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가득 찬 책*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44-45쪽
전체적으로 기대한 만큼의 (김수영 문학상이라는 이름은 얼마나 나를 기대하게 하고, 또 많이 실망시켰는가!) 시집은 아니지만 이 표제작은 정말 매력있다. 초반에 성적인 은유와 바다-모성-여성 이라는 연결. 또 '타자'와 깊은 바다라는 이미지. 바다라는 타자라는 원초적 공포감의 대상 등. 이러한 타자는 나 또는 네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홑겹의 환어(幻魚) 지느러미'로 환상적이고도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아, 이런 시만 쓸 수 있다면!!!
이 시 하나만으로도, 이 시집은 건진 셈.
이런 시들 보면, 진짜 시가 너무너무 쓰고 싶어진다. 이런 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