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제 드디어 지쳤다. 맑스주의이든, 어떠한 주의이든, 모든 이론과의 결별을 선언해 버리자.

이론이란 무엇인가, 세계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담론체계. 이론에 대한 학습은, 언제나 어떤 체계에 대한 나의 동일화, 점근선에 지나지 않았고, 이러한 이론 학습은 계속 '새로고침' 처럼 지리한 방식으로 나에게 이해에 대한 강박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오지 않는 '최종심급'처럼, 이론에 대한 갈망은, 세계에 대한 이해는 늦춰지고 만다.

 

맑스주의와 결별하기 위해, 내가 떠올린 단 하나의 문장은, 바로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의 테제 중, 가장 유명한,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지금껏 이는 나는 활동가들을 존중하는 데, '현장'에서만 결국 이론은 도출될 수 있다는 것으로, 세상의 복잡다단하고 다층적 구조는 그 '속'에서 함께 부딛기며 창조되는 것이라는 말로만 이해해 왔다.

 

이론에 반해야 한다. 적어도, 학습과 이해, 어긋날 수 밖에 없는 동일화에 반해야 한다. 오히려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 그 변혁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해될 수 없다. 내가 세상과 접속할 때, 내가 세상에 어떠한 변혁들을 던지고, 또 받는 적극적인 피드백만이 의미있다. 世上이든, 世想이든, 世象이든, 世狀이든  世界이든, 저 오래전 '아'와 '비아'의 투쟁이 아니라, 세상이 내 안에 들어와있고, 나 자체가 세상의 일부이다.

 

나로부터의 변혁과 세상에의 나아감이란, 결국 새로운 상상력, 새로운 접촉들, 조직으로만 가능하다.

이제 이론과의 동일화는 그만 끝내자.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일상에서의 유희, 창조, 새로운 마주침과 접속의 의미로서만의 공부.

 

석사과정 내내 지리하게 물었던, 이 공부가, 문학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은, 미친 질문이다. 경제주의, 혁명주의, 소부르주아적 자책게임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예술을, 문학을, 새로운 상상력을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박민규의 "삼미슈퍼 스타즈"를 비판한 시선과 동일한 시선으로 이러한 '예술타령' 내지는 '상상력 타령'을 비난할 수 있다. 지금 '민중'은 굶어죽어가고 있고, 매년 생존권마저 지켜지지 않는 일터에서 착취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내 그림자를 잡아끌어 뽑으려는 내 안의 어떤 초자아. 이의 해결은 이론으로, 세상에 대한 이해로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자체가 자위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믿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나는 나아가야만 한다.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모든 일을 안 한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새롭고 우의로운 만남과 접속들로, 내 주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우의로움을 확장시켜 나갈 뿐이다. 결국 이론들이란, 하나의 상상력으로 구조화된 체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상상력이 확장될 수 있다면, 세상도 새롭게 재구조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이브하게, 이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제 그것뿐이다. 패배주의도 아니고, 자학적 심정도 아니다. 그냥 인정할 뿐이다. 이제야 '어른'이 된 것인지, 아니면 드디어 학교를 2년간 떠나있더니 비학교적으로 사고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자폐성을 경계하고, 끊임없이 즐겁게 접속되어 확장되기만을 바랄뿐.

 

세계를 이론화하여 이해하려 하지 않겠다. 다만 세계가 되어야 한다.

(나는 아직 이렇게 어리다. 분열적 시선/자아. 자기변명.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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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8-08-2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쵸! 차마 쓰기는 뭐했는 데 이런 것이 필요했답니다.
물론 검색하면 알수 있었겠지만 동가홍상이죠.
이케 책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있으면 더 좋죠. ㅎㅎ

마늘빵 2008-08-26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번역가의 길을 걸으시는건가요? ^^ 오랫만입니다.

기인 2008-08-26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ㅎㅎ
아프님/ ㅎㅎ 번역도 하고 기획도 하면서, 대학원 다니려고요. 역시 뭐든 먹고 살면서 공부도 해야되는데.. 힘드네요 ㅡ.ㅡ;

마늘빵 2008-08-26 19:45   좋아요 0 | URL
지금 박사과정 들어가시는거죠? ^^ 기인님도 한번 봐야하는데. 아직까지 연이 없네요.

기인 2008-08-26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아프님 전화번호는 아직도 고의 제 핸폰속에 저장되어 있답니다 ㅋㅋ
다음 번개때 :)

이매지 2008-08-26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나타나셨다 했더니 그간 이런 일을 하셨군요! ㅎㅎ

기인 2008-08-26 22:43   좋아요 0 | URL
오^^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매지님 :) 준비하셨던 일은 잘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하하; 뭐 1년 동안 번역만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잘 놀았지요. ㅋㅋ
일어공부랑 번역만 했던 것 같아요. 슬슬 알라딘 활동 다시 해야 하는데..
귀차니즘이 늘어서 어찌될지는 몰라요 ^^; ㅎ

2008-09-04 1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8-09-04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넹 :) ㅋㅋ 속삭이신 ㅇ님 목소리도 부드러우시네요 ㅋㅋ 예전 느끼남 별명이 문득 떠올랐다는 ^^
헐.. 속삭이신 ㅇ님 목소리도 부드러우시네요... 약간 미묘 ^^; ㅋ

2008-09-16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9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8-10-10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ㅎㅎ 뭔가 삶의 계기들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
복학하면 다시 알라딘을 열심히 해볼까 생각중입니다 ㅋㅋ
그럼 다시 닉네임을 바꿀수도 ^^;
 

 

 

 

 

흑흑.. 초등학생, 중학생을 대상으로.. 잘 팔려야 할 텐데..

먹고 살기 힘들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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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8-08-2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번역도 하시나 봐요..ㅎㅎ;

재미있나요?^^

전호인 2008-08-2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기대가 됩니다.
우리아이들에게도 적합한 책이겠군요
^*^

릴케 현상 2008-08-26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조카들한테 사줄 만한 책인가요^^ 간만

기인 2008-08-2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모두들 오랫만입니다 :) ㅋㅋ 제 입으로 재미있다고 하기는 쫌 그렇고. 아이들이 좋아했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
 

메일이 문제가 있는지, 답장을 해도 계속 답장이 안되네요.

kiinchong@hanmail.net 이 쪽 메일로 한번 메일 보내주세요. 메일 주소가 틀렸는지 계속 되돌아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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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2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11-22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자상한 ㅇ님 :) 요즘 참 정신없이 지내요 -_-; 글은 somun.info에만 간간이 올리고 있을뿐이에요;; 역시 88만세대라 그런지, 비정규직에 밥만 겨우겨우 벌어먹고 사느냐고 바쁘답니다;; 쩝..

쿨룩쿨룩 2008-05-1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학을 잘 모르는,,,그래서,,,보기 딱한, 너절한 서평들. 한심하고, 가련하다. 공부를 폭넓게 하고, 겸손하게 써라,

기인 2008-05-1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쫌 열심히 재미있게 공부해봐야 하는데..
쿨룩쿨룩님 서평도 기대되네요^^ 많이배우겠습니다~
 

 

 

 

 

돼지머리들처럼    -나희덕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며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입 끝을 집어올린다.
자, 웃어야지, 살이 굳어버리기 전에.

새벽 자갈치시장, 돼지머리들을
찜통에서 꺼내 진열대 위에 앉힌 주인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웃는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웃어야지, 김이 가시기 전에.

몸에서 잘린 줄도 모르고
목구멍으로 피가 하염없이 흘러간 줄도 모르고
아침 햇살에 활짝 웃던 돼지머리들.

그렇게 탐스럽게 웃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적당히 벌어진 입과 콧구멍 속에
만 원짜리 지폐를 쑤셔 넣지 않았으리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진열대 위에 얹혀 있다는 생각,
자, 웃어, 웃어봐, 웃는 척이라도 해봐,
시들어가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긴다.

아--- 에--- 이--- 오--- 우---
그러나 얼굴을 괄약근처럼 쥐었다 폈다
숨죽여 불러보아도 흘러내린 피가 돌아오지 않는다.

출근길 백미러 속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머리 하나.




양질의 시들을 꾸준하게 쓰고 있는 나희덕. 2008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에서.
참 좋은 시다라는 감탄보다는, 처연하게 지쳐가는 나희덕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그녀의 시력도 이제 근20년이 되어간다. 그녀가 90년대 초중반 썼던 시들을 기억한다.
세상에 지친, 외로운, 쓸쓸한 이들을 처연하게 바라보다가도 따스하게 감싸던 시선.
어쩌면 그 시선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지침, 외로움, 쓸쓸함을 외부 존재에게 전가시키고 오히려 자신은 편한 마음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기실, 그녀도 지치고, 외롭고, 쓸쓸하다. 예전 그녀는 지치고 외롭고 쓸쓸한 외적 존재로 인하여, 그들을 그리면서 그 지침, 외로움, 쓸쓸함을 견디고 이겨냈다고 한다면, 이제 그것도 포기한다. 실상 지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은 자신이었음을. 출근길 백미러 속에서 발견한, 40대 시인...

그녀의 93년 창비 여름에 실린 시를 다시 본다.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 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 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던 20대 후반의 시인, 자신의 마음을 사물과 함께 공감하는 40대 초반의 시인. 시인이 건너온 삶들과 함께, 흐르는 시를 읽는다.

(원래 somun.info 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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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4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10-14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고맙습니다~ 알라딘 들리고는 있었는데 글은 못 올렸네요 ㅎㅎ 종종 이제 글도 올리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