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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뉴스비즈니스 - 저널리즘 쇼 비즈니스를 뒤집는 아랍 특파원 표류기
요리스 루옌데이크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얼마전, 안중근이 테러리스트인지 의사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일본 관방장관의 발언으로, 우익화되고 있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많은 반발이 있었다. 테러는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라고 정의되고 있고, 의거는 "정의를 위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의로운 일을 도모함."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둘은 모순관계가 아니다. 정의를 위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로서 의로운 일을 도모한다면, 그 행위는 테러이면서 의거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테러리스트이면서 의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테러리스트'라는 명명에 반발을 했을까? 이는 혹시 우리가 9.11 이후의 '테러리즘'에 대해서 미국에 의해 편향된 정보를 바탕으로, '테러'는 무조건 나쁜 것이기 때문에 '의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책은 이에 대한 의문을 풀어준다. 많은 미국인들, 그리고 이런 미국의 정보로 세상을 판단하게 되는 한국인들은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의 연관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둘 다 '나쁜 놈'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오사마 빈 라덴이 아랍세계에서 내쫓고 싶어했던 것이 바로 후세인 같이 세속화되고 부패한 정치가들이었다. 우리는 왜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집단이 '테러'를 했는지 묻지 않는다. 테러는 나쁜 것이기 때문이고, 그들은 거의 악마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중근이나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도 당시 '평범한'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 또한 '테러리스트'이면서, '의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너무 쉽게 고려되지도 못한다.
이러한 인식들은 모두 뉴스에서 비롯한 것이다. 거대한 '지구촌'에서 우리는 지구 반대편 소식도 거의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뉴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만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뉴스' 또한 '비즈니스'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장치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있는데, 1부에서는 아랍 특파원들이 생활하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 서술한다. 아랍 특파원들은 일반 중동인들과는 격리된 그들만의 '특급' 호텔이나 거주지에서 살고, 사실 아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본국보다 늦게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국의 편집국에서 어떠한 일이 터졌으니 그 근방으로 가보거나 알아보라고 지령이 내려지면 그 쪽에 가서, 이미 친숙한 정보원들을 통해서 사건을 보도하게 된다. 현지에서 직접 탐사해서 무언가를 알아내서 보도한다는 것은 중동의 특성상 불가능에 가깝다. 비밀경찰과 스파이들이 가득한 독재사회에서 보도를 전제로 하면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뉴스'라는 것이 새로운 것을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이나 사건 사고과 과다 대표되고 과다 재현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폭탄 공격 등을 보며, 어떻게 저기에서 사람이 살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그런 일은 '뉴스'화 될 정도로 '드문'일이고 그 곳에서는 또 일상이 진행된다. 마치 연평도 포격 때문에 미국 관광객들이 한국 관광을 꺼려할 때, 그곳에 사는 '우리'들은 '뭐 별 상관 없어'라면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관계에 대한 혜안도 보여준다. 저자는 직접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집을 얻어서, 어떻게 이스라엘이 '일상적인 공포'를 팔레스타인에게 가져다 주는지를 목격한다. 일상적으로 잘 다니던 도로가 검문검열을 핑계로 막히고, 밤늦은 새벽에는 돌연 전화벨이 울리고, 일상적인 '모욕감'을 팔레스타인에게 주는 식으로 '지배'는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최신형 전투기와 무기를 가진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러한 팔레스타인들이 자살 폭탄 테러를 행하는 것을, 우리는 '의거'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인 지배는 뉴스화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일상'은 '뉴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이 일상적으로 감수해야만 했던 치욕은 '뉴스'가 아니고, 안중근이나 윤봉길 의사의 '테러'만이 뉴스가 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뉴스를 편안한 안방에서 시청하고 있는 세계인들은 그러한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들만을 비난하게 되고 만다. 마찬가지 상황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언론에 관심이 있거나, 중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민주사회에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언론에 관심이 없어서는 안되니, 결국 모두에게 권하는 바이다. 손석춘의 '신문읽기의 혁명'과 함께, '뉴스 읽기의 혁명'적인 전환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