 포함시켜주기를 바랐고, 게임시나리오와 장르문학을 원하는 학생도 15.4%인 10명에 이르렀다. 젊은이들이 자아를 확립하고 사회의 책임감 있는 일원으로 성숙해가는 교양 형성의 장으로서 대학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유종호씨의 지적과 통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지적하는 한국 소설관도 음미해볼 만하다. 한국은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인지 작가의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작은 얘기부터 풀어나갈 줄 몰라 무겁고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작가들이 ‘내가 작가요’ 하고 잘난 척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일본 소설의 ‘미덕’을 이렇게 지적한다.

“가볍고 밝고 유쾌하다. 한 장르에 치우치지 않으며 적당한 생각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삶의 본질이라는 무거운 주제보다 가족과 청춘, 성장기의 진통 등을 그려내는 테크닉이 뛰어나다. 전반적으로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가 모호해서 양쪽 다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

평론가 정호웅씨는 그러나 우리 소설이 길을 잃고 골짜기에 빠져 있다는 ‘소문’에 대해 강력히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 소설의 자기갱신과 창조의 생명력이 여전히 활기차게 살아 약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진작가들이 최근 쏟아낸 장편들의 가능성에 높은 평점을 매긴다. 김원일의 ‘전갈’, 조정래의 ‘인간연습’과 ‘오 하느님’,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한승원의 ‘소설 원효’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작품은 ‘역사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내걸고 추상화된 관념의 규정성을 해체하며 과거 진실의 포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작품 속에는 ‘현실 공간의 가상 공간화’라는 새로운 형식 실험도 모색되고 있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주제와 형식 탐구, 중견작가들이 새롭게 포착해내는 역사의 진실과 삶의 본질 탐구가 아직 한국 소설계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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