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가난이 있다. 매운 것, 짜디짠 것, 또는 싱거운 것. 혹은 시린 것, 효도르에게 턱에 한방 맞은 것 같이 급성적이고 충격적인 것, 어느새 돌아보니 한 것은 없는데 서른이 다되었더라 같이 누적적이고 만성적인 것. 내가 이렇게 가난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은, 서른이 넘은 한 회사원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와서 문학을 전공하고 싶다고하며 만나서, 그가 말로만 듣던 인문학도의 '가난'에 대해서 물어왔기 때문이다. 즉, 견딜만한지를 묻고 싶었던 터.
사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서른이 넘은 대학원생들끼리는, 일단은 '사람'노릇 못한다는 이야기를 서로 많이 한다. '우리사회'에서 서른이 넘은 '사람'이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돈 드는)일은 해야될 터인데, 이를 못하니까 '사람'노릇을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간혹 가난이 너무도 짜디짠 것이 되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러나 여러가지 가난이 있다고 말을 꺼내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부자되세요'가 여러 광고들에서 주된 카피였었는데, 이런 욕망들이 빚어낸 세계적 금융위기와 그 후폭풍인 재정위기로 인해, 그러한 소리들은 쏙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 '부자되세요' 소리가 꽤나 불편했었는데, 부자가 된다는 것은, 항상 상대적인 것으로서, '남'들보다 부자인 셈.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되었든 많이 가져야 하는 것.
구태의연하게, 부자가 곳간 걱정을 더 해야되서 발을 못 펴고 잔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었다. 결국 문학을 전공하겠다거나, 인문학을 업으로 하겠다는 소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 진리에 대한 열정을 목표로 삼겠다는 소리다. 물론 이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도 마찬가지겠지만, 문학 만의 특징이 있다면, 문학을 매개로 인간에 대한 경험적 공감과 이해를 추구한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다수인 약한자들의 삶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길은, 자신 또한 그들 중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며, 또 일부가 되는 길일 터이다.
가난은 인문학도가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고 사유하고 배고파 하며 연대하기 위해 필수적인 동지인 것이 아닐까.
*흠 대학신문에 투고해야 되서 써본 것인데, 역시 항상 생각과 글은 차이가 나네요; 제한된 글자수에 하고 싶은 말을 써야하니 생각이 이래저래 많습니다. 우선은 초고고 생각나는대로 고쳐볼 예정입니다. 여러 의견 부탁드려요 ^^


